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이기에 쓸 수 있는 소설이다.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주저 없이 뒤엎는 단호함과 논픽션일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길정도로 존재감이 느껴지는 등장인물들. 게다가 손님은 마치 미스테리물을 읽는 것 같은 스릴의 끈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아 재미까지 더해준다. 현재와 과거를 공백 한 줄 외에는 일언반구 설명이 없이 넘나들고, 더 기막힌 것은 화자마저도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순간순간 바뀐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고 내가 페이지를 건너뛰었나...하는 생각에 앞장을 들춰보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중반부즈음에 이르자 그 불친절한 글쓰기가 읽는 이의 사고의 벽을 깨고, 책 속 세상으로 더 깊이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동족상잔의 비극...반공교육 시간이면 육이오를 칭하면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던 그 문구가 이토록 절실하게 느껴져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민족, 역사, 전쟁, 분단, 나아가 통일. 그러한 단어들을 진부하다고만 느끼고 잊어가는 젊은 세대들을 새로이 각성시킬만한 반가운 소설이다.
빗소리가 적적하다. 어제 아버님 당신의 전화도 맘에 걸린다. 장남인 나는 가족 홈페이지에 집안 대소사라는 란을 두고 조모 이장문제를 꺼낸 적이 있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 별다른 것을 한적이 없다. 어르신네는 자식들 문제와 묘소,꿈이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 삶과 함께 공유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의만이라고 생각하기는 그렇지만, 뜻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는다. 가급적 자식들에게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도 당신은 들키곤 한다.
그런 당신이 벌써 십오년전 찾아낸 증조할아버지 묘소를 군제대후에 찾아내어 갔다. 그리고 함께 한 오촌당숙이 돌아가시던 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에... ... 자식들 관심밖에서 이장이 되었고, 매년 일정비용을 들여 금초를 하게했고, 이제는 연고마저 없어지고, 모실 수 없어 당신이 내려가 마무리를 지으시려는 것 같다.
어르신 맘속엔 늘 함께 숨쉰다. 내 맘속에도 늘 걸려있다면 그것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지만... 기복이라거나 운이라거나, 또 다른 하나로 폄하시키기엔 부적합한 것 같다. 이미 고인이 되신 숙부님과 대학교다닐때 다툰 적이 있다. 부모생각하지 않는 자식과, 경도된 생각에 가족이란 테두리가 부담스러워 허우적대던 학생과... ... 다행히 불상사는 없었지만, 내내 맘에 걸리고, 맘에 걸려들 하신다.
군대제대를 하면서 남도에, 증조할아버지 흔적을 쫓으러갔다. 부친의 배려도 있겠지만, 가는 길 동행한 오촌 당숙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고모님들의 삶. 고인이 되신 조부의 삶. 부친의 삶이 일목요연하게 다가오지 않지만... ...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 지난 해, 이제는 아무런 연고마저 없을 마지막 걸음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알기 무섭고 두려울지도 모르겠다. 가족사나 혈연의 꼬리를 잡고 가다보면, 친가나 외가나 상관없이 두려움이 앞선다. 고스란히 담겨있는 일제의 잔재와 전쟁의 그늘과 근대의 막막함, 지금의 암울함이 겹쳐있어 아는 것 조차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묻어서 삶 속에 배여있을 엄청난 폭력과 삶의 난장에 꺾여 차마 알고 싶지 않을지도 모를 것 같다.
<손님>을 읽으며 일그러진 우리의 <근대>, 울컥거리는 삶을, 그저 지나치는 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을 ... ... 가족을 동네를 돌아볼 수 있을까? 갈기갈기 찢어논 우리는 어디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손님>에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붙어있는 연을 끊으며 그것이 전부라고 들이대는 것은 아닐까? 담배연기처럼 흩어지며 흩어지는 것을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를 제대로 보기나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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