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것은 원숙해지는 것이며,
원숙해진다는 것은
무한정 자신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에서
시집을 펼쳐들었다. 시인의 말 모두에 적힌 것이 이 글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정향이 있을 것이다. 때때로 변하고, 다가가거나 물러서면서도 변하거나 제대로 보지 못해 못 알아차린 것들이 그것일 것이다. 코나투스. 친숙한 사물들에는 나의 시간과 정념, 아니 때에 따라 변하는 마음이 어려있다. 마음이 출렁거리는 이상 그 사물들을 잊을 수도 지워버릴 수도 없다. 어느 순간 다가온 너이기도 하다. 바보같이 멈추는 것에 모든 시간들의 팔할을 주었다. 멈추어 있는 것만 보려했다. 마치 사물의 정수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것은 없다. 그래서 움직임 속으로 들어가보려고 기를 쓴다. 아니다 기를 써서 되는 일은 아니다. 마음을 준다. 감정의 결에 더 마음을 주고, 한 것보다 하려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 딱딱하게 고정된 시선보다 여러 풍부한 시선이 흘러나오거나 배여있는 것들을 본다. 그래 힘겹다. 하지 않던 일을 해서 힘들다. 뭔지 모르겠어서 힘이 든다.
지난 토요일 기다린 만남이 있었다. 보문산 골목길은 반십년이나 된 과거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여전히 이십칠팔년이나 된 기억과 사건들도 묻어 나왔다. 문득 나라는 사물은 무언가라고 묻는다. 내가읽는 나가 아니라, 친애하는 사물들처럼 이리저리 변하는 나를 염두에 두어봤다. 벗들과 이동하는 중에 서편에 초승달이 걸려있다. 그 달은 여름의 목을 치고 있는 듯 싶었다. 더위에 질식할 것 같은 여름의 목을 댕강치고 싶었다.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쓸데마다 한번 죽어야 한다는 글이 생각난다. 어느 시인의 말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그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화석처럼 멈춰진 나란 사물을 만나기도 싫고 그런 너도 만나기 싫다. 뭔가 스스로에게서 절반 발을 뺀 나. 그래 그 표정을 다시 보고 싶은게다. 가을에 내 얼굴을, 네 얼굴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라고...너의 얼굴에 스친 바람결들이 너를 다르게 손짓한다면, 그 손가락이 천개쯤 되어 어디를 볼지 정신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다.(*허수경시집 누구도...에서) 물론 이는 글의 오버이기도 하다.
신현림 시인의 삶을 잘 몰랐다. 반지하 앨리스의 3부를 날름 읽었다. 앞의 시인의 말도 삼켰다. 싫어할 수게 없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