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가장 큰 쟁점중의 하나인 교육문제를 사회학적 상상력을 통해 바라보자. 교육은 개인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이며, 나아가 한 국가의 미래를 결정짓는 기반이다. 일반적으로 볼때 교육에 있어서 사적인 문제와 공적인 문제의 구분은 명확해 보인다. 개인의 자질과 노력, 그리고 교육에 대한 투자는 사적인 문제에 해당되며, 공교육의 질과 투자는 공적인 문제, 즉 공공의 문제이다. 그러나 좀더 주의깊게 생각해보면 사적인 문제와 공적인 문제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교육에 있어서 개인과 공공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개인의 문제', 즉 사적인 문제는 한 개인의 성격 내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개인적인 관계 범위내에서 발생한다 (by daydreamer)
* 사회학적 상상력 -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즉 정치적인 것에서 심리적인 것으로, 단일 가족 연구에서 세계 각국 정부 예산에 대한 비교연구로, 신학교에서 군부대로, 또는 유류산업에 대한 고찰에서 현대 시연구로 옮겨가는 능력이다. 그것은 가장 비 개인적인고도 관계가 먼 지역에서 일어난 변환에서 가장 친밀한 인간 주체의 속성까지 아우르는 능력이며, 또한 둘 간의 관계를 볼 줄 아는 능력이다. 이러한 상상력의 발휘 이면에는 그 사회와 시대에 자신만의 특징과 본성으로 살고 있는 개인의 사회적-역사적 의미를 알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
사람들은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사회 안에서 개인의 일생과 역사가 교차되는 조그만 점인 자신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고자 할 때 사회학적 상상력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들이 책에 담겨서 싫기도 했다. 영상이었다면, 한 번 보고 지나쳐버릴 기사였다면 차라리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책상에 꽂혀선 자꾸 다시 살펴보라고 나를 재촉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재촉에 못 이겨 책을 다시 펼치면, 아팠던 맘 한 구석이 다시 아파온다. 왜냐! 난 여전히 이 땅의 소수자들을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하나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머리로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좋기도 하다. 언제든 내 곁에 있으면서 나를 꾸짖을 기회를 주니까. 난 그런 생각을 한다. 갑자기 내 사는 모양이 맘에 들지 않을 때,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머리로만 꿈꾸고 있다는 걸 확인할 때 꼭 이 책을 펼쳐들겠노라고. 그렇게 이 책을 보면서 나를 다듬어가겠노라고.
그러다보면, 이 땅의 소수자들 이야기는, 어느새 엿보기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기, 함께 대안 찾기로 달라질 거라고 믿는다. 이 책은 정말이지 엿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책이다. 내가 소수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그런 마음, 정말 안됐다 하고 눈시울 살짝 적시고 마는 행동, 이 책이 조금씩 바꿔 줄 거라고 믿는다 (by 난칼)
나는 고유한 노동, 즉 생존에 고유한 노동을 배치할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지불되지 않는 활동이지만 생활을 마련하고 개선시켜 가는 것으로 표준적인 경제학의 내부에서 발전된 개념을 사용한 분석으로는 전혀 처리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활동에 '고유한vernacular'라는 말을 사용한다. 나는 '고유한'이라는 말을 상품과 그림자에 대치되는 용어로 부활시킬 것을 제안한다. '고유한 노동'을 통하여 현대적인 생활의 자립과 자존을 확대시켜야 한다. - 본문 중에서
한미FTA의 공공성에 대한 공격은 특히 에너지, 교육, 의료, 문화 등에 집중되어 있다. 금융은 공공성을 운운하기조차 힘든 수준으로 외자 지배하에 넘어가 있고, 투자와 지적재산권은 미국형 FTA가 각별히 공을 들이는 부분이지만 한국에서는 제대로 공론화조차 힘겨운 실정이다.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말조차 한국에서는 낡은 개념이 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결국 국가 주권적 정책공간의 위축과 잠식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 (신)식민주의는 자기 완결적인, 신성불가침의 국경으로 무장한 전통적 민족국가간의 관계에서 나온 개념이다. 오늘날처럼 초국적 자본이 주동하는 글로벌 경제에서 그 양상은 매우 다르게 전개된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수출경제를 사실상 주도하는 초국적 기업과 미국계 초국적 기업은 일종의 ‘이항대립(二項對立)적binary opposition’의 관계에 놓인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 시장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 대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에 동일한 이해를 갖는 그러한 관계말이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 중요한 것이 구조조정이다. 글로벌 경쟁격화는 자본의 수익성을 위협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좀 더 나은 투자처, 좀 더 값싼 생산기지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이들의 본성이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모든 규제장치는 한갓 비관세 장벽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다. 이런 점에 착목해 볼 때, 이 새로운 식민주의는 우리에겐 여전히 낯선, ‘초국적 식민주의’라 부를 만하다. - 본문 242~245쪽에서
1.
<그림자노동>, 이반일리히 - 그가 사망했다는 것을 이책을 접어들고서야 알게 된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 앞의 책만 몇권보았으니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많이 섭섭하다. 이면만 들여다보게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인 것 같다. 감명깊게 읽었던 폴라니의 논리를 확장, 전개시키고 또 한편 단순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 발전이라는 관념에 묻혀 버린 공리를 찾기 위한 그의 노력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입체적이고 단순하다. 지켜내고 확장시켜낼 것도 명쾌한 느낌이다.
좌익-우익으로 단순화된 일차원적 정치모델이 아니라, 3차원 모델을 적용시킨다. X축에 좌익--우익, Y축에 소프트와 하드(큰 기술-작은 기술, 원자력,상품,서비스 등등), 그리고 Z축에 경제인(HAVING) 과 예술-생활인(DOING,BEING)을 둔다.( 소유에서 만족을 구하기에 적합한 사회조직과 행위로부터 만족을 구하기에 적합한 사회조직을 배치함.)
철지난 개인적 잡생각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846663
이 모델로만 하더라도 진보는 좌파지향만이 아니라 기술의 영역으로 인한 사회구조와 직접 삶에 맞닿아있는 행위의 영역까지 지향과 출발이 들어있는 셈이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 개념의 유포와 발전사라는 것이다.
1.1
발전이란 개념은 (야만인<손님>-->이교도--->이단자--->미개인--->원주민--->저개발주민)으로 요약될 수 잇는데, 타인에 대한 태도로 간단히 설명된다한다.
그리스인은 타인이 이웃 폴리스에서 온 초대 손님인가 아니면 인간 이하의 1.야만인인가로 구별하였고, 교회의 영향으로 구제되거나 교화되어야 할 존재로 보았고, 고대후기에는 2.이교도(세례받지 않은자) 취급되었다. 그 뒤 이슬람교가 생겼으나 개종에 저항했고, 3. 이단자로 취급되었다. 콜럼부스가 대서양을 건넌 뒤 이단자라는 이미지 대신에 문명화 기능을 위협하는 4. 미개인이란 이미지가 등장했다. 이런 미개인은 식민주의와 중상주의에 대해 필요한 것이 없는 유럽인에겐 고귀한 존재로 보였고, 수요을 날조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5. 원주민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2차세계대전 까지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원주민의 제한된 수요는 성장과 진보를 저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원주민은 다시 6. 저개발 국민으로 변신되어야 했다.고 한다.
1.2
이런 '경제인'이라고 하는 서구 이미지는 결코 성적으로 중성일 수가 없으며, 경제인=(노동자인-주부인)이라는 한쌍으로 창조되었고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주부인의 그림자노동이 함께 성장하였다. 그러한 성 분할을 토대로 하여 '산업인'이 창조된 것이라한다. 여성의 제도적 해방 역시 역설적으로 지불되지 않는 노동과 지불되는 노동의 대립을 강화시켰으며, 지불되지 않는 노동과 생활의 자립,자존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이런 발전지상주의의 관료제도가 가진 마지막 희망을 그림자 경제를 개발하는데 있다.
1.3
그는 Z축의 정점의 그림자 경제에 소속된 생활보다는 '고유한 노동'을 배치할 것을 제안한다. '고유한 Vernacular'이란 라틴어로 유급교사로부터 배우지 않고 습득한 언어에 대해 사용되고, 가정에서 형성되고 가정에서 창조된 공용에서 유래하는 가치를 나타내는 말로 쓰여졌다한다. 그것은 시장에서 매매되지 않는 인간이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가치로 상품과 그 그림자에 대치되는 용어로 이 말을 부활시킬 것을 제안한다.
1.4
사람을 마비시키고 포만하게 하며 무기력하게 만드는, 저 풍요란 이름의 현대적인 실험모델에 매료되어 온 다수의 사람들에게 대안을 만들 두 조건의 충족을 이야기한다. 첫째, 인간과 도구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서 생긴 생활방식은 '산업인'이 아니라 '예술인'이라고 하는 인간의 인식에 의해 활성화되어야 한다. 둘째. 상품으로부터 독립된 생활방식은 각각의 작은 공동체 속에서 새로이 형성되어야만 하고 강제된 것이어서는 안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