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불가능에게로
1.
[ ] 농담 한 송이 -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끝끝내 서럽고 싶다/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살고 싶다
[ ] 그 그림 속에서 - 생각해보니 꽃이나 당신이나 모두 노래의 그림자였군요 치료됮 않는 노래의 그림자 속에 결국 우리 셋은 들어와 있었군요/생각해보니 우리 셋은 연인이라는 자연의 고아였던 거예요 울지 못하는 눈동자에 갇힌 눈물이었던거예요
[ ] 이 가을의 무늬 -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 ] 베낀-오늘 아침 국 속에서 붉은 혁명의 역사는/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다/.....꿈은 빛을 베껴서 가을 장미의 말들을 가둬두었다/그 안에 서서 너를 자꾸 베끼던 사랑은 누구인가/그 안에 서서 나를 자꾸 베끼는 불가능은 누구인가
[ ] 네 잠의 눈썹 - 그 마음에 맺힌 한 모금 속/한 사람의 꽃흉터에 비추어진 편지는/오래된 잠의 눈썹//시작 없어 끝 없던 다정한 사람아/네가 나에게는 울 일이었나 나는 물었다/나니, 라고 그대 눈썹은 떨렸다
2.
[ ] 포도 - 잎의 손금을 부시도록 비추던 빛이/공중에서 짐짓 길을 잃는 척할 때// 열매들이 올 거다
[ ] 수박 - 나, 수박 속에 든/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 ] 목련 - 당신이 지면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어요/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
[ ] 라일락 - 웃다가 지네/나의 라일락
3.
[ ] 연필 한 자루 - 붉게 울면서 태양과 결별하던 자두를 그렸다/.../늦여름의 만남, 그 상처의 얼굴을 닮아가면서 익는 오렌지를/그렸다/... 마침내 필통도 그를 매장할 때쯤/이 세계 전체가 관이 되는 연필이었다. 우리는/점점 짧아지면서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했으나/영영 생각나지 않았다/우리는 단독자, 연필 한 자루였다
[ ] 우연한 감염 - 나의 망설임은 당신을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폭력인지
[ ] 온몸 도장 - 마당에는 빛만 가득하다.....유리창에는 내 그림자만/검은 온몸 도장 같은 내 그림자만//..//그런 다음 무얼 하지?/아직 마당엔/빛의 연기가 하얀데/빛의 향기만이 멈추어 섰는데
4.
[ ] 오래된 일 - 눈동자의 시절/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지독한 봄날의 일/그리고 오래된 일
[ ] 발이 부은 가을 저녁 - 바람은 파스를 붙인 어깨로/늙은 호박의 가장자리를 말리고/마당 그늘에서 고사리는 갈빛의 우산을 펴네요//...별들에게는 빛이 발이었나 봅니다/대야는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 ]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사실은 세기의 차이다/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이것이 고독이다//...잘 지내시길,/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별의 창백한 빛이여
[ ] 유령들 -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이 21세기의 일입니다
[ ] 빙하기의 역 -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누구에게든/누구를 위해서든
[ ] 가을 저녁과 밤 사이 - 사랑이 무어냐?// 당신을 두고 가는 거라고 대답했을 때 아, 우리는/멍들었네...
5.
[ ] 가짓빛 추억,고아 - 어느 날 슬플 때 빛은 무자비했나 어느 날 욕정에 잡힐 때 빛은 아련했나 어느 날 기쁠 때 가지는 사라져서 빛은 뼈 속으로 혼곤하게 스며들었나 그 뒤에 돋아나는 빛은 자지러지게 우는 갓 태어난 아이를 닮으며 사무치게 널 안았나
[ ] 언제나 그러했듯 잠 속에서 - 모르는 이가 나를 안는다/모르는 이의 잠을 나는 잔다/나는 노래를 부른다/이 노래는 수십 년 전부터 불렀는데도/부를 때마다 아프다/아파서 그만두고 싶은데/모르는 이가 자꾸 시킨다/불러, 그 노래를
[ ] 나는 춤추는 중 -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슬픔은 명랑하게 온다
볕뉘
연필 한 자루로 그리는 그림들.....그 안에 노래의 그림자로 남는 꽃, 너, 그리고 나.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고.... 오래된 일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그 끝을 잡는다.... 기쁨은 흐릿하게 오는 것이라고.....그녀는 농담 한 송이를 슬쩍 건넨다.....그래.....나비의 색깔이 밝아진다...그녀가 그린 그림은 빛이 도드라지게 어두운 부분을 칠하고 칠했다는 것을......... 시어에 다른 색감들을 잔뜩 부여하면서.....별과 달과 눈과 빛과 과일과 태양을 다시 다시 그려보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