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온보냉 – 이상하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과 통하고 종종 순수한 애들은 이상한 애들과 친했다....하긴 안겨 있는데 하나도 안 따뜻해지는 것도 이상하지. 보온병 말이다. ...나는 보온병만 보면 왕따 생각이 나는걸까? 속은 화끈거리는데 그걸 나눌 누군가가 없다면 틀림없이 따돌림을 받는 거다. 내가 학교 ㄷㅏ닐 땐 병을 깨서 자기 팔뚝을 긋는 애들은 못된 놈들도 안 건드렸다. 말하자면 이상한 놈이 못된 놈들보다 쎘다.

오줌의 색 – 아픈 사람을 빨리 알아보는 건 아픈 사람, 호되게 아파본 사람이다...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위로도 잘한다는 생각...방금 누고 온 오줌과 색이 똑같은 샛노란 링거액들은 대롱대롱 흔들리고 통증과 피로의 색이 저렇듯 누렇겠지 싶은데..

호모 텔레비우스 – 허리는 굽고, 목은 앞으로 쏠린 채/우리는 눈만 피곤하다/눈만 까맣게 남은/새우젓 속의 새우눈처럼

자기공명조영술 – 결과의 자리에 가서 보면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애벌레는 나비가, 씨앗은 나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의심범이 아니라 확신범이 되고 싶다.......담당의가 미간을 좁히며 숨 들이마시세요 청진할 때 두개의 허파가 조영되는 식으로 어두컴컴한 화면 속에서 숨을 잔뜩 들이마신 허파가 나비 표본처럼 고정되어 있다. 나무 같기도 하고 희미한 잎맥 같기도 한 바탕에.

평균적인 삶 – 김부장은 사직을 제안받았다...예측보다 현실이 빠르다고 느낄 때야말로 떠날 때다....순순히 자리를 물리고 빠져나와 회사를 건너다본다. 남의 사람이 된 애인의 고친 화장처럼 짠하고 착잡하기만 하다. 세상은 봄날이고 꽃은 시절을 다투고 날리는 바람의 끝을 짐작할 수는 없으나 거래는 끝났는데 자꾸 뒤돌아보는 사람처럼 삶이란 원래부터 누군가에게 증강현실이었던 것이다.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 십자가가 저렇게 많은데, 우리에게 없는 것은 기도가 아닌가. 입술을 적시는 메마름과 통점에서 아프게 피어나는 탄식들. 일테면 심연에 가라앉아 느끼는 목마름....우리는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아프게 구부러지는 기도처럼, 빛이 휜다. 

부끄러움을 찾아서 2 -생각이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결국은 생각이 없어지는 방식으로,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지지도 못하고 매달린 목련의 부황 자국 같은 얼굴.....죽음은 너무나 당연해서 생략 가능한 문장 같지만 생략된 것을 더듬을 때마다 가슴이 눌린다.

씽크홀 – 퇴근길에 그대로 가라앉아버린 사람들도 있고 이 골목을 소금쟁이처럼 지나간 사람도 있다...이 수수께끼 같은 삶을 무슨 댓가를 지불하며 건너고 있는 건지 가야할 길은 멀고 남은 시간이 없다고 생각될 때의 목마름,

생활이라는 생각 – 꿈이 현실이 되려면 상상은 얼마나 아파야 하는가.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절망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가. 참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생활이라는 생각이다. 그럭저럭 살아지고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우리는 도피 중이고, 유배 중이고, 망명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뭘 해야 한다면.......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국이 필요한 아침처럼 다들...참으로 모자란 것은 생활이다.

에고이스트 –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연인은 없다...하지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으며.....우리를 쓰러뜨린 것은 우리 ㅈㅏ신이 아니었는가. 누구든 다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자. 다만 우리는 조금씩 비껴 서 있고 부분적으로만 연루되어 있으며 시작하기엔 이미 늦었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여행자 – 헤어지는 사람이 실은 더 연애를 갈구하듯 죽으려는 사람이 가장 살고 싶은 사람이다.

심문 – 권고사직을 제안받고 그는 소진된 복서처럼 무엇이든 그러안고 싶었다.....누군가 지금 그에게 가벼운 안부라도 묻는다면 바늘로 된 비를 맞듯 그는 땅에 붙들리게 될 것이다. 화산재를 잔뜩 뒤집어쓴 얼굴로.

덩어리 – 나는 모닥불 앞에 앉은 사람처럼 여전히 더 큰 그림자를 뒤로 멘 채 붉은빛을 얼굴 가득 받고 서 있다...나는 따듯하게 얼어붙어 있다.

코뿔소 – 노안이 왔나보다.....문제는 많은데 답이 하나인지 문제는 하난데 답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질문이 뭐였는지 답이 안 나오는 삶이다. 여전히 우리는 돌아올 만큼만 떠나고 떠나온 만큼만 굽어보지만 불행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안부처럼 여전히 삶은 노골적으로 상스럽지만....피차 빤하고 짠하기만 하는 삶, 미친 여자가 꽃으로 자기를 꾸미는 것이 나에게는 어떤 암시처럼 보인다. 코뿔소는 시력이 나쁘다.

천국의 아이들 2 – 자기가 제일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모인 곳이 지옥일 테지....하긴 아픈 사람만 봐도 같이 아픈 곳이 천국일 테지.

다단계 – 그러므로 물 한잔을 건네는 것은 목말라본 사람들의 덕성이며 삶이란 서로 권하고 축이고 또 이렇게 밥 한끼 얻어먹고 다음을 기약하는 일이지만  떠안기는 것이 천국이든 안전이든 자동차든 무엇을 팔든 실패는 하나의 기술이다. 실패한 사람의 손도 뿌리친다면 하느님은 누구의 손을 붙잡겠는가.

고통의 역사 – 백일홍 백일 동안 핀다고 누가 그랬나. 백일홍은 백일 동안 지는 꽃이다. 꽃은 떨어져내려 천천히 색이 시들고 그 곁에서 매미가 악을 쓰고 우는 백일은 얼마나 긴가. 어혈이 빠지지도 전에 다시 어혈을 입는 백일은 얼마나 더딘가....견디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견딤에 대해....세월은 더 흘릴 눈물도 없는 ㅅㅏ람들을 울려서 눈물을 짜내다. ㅅㅏ람이, 역기를 들어 올리는 사람의 얼굴로 간신히.

무임승차 - 아메바적인...더 단순하게 구조화되는 것이 진화의 내용이다. 그것이 우리의 이번 생이고 우리의 다음번 생이다. 그리고 살아남는다는 것....최선을 ㄷㅏ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해선 안된다. 왜 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에 승복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의심해야 할 것은 미래가 아니다. 의심스러운 것은 기억이다.....우리는 막 생겨나려 한다.


볕뉘. 시집을 다시 손에 들다. 낡은 현수막의 글귀처럼 몇몇 문장만 기억에 박혀 있었다. 그은 밑줄을 다시 다듬어본다. 다듬다보니 밑줄의 가장자리나 저기 불쑥 떨어진 것도 곁들여야 했다. 그러니 밑줄은 제대로 그어진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에 밑줄이 아니라 마음이 긋고싶은 사선을 따라 (2B연필이) 움직인 것이었다. 시끌벅적한 신입생 환영회 자리. 이름을 말하자 그녀는 김현승시인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동기이던 한 친구는 네 이름만 들으면 은은하고 따듯하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이름이 긋고 가는 사선의 흔적을 따라 마음이 자랐다. 이렇게 동명이인을 보면 낯설고 친근하다. 아니 친근하고 낯설다. 그렇지만 뭔가 배회하는 마음의 언저리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마지막 제4부를 남겨두고 있다. 밑줄을 ㄷㅏ듬다가 ㅇㅣ렇게 남겨둔다. 남기고 싶은 중요한 시는 아직 이 흔적에는 없다. 보태고 싶은 마음도 ㅇㅏ직 깊은 구멍이다.남겨두어야 할 것이 아직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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