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말들 : 안과밖, 구심성과 원심성, 욕구-욕망과 사랑, 기쁨-슬픔-욕망, 보이지 않는 것(숨은 것)을 다루는 이야기와 노출시키고 보여주는 이야기, 침묵할 수 있는 능력과 말할 수 있는 능력, 네트워크-접속(연결)과 관계, 굳건함과 관대함, 능동과 수동, 자유와 예속

1. ‘현대의 우울‘을 말한 바우만은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염두에 둔다. 유행이나 패션, 화장 등등 자본주의가 발빠른 외양을 띠게 되는 19세기 중반, 몸을 극한까지 밀어부쳐, 시대를 안은 그는 우울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고독을 쓸 수 있는 자였다. 그리고 그 자양분을 오로지 예술로 완성하고자 하였다.(보들레르 파리의 우울에서) 세기반이 지난 지금, 파리의 모습은 여전히 재림하여 날카로운 쾌락과 고통을 변주중이다. 살림살이는 여전히 반복되며, 닫힌 시스템은 삶과 사람들의 일상을 위태롭게 복제해낸다. 우리는 외줄을 타고 간다. 두 번 살 수 없어 이리 가야한다.

2. B 가 말한 타인이 없다를 느끼는 ‘외로움‘과 혼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고독‘. 서로 다른 곳을 손짓하는 손끝. 소비만 있고 사유는 찾아보기 힘든 곳. 살아지기만 할 뿐 살아가기는 어려운 곳. 그 곳에서 외로움은 끊임없이 무엇을 끌어당겨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구심성이다. 욕망과 닮아있다. 반면고독은 제법 멀리가고자 한다. 사랑과 닮아간다. 사랑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사랑하는 ‘나‘는 조금씩 세상에 옮겨 심어진다. 욕망은 끊임없이 소비를 원한다면 사랑은 소유를 원한다. 욕망의 충족은 대상의 소멸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랑은 대상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커지고, 오래 지속될수록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욕망이 자기 파괴적이라면 사랑은 자기 영속적이다.(바우만의 리퀴드러브에서) 외로움이 초조와 불안에 가깝다면, 고독은 굳건함, 그리고 사랑과 섞이는 점이지대는 관대함과 너그러움이라는 정서가 배여있는 것은 아닐까. 외로움이 소비와 짝이라면 고독이나 사랑은 만들어 나아가기와 단짝은 아닐까.

3. S가 말한 ‘고독은 어떤 색깔일까. 갈색이어야만 할까.‘ 연민과 사랑을 슬며시 끼워넣는다면 어쩌면 슬픔에서 기쁨으로가는 중은 아닐까. 기쁨으로 인한 욕망이 슬픔으로 연한 욕망보다 강하고 짜릿하다면, 고독은 연갈색에서 노랑으로 그리고 분홍사이 쯤 어디를 거닐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조용미 기억의 행성에서)

4. 우리는 D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울림을 얻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거나 심지어 그 이야기의 후예자나 후계자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읽은 이야기의 혈류가 그 누군가가 살아온 이야기의 혈류와 만나는 것 같지 않은가, 같이 읽은 책은 우리의 공통 조상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고독의 먼사촌이 사랑의 먼사촌으로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존버거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D가 말한 ‘불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 소극적 능력‘만이 아니라 작은 시간들을 그러모아 손에서 손으로,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은밀하게 전해지는 희망의 불씨같은 것은 아닐까

5. ‘함께 글쓰기‘는 저항행위라고 한다.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순간을 지키기위해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른 것들과 함께 그 순간은 지나가겠지만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이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이 ‘사소한‘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고독의 시간은 이렇게 사랑의 그림자로 다가와 불확실성을 줄여준다는 사실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족. 데카르트는 영혼과 몸을 격리시키고, 학문을 원심분리하여, 분리된 몸과 영혼, 꿈 사이 최종소비의 즙으로 ‘나‘를 가득채우시도다. ‘악마의 맷돌(시장이 아니라 사유)‘ 창시자인 데카르트에게 온전한 사유의 구할을 빼앗겼다. 우리 사유의 구제를 위해 신체로부터 정서, 영혼, 신을 이어붙여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거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시작이다. *벤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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