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 ] 아테네에서도 예술의 모방이라는 정의에 대한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그 이론이 유행했다는 사실이 예술과 일상 생활이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만약 예술이 삶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어느 누구도 그러한 예술 개념을 생각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모방이론은 사물이나 사건을 문자 그대로 복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주요 제도들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7

[ ] 예술가는 다름 아니라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사고한 내용이 원래 주어진 대상들 속으로 통합되는 경험의 순간을 잘 포착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저항과 긴장이 생기는 것을 회피하려 하지 않으며 이를 즐기기까지 한다. 예술가는 저항과 긴장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항과 긴장이 가져올 가능성 때문에, 전체적으로 통합된 경험을 생생하게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저항과 긴장을 좋아한다. 과학자들은 심미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과 반대로, 관찰한 내용과 사고한 내용 사이에 불일치와 긴장이 뚜렷이 나타나는 문제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41

[ ] 현재 삶의 현실 속에 사람들은 풍부한 감각적 경험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감각을 사용하여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지적 통찰을 얻기 위하여 감각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감각작용 속에 지적 관심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감각작용을 표면적 흥분에만 머무르도록 만드는 삶의 조건에 놓여 있으며 그러한 삶의 조건에 굴복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사회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신체는 사용하지 않고 정신만을 사용하는 사람이며, 신체와 노동력을 사용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하도록 하는 사람이다. 55

[ ] 장소는 인간이 환경에서 무엇인가를 겪고, 욕망 충족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하는 곳, 즉 삶이 영위되는 범위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시간 또는 일부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끝없는 흐름도 아니며, 순간의 연속도 아니다. 산다는 것은 충족시키려고 하는 욕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도 하며, 욕망 충족의 어려움과 불확실성이 실제로 존재하고, 욕망 충족에 한 걸음 더 접근하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 주기적 변화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은 바로 이러한 주기적 변화를 조절하여 어느 정도 조화로운 완결과 성취에 이르게 하는 매개체이다. 59

[ ] 순수한 것과 유용한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대립된 것으로 보는 것은 산업이 발달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물건을 만드는 일은 자신이 직접 향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노동의 결과를 가지고 유용한 목적을 위해 피상적으로 향유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예술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환경 속에서 행하는 활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예술작품의 근원을 일상적 삶의 과정과 연결 짓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그 자체가 실제로 사는 삶이 그다지 바람직하거나 행복하지 못하며, 심지어 비극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68

[ ] 그는 철학을 공부하면서 점차 추상적 사고를 경시하고 감각적인 것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결국에 가서는 지식을 획득하는 데 추상적 사고의 역할이 아주 적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감각적 방법은 ˝그의 사상체계에 따르면, 사물을 지각하려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며, 사물을 지각할 때 반드시 발생하는 것이다...그는 점차 영혼이 단지 육체 안에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며, 동시에 인간과는 관계없는 세계 또는 나무와 풀이 있고 인간이 이러저러한 것으로 감각하는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초월적 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직접 감각하는 것을 무시하고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높은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직접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무엇인가 결핍된 것으로 보게 만들거나 격이 낮은 것으로 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77

[ ] 물론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은 사실과 이유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을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추구가 우리에게 밝은 빛인 진리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개념에서 보면 인간은 이러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살며, 이러한 조건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삶의 조건 속에 놓여 있는 ‘인간으로서‘ 키츠는 바로 강렬한 심미적 인식의 순간에 고단한 삶에서 최고의 위안을 얻게 되며, 가장 깊은 확신에 찬 앎을 획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85

[ ] 화가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작품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사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완성될 작품 전체의 질성에 비추어 순간순간 행하는 활동의 의미에 대해 사고해야 하는 만큼 과학자 못지않게 치밀하게 사고해야 한다. 여러 화가들의 작품 사이에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은 색에 대한 감수성과 기술이나 기법의 차이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관계를 지각하는 사고력의 차이에 기인한다. 그림의 질적 차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관계를 지각하는 데 영향을 주는 지력의 차이에 달려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지력은 직접적인 감수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넓게 보면, 기법과도 관련되어 있다. 107

[ ] 영어에는 ‘예술적artistic‘이라는 말과 ‘심미적 esthetic‘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를 동시에 표현하는 단어가 없다. ˝예술적‘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활동과 관계된 것이라면, ‘심미적‘이라는 단어는 느끼고 감상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두 가지 활동‘을 한꺼번에 묶어서 동시에 표현하는 ‘하나의 낱말‘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예술적인 것과 심미적인 것을 동시에 표현하는 말이 없기 때문에, 때로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활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즉, 예술적인 것은 심미적인 것에다 무엇인가를 더하여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행위로만 생각되며, 심미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만들고 생산하는 예술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즐기고 감상하는 행위로만 간주된다. 108

[ ] 세계와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예술은 경험된 사물들이 지닌 표현력을 감추고 차단하는 장막을 벗겨 내는 일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은 판에 박힌 삶의 나태함에 빠져 있는 우리를 일깨워 준다. 또한 에술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변화하는 질적 특성과 형태를 가진 세계를 경험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며, 그러한 대상과 하나가 되게 한다. 예술은 대상 속에 숨겨져 있는 표현가능성들을 찾아내며 이것들을 새로운 삶의 경험 속에 적절히 드러내고 표현한다. 221

[ ] 예술의 대상은 표현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는 항상 무엇인가 명확하고 구체적인 것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모든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할 수 있다. 사실 예술작품은 다른 사람의 경험 속에서 작용할 때, 즉 의사소통할 때에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작품이 된다. 만일 예술가가 도덕적 교훈이든 세계에 대한 이해든지 간에 특별한 내용을 전달하려는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작품의 표현력은 그만큼 제한된다. 예술가가 새로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청중의 즉각적인 반응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예술가는 오로지 표현하고 말해야 할 것을 표현하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 문제는 청중의 문제이다. 눈은 있으나 볼 수 없으며,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청중의 책임이다.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것과 대중성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222

[ ] 마티스는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구체적인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깨끗한 캔버스가 있다. 내가 하얀 캔버스 위에 붓질을 통해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을 차례차례 칠해 나가면, 캔버스 위에 그림이 그려진다. 좀더 상세하게 말하면, 나는 내 앞에 있는 옷장을 본다. 그 옷장은 내개 선명한 빨간색의 느낌을 일깨워 준다. 나는 옷장에서 받은 느낌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빨간색을 캔버스 위에 칠한다. 캔버스의 흰색과 지금 막 칠해진 빨간색 사이네는 이제 일정한 관게가 만들어진다. 그 위에 마루를 묘사하기 위해 파란색과 노란색을 칠하면, 파란색과 노란색과 캔버스 사이에도 관게들이 형성된다. 그런데 캔버스 위에 칠해진 서로 다른 색채들은 각각의 고유한 색감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사용한 여러 색깔들은 하나의 그림 안에서 다른 색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여 하나의 조화로운 그림을 만들려고 하면 아무렇게나 색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려고 생각하는 질서정연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그려 나가야 한다. 다음의 색을 칠하는 것은 이미 그려져 잇는 색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려져 있는 색들 사이의 관계를 보다 발전시키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첫 번째 칠한 색에서부터 시작하여 색들을 차례차례 칠해 나가면서 새롭게 형성된 색들의 ‘결합‘을 통해, 마침내 내가 의도한 그림이 완전한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281

[ ] 리듬과 균형을 서로 분리시키고, 예술을 시간예술과 공간예술로 구분하는 예술에 대한 그릇된 생각은 원래 예술을 보는 관점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생각은 심미적 경험을 이해하는 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과거에는 과학이 시간과 공간의 분리를 지지했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적 탐구결과에 의하면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미립자의 세계를 다루는 물리학자들은 대상들이 분리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시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과학자들은 지금에 와서 뒤늦게 발견했지만, 예술가들은 시간과 공간이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일종의 지식으로 드러내어 말하지믄 못하였지만 실제 창작행위에서는 처음부터 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술가들은 항상 개념적 재료가 아니라 지각된 재료를 사용했으며, 지각된 재료에는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이 항상 통합되어 있다. 최근의 과학적 발견에 의하면, 관찰행위 자체가 관찰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관찰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개념적 추상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순수한 개념적 추상화가 성립하려면 관찰하는 행위가 없어야 하며, 관찰하는 행위가 없으면 그 추상화가 타당한지 검증할 도리가 없다. 362

2권


[ ] 하나의 경험을 이해하지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가정을 버리고 ‘하나의 경험‘ 또는 ‘심미적 경험‘이 가진 다음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경험 속에서 예술작품은 모든 일상적 경험에 들어 있는 불분명한 전체에 대한 감을 심화시키며, 아주 뚜렷하게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전체를 포착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확대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깊고 넓은 삶의 전체 지평을 보지 못할 때 사람들은 맥베스처럼 단지 어떤 대상을 얻는 데 자신의 삶 전부를 걸고 내기 하며, 그것을 얻는 데 실패하면 인생은 바보들의 이야기라느니, 소음과 소란으로 가득차 있다느니, 인생은 아무 의미 없다느니 하는 푸념 섞인 말을 늘어놓게 되는 법이다. 멕베스와 달리 자기중심적 사고를 넘어서는 실재와 가치의 척도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너머에 있는 무한히 넓은 세계의 시민이 되며, 우리의 내면에 그러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강렬하게 인식할 때 우리 자신과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놀라운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자아가 무한히 넓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삶이 역사적, 공간적으로 우리를 넘어선 더 큰 삶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2권 26

[ ] 심리학이나 철학에서 전문적 용어로 사용되는 ‘마음‘이라는 말은 심하게 왜곡된 상태에 있다. 오히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마음‘이라는 말이 과학적이며 철학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담고 있다. 즉,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마음에 대한 생각이 전통철학이나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마음의 개념보다 실제로 작용하는 마음의 모습을 더 잘 기술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사용될 때 마음은 사물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때의 관심은 특정한 양태의 관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지적, 정서적인 다양한 양태의 관심 모두를 가르키는 것이다. 마음은 사람(의 신체)이나 사물과 분리되고 독립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황, 사건, 대상, 사람(의 신체) 등과 관련하여 실제로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141

[ ] 마음은 일차적으로 기억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러저라한 사실들을 기억하고 기억해내는 것은 마음이며,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은 또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마음은 접촉하는 사물이나 사태를 주시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한 문제나 어려운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 또한 마음은 목적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일에 마음을 두며, 그러한 것을 달성하거나 획득하기 위하여 마음을 쓴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은 순전히 지적인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자기의 아이에게 마음을 둔다. 이런 점에서 마음은 돌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돌본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지 주의를 기울이고 탐구하는 적극적 의미에서 돌보는 것은 물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과 같은 소극적 의미에서 돌보는 것 모두를 뜻한다. 141

[ ] ‘직관‘은 의식이 수반된 재조절의 과정에서 옛것과 새것이 만나 계시의 불꽃처럼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며, 이성적으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조화로운 그리고 바람직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을 가르킨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경우에 따라서는 잠복기를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준비된 것일 수도 있다. 종종 옛것과 새것의 통합, 전경과 배경의 통합은 그냥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끈질긴 노력의 결과이며, 오랜 기간 동안 고민한 결과로 성취된다. 그런데 체계화된 의미, 즉 마음이라는 배경이 있을 때만 새로운 상황을 불분명한 것에서 분명하고 명확한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마치 대립되는 양극이 서로 접촉하면서 스파크가 일어날 때처럼 옛것과 새것이 함께 맞붙을 때 직관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직관은 이성적 진리를 갑작 포착하는 것과 같은 순수한 지적 행위가 아니며, 또한 크로체가 말하듯이 정신에 의해서 이미지나 사태를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146

[ ] 관심은 재료를 선택하고 결합시키는 역동적 힘을 가리킨다. 획일성이 기계에 의한 생산품의 특징이라면 개별성은 관심을 가진 마음의 산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기계적 기술이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관심을 대신할 수는 없다. 관심이 없는 ‘영감‘은 그저 덧없이 지나가는 열정에 지나지 않으며,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는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 146

[ ] ‘상상력‘은 ‘아름다움‘과 함께 예술에 대한 저술의 중요한 주제라는 과분한 칭송을 받아왔다. 과연 이 칭송이 타당한 근거가 있는지 불분명하며, 사실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상상력은 신비한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공헌에 해당되는 다른 어떤 측면보다도 특별한 재능으로 취급되었다. 그렇지만 만일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 비추어 그 성격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관찰하고 제작하는 모든 과정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그 과정을 활기 있게 하는 특성을 가르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상상력은 사물이나 사건들이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만들 수 있도록 사물이나 사건들을 보고 느끼는 방법이다. 상상력은 마음이 세계와 만나는 바로 그곳에서 거기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다 크고 풍부하게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전에 잘 아는 사물이나 사건이 경험 속에서 새로운 것으로 변화될 때 상상력으로 작용한다. 새로운 것이 창조될 때는 언제나 낯설고 이상한 것이 세계, 즉 자연 속에 존재한다. 마음과 세계가 만나는 곳에 항상 모험이 존재하며, 이 모험이 바로 상상력이다. 148

[ ] 기껏해야 환상은 상상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을 쉽게 동일시하는 문학에서나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환상이 진정한 예술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알려면 그림을 생각해 보면 된다. (건축은 말할 것도 없다). 진정한 상상력은 ‘가능성‘을 특징으로 한다. 진정한 예술작품에는 지금까지 그 어떤 곳에서도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이 들어 있다.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상상력이 작용했다는 최상의 증거이며 척도이다. 149

[ ] 내적 비전은 시종일관 외적 비전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기관으로 남아 있다. 내적 비전이 외적 비전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기관으로 남아 있다. 내적 비전이 외적 비전으로 충분히 해석되고 흡수될 때 내적 비전은 구조를 띠게 된다. 그러므로 내적 비전과 외적 비전이 긴밀한 관련을 갖고 상호작용하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상상력이 일정한 형태를 갖추게 될 때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이 점은 철학자나 사상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는 그의 생각이나 이상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만일 그가 내면에서 생각한 것들이 구체적 형태를 갖춘 것이 되려면 외적 대상 속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그는 외적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주기는 하지만 자신의 내적 비전을 구체화하는 것으로서 대상에 있다. 이런 자세를 유지할 때 대상은 예술가의 사고의 맥락 속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 예술가의 사고는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되며, 대상 속에 참여 한다. 150

[ ] 새로운 이미지나 창조적인 생각은 실제적이고 긴급한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때 섬광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어떠 목적이나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때 그러한 섬광은 빛을 발하며, 창조적 사고는 불붙게 된다. 162

[ ] 우리는 오늘날 어떤 특정한 형태의 만족에 익숙해져 있으며, 우리에게 특징적 태도와 욕망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과 목적은 우리 사회에 사는 사람의 본성과 같은 것이어서 모든 예술작품에 반영되며, 모든 예술작품이 충족시켜야 할 기본적 요구사항이 된다. 우리는 ‘자연‘과 환희에 찬 상호교류를 통하여 보다 더 생동감 있는 경험을 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비잔틴 예술과 일부 동양에술들은 자연에서 환희를 얻거나 생동감을 추구하지 않는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들은 ˝외부에 있는 자연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느낌을 표현한다.˝ 이러한 태도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잔티의 모자이크와는 다르게 예술적 대상의 성격을 규정짓게 된다. 그러한 예술과 서구사회의 특징을 이루는 예술과의 차이는 추상에 대한 관심의 차이라는 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 차이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와 불일치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한 생각을 요약해서 흄은 ˝예술이란 그 자체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며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의 전체적인 적응과정의 한 요소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251


볕뉘

0. 1992년에 출간된 허수경시집은 마음을 나눈다. 몸에 마음이 차고 흘러넘치거나, 몸에 마음이 깃들거나 마음이 녹아내리는 봄날을 이야기한다. 1992년이라 황인숙이나 성윤석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개인을 노래한 드문 시인이라고 여겼는데 이리 놓치고 말았다. 아픔이나 슬픔이 깃든 기쁨, 애처로움이나 아련함으로 약하디 약한 희망을 건네는 것은 그 때나, 그 이후의 허시인에게서 일관된다. 그녀의 독특한 색깔인게다.

1. 스크랩해놓은 사진들을 타이핑하다가 ‘마음‘에 걸렸다. ‘관심‘에 걸렸다. 예술적이란 말과 심미적이란 말의 사잇말이 없는 현실은 지금 이사회를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갈기갈기 나누고 찢어놓은 것과 우리 마음에 맞는 말을 찾을 수 없다. 똑 바로 사유할 수 없다. 여성의 말이 다시 발명되어야 하듯이, 권력과 남성의 말을 빌려서 겨우겨우 말못하는 여성의 말을 찾기가 드물다. 사유의 팔할은 변명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필요로 할 것이다. 아마 ‘마음‘이란 말을 자주 써야 할 듯 싶다. 이분법과 이원론의 가교가 아니라 본디 제 말이었으므로 우리의 몸말과 마음말들을 찾아내고 나누어야 한다.

2. 직관이라는 말도 놀랍도록 유사하다. 내적인 방향과 외적 방향의 결합에 대해서도, 학문의 경계에 대해서도 날렵한 생각들이 겹치면서 좋다. 상상력이라는 것도 어디서 불쑥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사이사이에 녹아있는 것이라고 불쑥 떼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전체를 보려는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 행위들 속에서만 섬광처럼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시간을 공간으로 갈기갈기 조각내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맛보려는 안달로부터 시작한다고 말이다.

3. 그래 당신의 마음은 어디 어디에 가 있느냐고 말이다. 그제서야 살아지는 사람인지 살아가는 사람인지, 자기에게만 빠져있는 사람인지, 삶의 색깔을 내려고 하는 사람인지 겨우 알 수 있으리라.

4. 얼마나 새로울 수 있을 것인가. 발명을 현실을 얼마나 바꾸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래 손가락질 당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아닌 것이다. 의아하지 않으면 새롭지 않은 것이다. 어이없는 구태가 아니라 우리는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날 것을 서슬퍼렇게 나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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