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사람이다 - 후장사실주의자의 소설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읽었다. 그러다가 시집을 한권 읽었고, 절반 정도 남은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를 마저 빠른 속도로 읽었다. 신경건축학란 새로운 학문이 다가온 것처럼 서문과 책날개는 설레발을 치고 있어 혹시나 했다. 성당, 도박장, 놀이동산, 할인매장 등등....빅데이터를 구하기 쉬워졌고, 뇌과학을 접목시킬 수 있어 이전에 감으로 느끼던 것이 명확해졌다. 이런 기술과 가상현실이 접목되면 놀라운 효율성을 가져오는데, 뛰어난 적응력을 가진 인간, 뇌의 가소성으로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조심스러운 우려가 있다. 하지만 과학과 건축 사이 여전히 사람이 있다. 흘러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이를 구별하게 만드는 사람말이다.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다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과정을 겪어내는 사람.

2. 관계 맺기 - 자아계발서인지 심리학서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자아계발서로 하면 더 많이 판매될 수 있다고 한 것일까. 컨셉은 온통 이 분위기이다. '발라낸 자아'는 더 없이 위태로운가. 서두에 은밀한 동반자로 11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내부에 이런 마음속 동반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유형을 파악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서기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한다.

 

3장은 그래도 보아줄 만 할 것 같다. ‘자아의 근원은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온다‘, ‘다른 사람없이 나도 없다‘ ‘다른 사회적 존재들이 없이는 자아는 감정도 형성할 수 없다‘라고 하며 '발라낸 자아'는 있을 수 없다라고 한다. 갓난아이가 부모와 관계로부터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적인 자의식은 저절로 생겨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상호작용의 결과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자의식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매번 변한다. 자아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라던 철학자 토마스 매칭거의 말은 지극히 일리가 있다. 196‘  

며칠 전 페이퍼에 언급한 생산주의 자아와 소비주의 자아가 겹치기도 한다. 자본주의 초기의 가치나 개선을 해나가려는 생산주의 자아가 이제는 ‘소비주의 자아‘로 산개해서, 뿔뿔히 흩어지고 통일성조차 찾기 어려워졌다고 말이다. 테리이글턴이 그런 자아로는 지성적 진화주체로 설 수 조차 없다라고 했다. 현재의 무한 반복이라고 말이다. 자아는 갈 곳을 잃어 더 이상 존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일의 늪, 성과의 늪과 자학적인 채근의 반복. 결국 돌아오는 것은 유사번아웃증상들이다. 곁의 관계는 사라지고 끊임없이 소비하는 나로 고립되고 만다.

어쩌면 우리는 집요하게 자아를 사물로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고정된 무엇으로 사회성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발라낸 자아'와 개인의 신화나 이데올로기로 모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주제의 3장과 다음 장은 갈등, 그리고 이별로 책을 구성하고 덮는다. 이 책 역시 교육학, 사회학, 심리학, 행동연구, 신경학 등등 다른 학문들의 흐름들을 차용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복잡한 표현들을 쓰기는 하지만 아들러의 저작에서 자신을 보는 관점, 사람들 사이 차이점, 관계를 맺는 법 등에 대한 설명보다 기본적인 사항들을 훨씬 모호하고 어렵게 설명하고 있다. 결론은 독립된 자아를 잘 간수하는 것으로 끝내는 그냥 자기계발서인 것 같다. 너에게 향하는 방점이 희미하기에 말이다. 그래 만국의 삶이나 살아가기가 비슷한 걸로 결론내자. 이 하늘 아래서는. 잠정적으로 자아에 대한 가치 전도가 필요한 것으로...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없다고 말이다. 사회 관계도 말이다. 잠정 결론이다.

3. '이틀' - 양말공장 상무(50대후반)의 의도치 않는 이틀동안의 땡땡이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목련이 나온다. 이삼십년을 연립주택에 살면서 한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목련나무를 보면서 아이에게도, 할머니에게도 묻는다. 정말 여기에 있었느냐고 말이다. 젊은 작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짧은 단편에 싣고자 했다. 그래서 그 이틀은 호흡이 가쁘다. 땡땡이 치고 싶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아마 50대 중반쯤이 되어서야 느낄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연민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디테일은 연민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볕뉘. 후장사실주의자. 도대체 뭔말일까 궁금했다. 후장사실주의자들이 있다는 서점주인의 말에 갸우뚱했다. 후장이란 내장 마지막부분..음 그러니까 막장같은 것인가 보다...사실주의? 리얼리즘....1920년대 초현실주의가 판을 치던 때, 이 흐름에 맞서 잡지 한권을 낸다. 이백여부를 만들었지만 팔린 것은 이십여권..그것도 주거나 강매한 것들....정작 보게하려는 농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들 불쏘시개로 쓰이는 그 잡지가 유일하게 한권 남아...한 비평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후장사실주의....그러니까 초현실주의에 맞서는 뱃 속 저 막장이 찌릿해져오는 리얼리즘. 허구이지만 사실보다 더 사실같은 기록문화를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나름 해석했다. 이 역시 잠정적이지만...그 작품이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단편이다. 새서울백지화계획도 나오고 영친황의 손자 이구도

나온다. 무수한 참고도서도 나오고, 이 저자를 인터뷰하다 후장사실주의자가된 평론가도 나온다......건축, 공간......사람.....환대.......우리는 어쩌면 시공간도 이론도 관계도....모두 낭떠러지같은 위기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디쯤에 있는지조차도.....뱃 속 저릿한 생각들이나 일들은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여기 저기, 저기 여기일까.....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