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이란 원석을 캐려는 자(들의 두서없는 자취)들


죽기 전을 생각하기도 벅찬데 죽은 이후까지 사유할 여력이 있는가? 1)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죽음과 체념을 곁에 두고 따져보아야 겨우 돋을 새김이 되는 삶. 삶을 오롯이 생각해본 자. 삶들을 사유하는 자. 지층 속에 묻혀있는 삶들이라는 광맥을 다시 찾기위해 스스로 카나리아처럼 폐허같은 광산으로 뛰어들던 자. 삶들이라는 광맥에서 좋은 삶이란 원석을 찾은 자. 하지만 자신의 삶은 그저 비참에 멈춘 자들.

좋은 삶들을 비껴가는 교묘한 기술 1000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헤아려 버려보는 것이 조금 더 좋은 삶에 가까이 가는 게으르지 않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하나와 둘을 헤아린다. 나눈다. 너와나, 선과악, 정치와경제, 사회와문화, 예술과기술,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 이렇게 따로와 따로를 나누고 따로를 각자 따로 놀게 하는 것이다. 다음은 살림살이를 발라내는 것이다. 거기에 미학도 정치도 정의와 형평도 달라붙지 못하게 기름을 듬뿍 바르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것을 사람2)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여 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다. 맛과 멋이라는 것도 발라내서 될수록 건조무미하게 냉혈하자. 너에게서 ‘나‘를 떼어내어 나란 개인이란 원자로만 세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래서 또 ‘이성‘만으로 감정도 감성도 정서도 정념도 아예없는 것이라고 치자. 세상은 온통 회색이라고 단정해보는 것이다. 사물은 그대로 멈춰 버린 것이라고 해보는 것이다. 죽음의 강건너에 신이있고, 삶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를 담보로 하는 것일뿐이라고 하자. 정치는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고, 과학은 철학을 필요조차 하지 않으며, 윤리는 정치를 품에 안기를 거부하자. 경제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제멋대로 가게 하자. 삶이라는 것에는 진도 선도 미도 아예 관계조차 없는 것으로 치자. 그리고 따로따로 널어놓고 어느 것이 중한 지 신경쓰지 말자.

맞다. 그 광부들은 역사란 삶들의 지층에서 이렇게 살아지는만 하는 삶들을 캐내어 광미로 버렸다. 지구 저 반대편으로 지축을 가로지르며 좋은 삶을 캐던 막장은 닫혀 있고, 또 다른 갱구로 이어지고, 또 다른 갱구는 지표면으로 돌출되려고 하거나, 다시 파는 이들로 이 지구 별 안은 뜨끈하다. 그 가운데 한 사유의 광부를 골라본다. 정신과 육체를 나누지 않은 자, 감성과 이성을 나누지 않은 자, 신과 인간을 나누지 않은 자인 그는 규폐증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며 그 책의 결을 벼리고 벼렸다. 사후에 겨우 출간된 그의 책에는 이런 문구가 남겨져 있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

1) 공자 논어 2) 비코

느낌말: 전체성이나총체성,통째로사유하기,예술로서의삶,서사로서나,사회적자아,달의이면보기,삶의반복,이분법에서벗어나기,진리는계절을탄다,반지성주의,고독은삶의최소근력,세계-내-존재,자아-내-타자,관계-내-존재

볕뉘.

0. 뫼비우스의 띠에는 안과밖이 없다. 안과밖으로 사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던 셈이다. 사물은 정지해있을까 운동하고 있을까? 뉴튼의 고전역학이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정지가 극히 작은 부분이었고, 뉴튼이 또한 극히 작은 부분이었다. 시공간은 공간과 시간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나눠서 생각하는 순간 시공간을 이해할 수 없다.

1. 증상으로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외로움과 고독을 양산한다. 하지만 실존으로서 최소한의 고독을 채우지 못한 자는 삶의 근력을 확보할 수 없다. 하나의 명사로 모든 학문은 제대로 사유할 수 없다. 그래서 명사에 명사를 이어서 사유한다. 그것조차 되지 않아 감정과 정서를 불려들여 새롭게 사유한다. 어쩌면 경계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통째로 무너뜨려야 새로운 사유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따라가본다. 물 위에 난 길들로, 바람에 사라지는 길들로 접어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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