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환기 – 안목의 김환기편을 보다. 죽음을 예감한 후기작을 못봐 다소 놀랐다. 극찬을 아끼지 않은 유홍준비평가의 글이 참 좋다. 그러다가 다시 김환기의 색감에 마음이 갈 무렵, 매화도 피고, 매화와 항아리, 달.....그랬다. 그러다가 우연히 책방에서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라는 책을 접하고 무척 달떴다. 사진과 글, 그림들. 편집도 곱게 해서 그만 수중에 넣어버렸다. 천재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 일본에서 그의 죽음을 맞이했던 그의 부인인 변동림. 그녀는 지적갈망 못지 않게 나혜석에 버금가는 신여성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시인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나 김환기의 호였던 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몇년 뒤 삶을 함께 꾸린다. 그 가운데 몇몇 엽서들. 안좌도에서 보낸 엽서의 한 귀퉁이 목포 유달산의 모습이 선명하였다. 옛 해수욕장에서 본 모습도 그러했다. 지성과 새로움이 끌고가는 관계들로 묘사하는 그들의 사랑도 담았다.

2. 진은영과 한강 – 숱한 불면의 밤, 새벽들. 망막함 속에 칠흑처럼 어두워지는 하늘은 온통 쇠감옥이자 쇠우리다. 통유리다. 자고 일어나면 더 짙어지는 암울함. 하루하루가 우울이자 멜랑콜리. 부수어도 부수어도 그 자리인 시지프스의 삶일 수밖에 없음. 그(녀)들은 말한다. 목없는자. 숨쉬지 못하는 자, 목이 없어진자. 없어질 자에게 연민을 쏟는다. 한결같이 우리 몸이란, 우리 육체란 항아리는 슬픔, 아픔이 한 방울씩 떨어지면 항아리 안의 마음의 물결은 파문을 일어 몸의 가장자리로 번지는 것이라 말한다. 죽음은 저기 먼 것이 아니라 늘 곁에 지금 현현한 것. 스스로 죽지 않고서는 스스로 필 수 없는 것. 나는 죽음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늘 사라짐과 나타남으로 감지되는 것. 그렇게 죽음을 곁에 두고 삶을 강렬하게 돋을 새김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너가 물리적인 신체로 각별하고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버무려져 있음을 눈치채는 것. 스스로 엄중해지는 것. 그런 존재라는 것.

3. 말과 활 – ‘오늘날 대중운동에서 외부란 무엇인가‘란 제목아래 현재 사회운동 시론 3편을 실었고, 21세기 공장의 불빛, 서동진의 글 세편을 넘겨보았다. 사회운동시론에는 기분도 분위기도 정동도 아무 것도 없다시피했다. 강령이 필요하고 광장안밖의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좌파재편이 필요하다란 당위만 이야기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무미건조함이 그 코드인가. 오히려 이주노동자들과 목없는자들의 생생한 ‘ 21세기 공장의 불빛‘이란 꼭지가 대신 답을 말하려는 듯하다. 서동진 그는 마음 감정, 심정성, 정서, 기분, 정동, 분위기, 불안, 강박, 경쟁, 고투, ㅍㅣ로, 탈진, 좌절, 포기, 불만, 원한, 불신, 반감, 피로, 수치심, 모멸, 단속 등의 개념으로 사회를 읽는 것에 불만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그의 이론적 접근의 발단이 정동에서 시작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일종의 과도함이나 과잉, 유행적 비평이 문제있음을 지적하려는게다. 그는 단적으로 말하면, 이런 흐름들이 하이데거의 세계내(안)존재 철학의 과잉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 아류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존재론적 좌파라고 한다. 과도하다. 이것만이 ㅇㅏ니라 체계나 구조에 대해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변증법적 비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편의상) 역사유물론적 좌파라고 칭한다.

4. 요약하자면 서동진교수는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맑스주의자였지만, 지금은 맑스주의는 사라지고 실존논의만 범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동이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끌어안고 역사정치경제의 생생함을 곁들여 변증법적 사유를 하자는 것이다.

볕뉘.

0. 따로 생각해보건데, 우리는 멀리떨어져서 숲의 조망권을 확보해보는 것이 아니라 숲길 하나하나 나무사이사이 활력들과 분위기와 정서, 감정을 곁들여서도 사유를 해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또 한편으로 일과 노동과 경제적 살림살이와 계급의 틀로도 제대로 사유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일천하여 숨통트이는 논의조차 없던 것은 아닐까. 핵심을 명료하게 하여 실전의 느낌이 나는 논쟁들의 불꽃이 일었으면 좋겠다.

1. 진은영은 문학의 아토포스에서 비인칭이라는 ㄱㅐ념을 쓴다. 하이데거의 죽음을 말하면서 발라낸 개인을 말하는데 그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비인칭의 죽음. 정체성은 없다가 새로운 사유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아방가르드, 시도, 실험, 논의의 확장, 논쟁의 계절이 다시 유행처럼 왔으면 싶다. 더 이상 손해볼 것도 없다. 더 나빠지기야 하겠냐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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