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다른 공식을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266

                                                                                                                                                                   ‘이론은 늘 회색에 가깝다. 하지만 늘 적색에 가까이 가야 한다.‘

1. 지적인 공간의 지도그리기

좌파는 전략적으로 사고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나와 다른 사람들이 대중적이라고 부르는 것, 즉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자기가 사는 세계를 평가하고 계산하는 논리들과 접속하기 ㅇㅟ한 어떠한 ㅅㅣ도도 하지 않았다. 좌파는 어떤 대화의 개념,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이 자신의 실수를 발견하고 그들의 가정을 변혁하는 그런 ㄷㅐ화의 개념을 저버렸다. 대신 좌파는 단지 마차 속에서 편안하게 앉아, ㅈㅏ신들이 이미 일이 돌아가는 ㅅㅏ정을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에 차서 ㄷㅓ 많은 일을 ㅎㅏ려고 하지 않으면서, 계속 인식론적, 정치적,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계속 엘리트적이고 전위적인 정치학을 실천하고 있었다. 502

희망의 맥락 – 나는 정말로 저기에 도달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단지 한 걸음 내디뎌서 그 한 걸음이 세계를 좀 더 낫게 만들기를 희망한다. 500 나는 우리의 임무는 희망을 ㅈㅐ구성하기 위한 가능성의 조건들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24

상상력을 높이는 방법은 현재를 지우고 정신이 자유롭게 방랑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현재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높이는 것입니다. 현실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 더 ㅈㅗㅎ은 상상을 할 가능성의 조건이다. 상상력은 경험적인 노동과 관련된다. 503

나는 존재론적인 것과 정동적인 것, 국면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보는 것이 핵심이다. 정동을 중간에 두는 것은 칸트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들뢰즈적인 의미에서 “매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지점이다. 511

대중을 다시 생각하기-하나의 실험적인 정치로, 저항에 대한 만큼이나 스타일가 과정에 대한 것이기도 ㅎㅏ다. 단지 정치만이 아니라 살아감의 스타일과 과정이다. 512

오늘날의 매체는 지금 모욕이라는 느낌의 구조 또는 분위기라고 부르는 것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것이 대중적인 것의 절합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521

나는 항상 푸코, 들뢰즈, 가타리의 요소들과 그람시의 요소들을 한데 어우르는 방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527 나는 나의 설득의 힘이 로고스만큼이나 파토스를 통해서 나온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ㅅㅏ람들은 이성과 증거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지만, 열정 없이 그들이 지배할 수 있다거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528

당신은 어떻게 그런 관계들을 사는가 490 - 내가 정동을 만난 것은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말하는 “느낌의 구조”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리처드 호가트가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것”과 ㄱㅏㅌ은 무엇이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 ㄱㅐ념과 현존하는 ㄱㅕㅇ험 이론들이 포착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싶다..노먼 브라운과 공부하면서 프로이트를 읽었고, 이것은 라캉을 통해 배운 것보다 빌레름 ㄹㅏ이히의 해석에 훨씬 더 가깝다. 이후 프래그머티즘, 퍼스, 하이데거를 읽었고 알튀레르의 흐름 – 노골적으로 이성주의자이며, 노골적으로 재현주의적이고 “의미의 영역”이라고 부를 만한 협소한 개념에 묶여 있음을 발견했다. 이후 그람시를 중심으로 그람시 다시 읽기로 연결되었다......정동의 니체적 공간은 들뢰즈적 공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존재론적 공간이고, 정신분석학적 공간은 경험적 고ㅇ간이다.....나는 들뢰즈와 니체에게 실재의 존재론적 성질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늘 부분적 형식의 효과성(정동)dㅔ 있었다.(존재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ㅅㅏ이의 절합들 493) 이 관심은 폴 리쾨르로부터 왔다. 484-490 우리가 ㅅㅏ는 삶의 방식을 구성하고 있는 기계적 장치 혹은 담론 체제는 무엇인가? 491

정서는 정동과 이데올로기의 절합이라는 생각을 ㄱㅏ지고 있다. 저ㅇ서란 어떤 저ㅇ동의 생산물들을 이해하려는 이데올로기적인 시도이다. 496

의미 있다거나 알 만하다고 여겨지는 것과, 그럼에도 살마ㄴ한 것 the livalble 사이의 간극이라는 것이 늘 존재한다는 생각이 모든 사유의 흥미로운 출발점이라 여긴다. 498 이상 로렌스 그로스버그 대담

2.

매개개념의 창조 -여기서 매개라 함은 주체/대상과 ㄱㅏㅌ은 이원성들 사이의 추정적 연결이 아니라 정동적 관계들의 “가운데 공간”을 설명하는 개념이다...주어진 경험의 ㄱㅜ체적인 상태를 ㅍㅛ현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예를들면 약물을 복용한 어떠한 몸이 아니라, 서비스 ㅇㅣ용자와 정신활성약물의 마주침을 명명하는 ㄱㅐ념을 찾고자 한다. 이보다 ㄷㅓ 중요한 ㄱㅓㅅ은 매개 ㄱㅐ념이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사이의 고리, 즉 현실화된 ㅈㅣ각이 변화를 ㅇㅟ해서 ‘다시 ㅈㅏㄱ용하는 ㄱㅓㅅ‘(자기실천)을 허용하는 ㅂㅏㅇ식을 가시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383-384

정신건강에 대한 스메일의 입장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의료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리적인 괴로움은 경제적, 정치적 힘의 합류지점에서 떠오르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다. 393

노동자들을 ㄷㅏㄴ지 기업문화의 우정 시스템으로만 묶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친화성‘이라는 보편적 환경에의 자동적인 참여를 통해 기업 문화로 묶는 프로그램이다. 이 ㄱㅣ업문화는 일반적 문화의 무대이며, 일반적인 사회성과 교류, 소통의 새로운 모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친절하거나 관대하거나, 한마디로 사교적일 필요가 ㅇㅓㅂㅅ다. 우리는 단지 사용자 친화적이기만 하면 되며, 이것은 곧 ㄱㅣ업적이 된다는 것이다. 421

오늘날의 노동자들에게는 핵심적인 정당한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 칼라 직종의 “사회적 윤리”라고 부르는 가치 체계이다...중간 계급의 정신 세계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성취감있는 삶을 산다는 예전 의미는 그 매력을 일부 잃었고, 사무실 문화의 예의와 격시ㄱ은 사람들이 ㅈㅏ기 일에서 찾는 본질적 의미가 부족하다는 것을 가려주지 못한다. 수동적인 공격성과 노골적인 적의는, 이미 창의적인 일터의 승리를 선언한 ㅇㅣㄹ반적인 관리 원칙에 저항하는 경계성 경고이다. 423

상호작용의 춤 – 어머니도 ㅁㅏ찬가지로 ㅇㅏ이의 인정을 갈망하며, 아이가 놀이에서 반응하면 성취감을 얻는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ㅇㅏ이 사이의 관계가 권력의 면에서 차등이 ㅇㅣㅆ음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상대방을 인정하고 결국 자신도 인정받고자 ㅎㅏ는 욕구가 있다....파트너는 서로에게 잘 맞춰 주어서 하나로 움직이며, 정동으로 촉발된 것으로 보이는 상호 인정의 놀이를 ㅎㅏㄴ다. 437 관심이라는 ㅈㅓㅇ동적 뒷받침이 ㅇㅓㅂㅅ으면 뇌 조직이 파괴되는 만큼이나 지적 발달에 손상을 가져올 것이다. 438

감정이 인지적인 측면을 갖고 있고 오래 지속되며, 전 생애를 통해 지속적으로 촉발된다고 인식되는 반면, 정동은 일종의 신체적 현상으로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흔히 여겨진다....정동은 인지를 ㄷㅗㅂ고 ㅎㅐㅇ동을 유발하면서 의식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신체적 ㄱㅣ억으로 축적된다.(올리버섹스 음악이 ㄷㅏ리감각 회복에 ㄱㅣ여) 440

자신이 되는 것은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중적으로 사회적인 과정이다. 449


3.

습관화된 무관심을 퍼지는 기쁨으로 바꾸는 것이 ㄷㅐ안적인 삶의 윤리에 대한 실마리를 열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문제이다. 아마도 그건 것이 정도 이론의 ‘아직 아님‘의 ‘지금으로서의‘약속, 즉 그것의 습관적으로 리듬적인(또는 거의 리듬적인)일일 것이다. 말하자면 발화 공간의 뻗음이, 단지 증대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응결시켜 떨어뜨리는 상서로운 ㄱㅖ기를 발견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34

사호ㅣ이론가는 제도뿐 아니라 사랑.시.정의.단념.증오.욕망의 순간들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상생활(직장인보다도 직장으로 가는 통근자로서의 삶에서, ㄱㅡ리고 통근하는 동안 백일몽을 꾸는 자로서의 삶에서)이라는 신비롭지만 현실적인 영역 안에서 이러한 순간들이 힘 있는 동시에 무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순간들이 인식이 된다면 사회 질서의 완전히 새로운 요구들을 위한 기초를 형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직장에 통근하면서 하는 생각들은 대주ㅇ교통 ㅊㅔ계나 보상 체계에 의해 만족되는 게 아니기 ㄸㅐ문이다. 문제는 아무도 그런 순간들에 ㄷㅐ해 ㅇㅣ야기 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47

볕뉘 1. 르페브르는 일상생활의 혁명이란 책을 썼다. 그 책을 읽을 때는 이런 ㅇㅣ론적인 배경을 생각하지 못했다. 아나키스트의 흐름정도만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 이론이라면 거꾸로 거슬러오라가 그 매듭을 다시 한번 펼쳐보는 것이 좋겠다 싶다. 이런 이론 ㄱㅣ반을 가져온다면 레이먼즈 윌리엄즈를 피ㄹ히 ㅂㅜㄹ러내야한다.

욕망의 ㄷㅐ상을 한 다발의 약속들이란 말로 바꿔 생각하면 우리의 애착들 속에 있는 비일관적이거나 불가사의한 측면들을 우리의 비합리성의 표시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대상 속에 머문다‘라고 느기는 ㄱㅓㅅ에 ㄷㅐ한 설명으로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대상에 근접함이 그 대상이 약속하는 한 ㄷㅏ발의 일들, 그 중 어떤 것은 우리에게 선명히 다가오고 어떤 것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은그 일들에 근접함을 의미한다는 ㅈㅓㅁ에서 말이다.161

잔혹한 낙관주의는 시레로 체험되는 ㅇㅟ급함의 양식을 가리키는 ㄱㅐ념이다. 그것은 ㅇㅙ ㅅㅏ람들이 멜빌의 바틀비가 ㅇㅏ니지, 왜 사람들은 갖가지 ㅂㅣ참한 처지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ㅇㅏㄴㅎ으며 대신 그들에게 익숙한 애착 체계를 영위하면서 이와 함께 삶을 축소하는 쪽을 선택하는지, 달리 말해 딱히 패배하고는 ㅎㅏㄹ 수 어ㅂㅅ는 ㅅㅏㅇ호성이나 화합, 단념의 ㄱㅘㄴ계를 고수하기를 선택하는지 등에 ㄷㅐ한 이유를 생각하면서부터 자라나는 ㄱㅐ념이다. 170

‘신ㄱㅣ루로 경계선을 발라놓았네/빛으로 그리고 빛이 지닌 끝없는 수줍음으로’(투명문양) 172

오웰의 글에서는 에토스가 끔찍한 원수인 것처럼, 그 안에 머물 순 있지만 빠져나올 수는 ㅇㅓㅂㅅ는 감옥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오웰의 주장의 근거이다. 그렇지만 그의 실제 ㅅㅏㄹㅁ과 작업은 다르게 이야기한다. 바로 삶 속에서의 실험을 통한 에토스의 ㅈㅓㄴ환이다. 여기서 ㅈㅓㅇ치는 겨ㅇ험에 의한 교육의 한 ㅎㅕㅇ태이며, 당신의 에토스 ㅇㅏㄴ에 불편하게 자리하고 ㅇㅣㅆ는새로운 감각의 세계에 끊임없이 당신의 감각중추를 굴복시키는 ㄱㅓㅅ이다. 여기에 ㅎㅢ망이 있다. 사회미학은 에토스와 아비투스가 보수적인 성격뿐 ㅇㅏ니라 변동 ㄱㅏ능성 및 역동성 또한 ㄱㅏ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ㅇㅣㅆ다.....우리가 ㄱㅏ진 ‘정동의 ㅂㅓㅁ위‘가 뿌리 ㄱㅣㅍ은 교육의 겨ㄹ과라면, ㅈㅓㅇ동의 ㅈㅓㅇ치가 ㄱㅗㅇ동체의 ㅁㅣ학의 ㅇㅕㅇ역을 확장하기 위해선 대하ㅇ적인 정도 교육을 옹호해야 할 ㄱㅓㅅ이라는 저ㅁ이다. 234-235

리토르넬로 ritournelle. 교향곡에서의 반복구를 말한다. 반복되면서 변화를 ㄱㅏ져온다. 가타리는 리토르넬로를 실존적 정동들을 결정화하는 반복적인 연속체라고 하였다. 이 반복구는 소리차원, 감정 ㅊㅏ원, 얼굴 차원 등을 ㅈㅣ니고 있으며, 끊임없이 서로 침윤해 간다. 시간의 결정들을 퍼뜨리는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다. 237 리토르넬로는 정동적인 것을 ‘실존적 ㅇㅕㅇ토‘로 구조화한다. 만약 정동이 강도라면, 리토르넬로는 “순환하여 되돌아온” 정도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237

볕뉘 2. 감정차원, 얼굴차원이 있다는 소리가 마음을 끈다. 어찌하다보니 또 다시 가타리로 돌아온다.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난 것들이 많은가 보다.

리토르넬로가 ㅈㅓㅇ동적 힘을 재편성하는 데는 기호 체계와 표현의 ㄱㅣ존 범위, “이미 분류된” 것들을 “분자적으로 파괴”할 것을 요구한다....이러한 정동적 강도는 변형과 ㅅㅐ로운 삶의 방식을 위해 담론의 질서를 송두리째 엎어 버릴 수 있다....공격은 말 그대로, 영토와 함께 온다. 그러나 ㅁㅓㄴ저 ㅇㅕㅇ토, ㅈㅡㄱ 영토의 표현적인 기반이 형성되어야 ㅎㅏㄴ다. 형성된 후에도, 영토들은 항상 허물어진다....느낌은 감정을 ㄱㅏ로지르며 재배치하는 ㅅㅐㅇ각들이 복잡하게 꼬인 시ㄹ 뭉치이다.....정동은 ㄷㅏ시금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전이”하며, ㅎㅏ나의 상태라기보다는 계속해서 “한 ㅅㅏㅇ태에서 다른 ㅅㅏㅇ태로 가는 과정”이다. 이것이 거시 정치와 ㅁㅣ시 ㅈㅓㅇ치를 바ㄷ치는 ㅈㅣ렛대이다....가타리에게 정동이 전부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로의 미학적인 접근이 대두하는데, 이는 곧 ㄱㅏ타리가 감각작용과 창조 ㅁㅗ두를 가장 중요한 거ㅅ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주체성의 다수성을 가능하게 ㅎㅐ준다...가타리가 ㅅㅏ회적 실천 속에서 정동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의 실천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이다.가타리는 “윤리-미학적 패러다임”dㅡ로 정동을 받아들인다.. 238-241

마수미는 정동이 “세계를 결합시키는 보이지 않는, 횡단 ㅅㅏㅇ황적인 접착제”라고 말한다. 가타리에 의하면, “정동은 ㅈㅜ체성에 달라붙는다. 그것은 접착 물질이다” 정동은 ‘듣는 자‘에게 만큼이나 ‘말하는자‘에게도 ‘달라붙으며‘, 공감 속에, 욕망 속에, ㅇㅣㄹ반적인 ‘ㅈㅓㅇ동의 전이적 특성‘안에 박혀 있다. 이로 이ㄴ해, 복합적이며 개방된 정동적 지식이 “다극성의 정동적 구성”속에서 ㄸㅓ오른다. 265

생동권력 혹은 생체 권력이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정동의 전송, 운동, 균열, 반향이다. 이러한 권력 형태들은 정동의 ㅎㅣㅁ을 저지하거나 지시하는 게 아니라, ㅈㅓㅇ동의 힘과 결합하여 작용하면서, ㅅㅣㄴ체가 ㄱㅜ성체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물질적-정동적 과정을 강화하고, 다수화하고, 스며들게 한다. 270

인간을 개별 유기체로 보는 관념에 드러난 유한한 총체성이나 본질로 생각되기보다는, 가능성들을 감싸고 있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비주관적 힘으로 출현한다. 이것은 또 브라이언 마수미가 정동을 활력적인 차원 내지 ‘능력‘으로 정의하는 반면, ㅈㅓㅇ서란 ㄱㅏ능태의 ‘잠재적 공존‘으로부터 ㄱㅣ억,경험,사고, 습관에 ㄱㅣ반하여 정동을 선택적으로 활성화하거나 표현한 것으로 정의했던 관점이기도 ㅎㅏ다. 307

비록 정동을 이해하는 이러한 두 가지의 광범위한 방식이 매우 ㄷㅏ른 철학적 전제에서 시작된 것이긴 ㅎㅏ지만, 서구 합리성 비판의 궤적에 따라 인간을 다시 생각하는 지적인 프로젝트의 ㅈㅜㅇ심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다 중요해보인다. 308

정동을 타고난 것으로 볼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볼지, 정동과 인지, 정서, 감정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ㅎㅏㄹ지, 이러한 결정이 이론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어떤 함의를 ㄱㅏ지는지에 ㄷㅐ해 일치된 바가 거의 없다...이는 ㅈㅓㅇ동이론에 ㄷㅐ한 사고의 총체와 ㄱㅕ루어야 ㅎㅏ기 때문이고, 또한 분과학문들 사이나 심지어 그 내부에서도 공통분모 없는 불일치와 겨루어야 ㅎㅏ기 ㄸㅐ문이다. 309

볕뉘 3. 어쨌든 서구 합리성 비판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ㅅㅏ유의 비교를 통해 실사구시하는 입장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 또 하나하나의 분석하는 사고는 전체를 볼 수 없게 만들기에 거꾸로 거스르는 ㅅㅏ고는 결과물에 대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결국 구조와 내용에 도달하겠지만, 다른 ㅅㅏ유가 낳은 결과물을 보면서 다시 한번 드러나는 ㅎㅓ점을 되짚어봐야 할 것 ㄱㅏㅌ다.


담론적 실천에 의해 제공된 주체의 입장들에 대한 분석이, 결국엔 원래 포착하려고 의도했던 바로 그 역동성을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주체성을 기호의 장 안에서 다소 명백히 ㄱㅠ정된 입장으로 이해하게 되면, 모든 흐름과 변신이 사라지게 된다. 신체 또한 ‘안으로부터‘ 이해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담론이 새겨지는 표면으로 보이게 된다. “입장”이라는 개념은 그림에서 운동을 제거함으로써 생긴다. 371


정동적 탈출의 지속성이 언어로 옮겨질 때, 그것은 긍정적 함축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활력을 지각하는 것, 살아 있음의 감각, 변화 가능성을 지각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380 마수미가 신경학적 “0.5초의 차이”에 대한 논의에서 언급하듯, 이것은 우리가 적절히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뛰어넘어 “느낄”수 있음을 의미한다. 380

볕뉘 4. 초중반 번역의 문제인지 논문의 수준 문제인지 다소 버겁거나 지루한 감이 많았다. 과연 다 읽어내야 하는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처음에 갈무리한 원로와 대담으로부터 먼저 읽기를 시작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저자 별로 기복이 크다. 중간 교육학 비고츠키에 대한 언급도 많고 교사와 학생 상호인정하는 과정으로서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이 개념에 가까이 갈 수 있을 듯하다. 라이히, 그람시, 가타리 등을 다시 불러내고, 들뢰즈 역시 근대성을 추구하는 철학자로 읽는 면이 새롭다. 여기에서도 전체성에 대한 이해와 노력을 중시한다. 정동만으로 보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맥락을 먼저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스피노자로부터 시작하는 흐름들을 다시 읽어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물질과 기억의 베르그송을 이해하는 길이 거꾸로 여기에 있기도 한 것 같다.

볕뉘 5. 다소 장황하지만 학교 왕따의 문제를 갈기갈기 분리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모욕의 재생산으로 다시 보려는 노력과 사유의 연습이 또 다른 관점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조금 쉽게 생각해보자. 모든 것을 알고 꿰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현실을 낫게 알고 느끼고,그 느낌에 연동된 총체에 대한 관심이 또 다른 상상력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1980년대 중반으로 이론의 흐름, 연원은 거슬러 올라간다. 스친 앎들을 또 색다르게 엮을 필요성을 느낀다. 한해가 저물었다. 삶은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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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31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가 공격하는 보수만큼 좌파들도 엘리트성에 갇히는 아이러니는 구소련의 관료주의가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붕괴의 요인이 되고... 개인의 영달과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 심리 때문에 보수화-엘리트성은 같은 카테고리에 묶이는 듯.

상상력에 대한 표현 정말 동감. 현실을 직시하고 이해하지 않은 채 그 속에서만 동력을 구하려 하면 자체 붕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이 대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그 예술적 힘을 저도 좋아하지만 스스로를 가두는 한계는 있었다 생각합니다.

읽고 싶던 책이었는데 자세한 소개 감사합니다^^

여울님, 올한해 많이 힘드셨던 거 같은데, 2017년엔 한결 맘이 풍요로워지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건강하시고요^^

2016-12-31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