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탄생철학의 고된 탄생에 대하여
미래에 놓인 것으로서의 죽음은 죽어야 할 운명인 자들의 시간을 향해 열린 존재를 근본적으로 동요시킨다. 이러한 죽음과 달리, 탄생은 탄생한 자들이 모두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혼란스런 자유 이전의 과거에 속한 것이다. 17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미리 달려감”과 쌍을 이루는, 이전에 결정된 “탄생으로 되돌아감”때문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탄생은 반드시 개별자의 죽음과는 달리 처음부터 타자와 결부되어 타자에 종속되는 “사회적 생겨남”(한스자너)을 가리킨다. 18
철학은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탄생보다 죽음에 대해 더 많이 논의하였다. 탄생이 아니라 죽음이 철학의 “뮤즈”가 되었던 것이다. “탄생에 대한 망각”(한스 자너)과 “탄생에 대한 맹목성”(페터 슬로터다이크)은 무의 망각과 “죽음의 심취”에 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탄생에 대한 철학의 결핍을 강조한다. 19
2. 철학적 조산술에 대하여
스승은 오히려 인식을 낳을 수 있는 자들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나게 할 뿐이다./단지 자신이 의도했던 깨달음을 제자 스스로 낳을 수 있을 때까지 현명하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참을성 있게 제자에게 질문해야만 한다. 철학적 조산사가 이렇게 함으로써 노예는 인식하는 자로서 자율적이게 된다. 32
3. 한나 아렌트의 출생성 철학
하이데거의 해석은 죽음의 철학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이 사실적인 현존재를 대부분 등한시했다. 사실상 “끝을 향한 존재”가 하이데거 해석의 중심이다./한나 아렌트의 탄생 철학은 궁극적으로 하이데거의 죽음학과 대립되며,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가는 존재”에 대한 선호는 “탄생하는 존재”(한스 자너)와 대립되며, 죽어야할 운명은 “출생성”과 대립되며,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내던져짐”의 철학은 탄생에서 유래하는 시작함과 대립된다./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시작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능력이 ㅂㅏ로 그녀의 “탄생성”의 핵심 개념이다. 43
이 새로운 철학은 하이데거처럼 존재와 무의 긴장으로부터 현존재를 규정하지만, 현존재의 배열에서는 완전히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48
“가장 최상의 삶은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제3자의 근원은 둘이 그렇게 하나가 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여기서 복수성이 비로소 시작한다. ‘개체화의 원리‘라는 의미에서의 실존이 여기서 발생한다.” 59/ “사람들과 함께 시작은 세계로 왔다. 여기에 인간의 자발성의 성스러움에 근거한다.” 60 “만약 인간의 창조가 우주 속에서 시작의 창조와 동시에 발생한다면, 자신들이 새로운 시작인 개별적 인간들의 탄생은 인간들의 근원적 성격을 증명한다. 이 근원은 결코 더 이상 과거의 일이 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작들을 기억하는 지속성이 세대의 연속에 있다는 사실은 결코 끝나지 않는 역사를 보증한다. 왜냐하면 탄생은 그 존재가 시작인 피조물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64, 65
죽음은 단지 이 세상의 사건으로서... 한 번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단 한 번이고 단 한 번의 새로운 것이 단지 단 한 번 발생할 뿐이다. 이에 반하여 한나 아렌트는 출생성을 구원과 결부된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인간으로서의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이라고 이해한다. 단지 한 아이가 탄생한 것이 아니다. – 우리 모두가 아이이듯이 우리에게 모든 아이가 탄생한 것이다. 69 :.
하이데거와 플라톤이 “모든 것을 간직하면서” “더욱더 고향을 추구하는” 입장으로 결코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철저하게 보수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아렌트는 신과 같은 형상이라는 이념에 대해서도 ㅇl렇게 말한다.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라면” 인간은 “신에 상응하는 시작하는 능력을 타고나게 된다.” 이는 하나의 상호 관계로서, 신과 같은 형상은 시작하는 능력을 함의한다. 71
“시작이 있기 위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면, 그 인간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최초이며 이미 주어져 있는 “원칙적으로” 창조된 세계에서는 새롭고 유일한 “누군가”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누군가는 강조된 의미에서 “시작”이라는 술어를 획득한다. 76
“인간의 조건” 안에서, 즉 행위의 조건은 탄생성이고 사유의 조건은 죽어야 할 운명이다. 삶과 관련된 사유는 죽음에 비해 삶을 우선시하는 조건들을 미리 확정한다.” 뜻밖에 그녀는 다시 경건해진다. “ 이 세계에서 불멸성을 소망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모독이다. 이 소망이 죽음을 제거하기 때문이 아니라 탄생을 부정하기 때문이다./”인간들 사이의 인간으로서의 인간”이라는 복수적 현존재는 죽음이 아니라 탄생에 기초한다. “하이데거는 틀렸다. 인간은 ‘세계로‘ ‘내던져지지‘않았다. 만약 우리가 ㄴㅐ던져진 존재라면 – 동물과 다르지 않게 – 이 지구에 ㄴㅐ던져진 것이다. 인간은 세계로 바로 ㅇㅣ끌어진 것이지 내던져진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바로 인간의 연속성이 성립되며 인간의 귀속성이 개시된다. 우리가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라면 슬픈 일이다!” 86, 87
“이해하는 것은 행위의 다른 면이다” 이 행위의 한편으로 제시된 의사소통적 행위인 “말하기”와 마찬가지로 이해는 말하자면 화용론의 쌍둥이이다./”이해”는 정확히 행위와 탄생의 시작성에 부합한다. “시작을 본질로 하는 ㅍㅣ조물은 주어진 범주없이 ㅇㅣ해하기 위해서..그 자체에 충분한 근원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88
4. 시작된 시작에 대하여
슬로터다이크는 “세상에 오는 것”에 대한 분석에서 탄생과, 세상에 와서 자신에게로 오는 것 사이를 구분한다. 하이데거의 선입견과 상관없이 인간이란 차라리 탄생한 “강림한 동물”이지만, 실제로 자신 스스로 이 세상에서 무언가 시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 번은 이 세상으로 스스로 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105
그는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한다./인간이 성숙해지는 날은 결국 주체가 삶의 노고와 위험에 대한 충분한 통찰을 가지고 죽음의 확실성을 파악하며서, 이러한 삶을 이어가게 하는 생식에 대한 위임을 자신의 부모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을 결심하는 날일 것이다. 107
나는 주어진 것이다. 108
5. 탄생의 강제에 대하여
“강제”가 문자적으로 함축하는 의미 말고도, 부과된 존재, 규정된 존재, 운명적인 존재라는 강한 은유로 탄생의 숙명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111
이러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 탄생을 죽음과 구분 짓는다. 112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영혼들이란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 항상 순환적으로 돌며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첨예화한다. “그래서 탄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이 지니는 어떤 수준에 대한 심판이 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영혼의 완성을 향해 스스로 만드는 인생을 살아간다. 115
탄생 철학의 질문들과 문제들은 시작함을 부정하는 업보설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117
“탄생의” 현존은 현존재의 존재 성격이며, 스스로 “시작을 향한 존재”로서 자기 존재와 관계하는 것이다. 120
사르트르는 내가 갑자기 홀로 어떤 도움도 없이 이 세계에 참여하고 이 세계에 대해 총체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123 스스로 거부하는 내던져짐은 바로 “내던져진 기획”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스스로 기획하는 내던져짐의 총체 개념이 될 수 있는 것이다.125
그들의 미성숙한 자녀가 가능한 한 일찍 성숙할 수 있도록 하고 “세계시민”으로서 지체 없이 자유의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의무인 것이다. 단지 이러한 자유만이 탄생의 강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28
탄생이 활동적 삶의 본질적 차원으로서 생산과 노동보다 우위에 있는 행위를 의미한다면, 그래서 이것을 스스로 시작하는 존재의 행위라는 고유성으로 이해한다면, 생산은 이러한 시작하는 행위를 취소하게 한다...인간공학은 생산자라는 돌연변이가 된 창조자가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가장 지속적으로 구속하는 강제인 것이다. 133
6. 원인이 되는 자의 원칙과 책임의 윤리에 대하여
출산은 불가피하게 책임이라는 구속을 부여한 것이다. 124 부모와 자식 사이에 취소할 수 없는 비대칭적인 책임 관계를 정초한다. 135
지구가 하나의 책임을 지게 하는 유산인 한에서 미래와 연관된 가장 멀리 나아간 윤리의 계명에 따라 지구를 훼손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생겨난다. 81 이상 한스 요나스
7. 삶의 선물과 “세계의 빛”에 대하여
인간은 그 어떤 시작이 아니라면, 죄인으로 탄생한 것이다. 149
왜 탄생한 자들이 희미해진 “세계의 빛”을 바라보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삶의 “선물”을 부담과 구분하기 힘든지, 그 이유를 고통의 교육학도, 그 어떤 죄 혹은 벌에 대한 구성주의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없고 전혀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151
8. 내던져짐의 거부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는 성경의 전통과는 달리 어던 본래의 창조주도, 즉 “무로부터의 창조”도 알지 못한다...창조주와 재판관 사이의 최종 심급의 합치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철저하게 “무엇을 위해서”라는 탄생한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165
“최악의 것은 바로 죽는 것이며 두 번째로 악인 것은 한 번은 죽는 것이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인간들이 그들의 공허함을 탄식한다는 의미에서 죽어야 할 운명인 ㅈㅏ들로 간주되는 것이라면 그들의 죽어야 할 운명을 구제할 수 있는 자는 바로 탄생한 자들이다. 171
우리 모두는 자기 스스로에게 머무르는 무능력을 물려받았다. 이 무능력 때문에 창조자는 유감스러운 입증 방법을 제공했다. 그것이 바로 생식이다....생성이라는 죄를 짓게 하는 요청, 즉 ‘성장하고 증식하라‘는 것은...이러한 요청은 나쁜 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신의 거침없는 나르시시즘이 그의 피조물을 부추겨 가장 효과가 큰 모든 모방 행위를 하도록 했다. 174
9. 금욕에 대하여
오늘날 출산 통제가 쉽게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여전히 “희생‘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가? 완전한 포기나 완전한 고된 금욕 없이도 탄생하지 않은 자의 파라다이스로 가는 편안한 치유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닌가? 178
10. 마치 선물과 같은 것에 대하여
그 반대의 반응은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근본적인 원한 감정의 의혹에 있다. 탄생한 자로서 탄생을, 살아가는 자로서 인생을 한탄하며 사는 자들은 아마 틀림없이 삶을 미워하고, 창조자를 미워하고, 부모를 미워한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삶에 무력해지고 생기를 잃어 분명히 삶에 감사할 줄 모를 것이라고 추측된다. 180
(탄생이) 강제라는 타당한 근거로서 아이의 미성숙성은 들이닥친 선물과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다....제1의 탄생은 강제적으로 시작된 삶으로서 미성숙하지만, 제2 의 탄생은 칸트적 의미로 성숙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자발적 능력, 아렌트적 입장에서는 스스로 시작하는 행위의 능력을 지니는 성숙한 인간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이닥친 선물) 189
모든 고전적이고 지엽적인 윤리에 맞서서, ...자신의 동의 없이 탄생한 (모든) 존재는 자신이 실존한다는 사실과 화해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삶이 선물인 것처럼, 이 세상이 빛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122
볕뉘
0. 선불교의 철학을 읽은 뒤였다. 궁금하여 몇권을 더 추천받아 읽고 싶었다. 같은 출판사의 이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는 관계자의 말에 따라, 연관읽기로 제목이 무척 끌렸다. 아래는 읽는 도중 몇 꼭지 생각꼬리다.
1. 한나 아렌트의 말이란 책에서 인터뷰 여러 꼭지에서 흥분되기도 하고, 사유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다. 아렌트의 박사논문, 하이데거와 다른 사유를 잉태하였다는 점, 그 전개가 놀랍다. 혁명에 대한 사유도 거침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에게는 ‘공화‘의 지평을 멋지게 확장한 이로 마음 속에 다시 박혀있다. 몇 번의 다시읽기가 전제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척 흥미로운 책이었다.
덧말 1. 죽음은 본질적으로 나만 생각하게 한다. 이상하게도 개인에 사로잡히게 하는 장치인 듯하다. 단 한 번인, 단을 붙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삶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탄생으로 사유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우리 삶들을 적절하게 나타낼 수 있다. 말을 하고 ㄴㅏ누는 존재, 복수성을 전제로 하는 우리의 삶을 잘 어루만지게 한다는 점에서 더 낫다
덧말 2. 우리는 세계에 이끌어진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성의 핵심이 말을 하는 존재라고 했다. 혼자가 아니라 서로 말을 하는 복수성이 아렌트의 핵심이자 공화(주의)의 열쇳말이다. 실존주의는 삶과 존재를 어렵게 설명한다. 다시말하면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내던져지거나, 기투(던져야)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현존재와 나를 고정시켜 세계를 분리시킨 뒤에서나 행위를 하게 만든다. 쓸데없는 논리를 만든 것이다. 이끌어진 존재-손잡아야하는 존재-말해야하는 존재-서로 시작해야하는 존재라는 표현이 삶과 세계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쓸데없는 논리로) 서로를 분리시켜 따로따로 설명해내지도 않으면서, 전체를 감싸안으면서 나아가는 방향을 적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