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


시한테도 미안하고, 산문한테도 미안한 미시미산을 시산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틀이라는 것이 비의식, 무의식에 가까운 것들을 배경처럼 결정하기에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시산문의 여러편에서 말하고 있다. 중간 이피의 그림과 섞여있고, 시산문을 시로도 옮겨놓아 그 작업의 행간도 읽을 수 있다. ‘않아‘라는 필명으로 게시한 카페의 글에는 시간의 공백이 있다. 다름아닌 49일의 흔적이다. 죽음을 형상화한 시이다. 그 가운데 ‘아님‘이라는 시가 겹친다. 주문같은 시. 아님이 아닌 아닌 것이 아닌 아님은.......


시산문에는 유독 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누구 알아주고 규정하든 하지 말든 상관없이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하는 찰나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그녀의 시였다고 고백한다. 아닌 것은 아닌 것과 연결된다. 웅웅거리는 소리도 없는 것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들의 소리를 찾아내고 말로 다듬는 일. 말들을 조탁하여 언어를 만드는 일. 언어를 거르고 걸러 증류하듯 한방울 똑 똑 떨어지는 일이 시라고 말이다.


형상화되자마자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 늘 ㄷㅏ시 읽어도 다르게 읽히는 시들. 그것이 시라고 말한다.


그래서, 선입견을 버리기로 한다. 않아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어떤 직업을 가지든 시산문에서 말한 것들을 그대로 안기로 한다.


볕뉘.

청문회를 본다. 대선주자들을 본다. 국회의원을 본다. 사회활동가들을 본다. 페이스북 친구들을 본다. 마누라를 본다. 아이들을 본다. 일터 동료들을 본다. 나를 본다. 내 안을 들여다본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닌데..이것은 아닌데.....작품은 시의 집 안에 웅크리고 있어 시 밖으로 나오지를 못한다. 시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은 소리에 묻히고..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저편으로 사라진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시 밖으로 나오려는 언어의 산문은 확성기같은 정책의 소리에 묻혀 모기 소리만큼 앵앵거린다.


이렇게 맘마라는 소리도 못내는 이건아닌데 이건아닌데는 웅웅거리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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