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제 한몸 가누기 힘들어지는 현실은 격랑을 연상시킨다. 한 미술평론가의 말처럼 구석기시대처럼 야생에서 수렵으로 하루를 이어가야하는 구석기인에 비교하는 것에도 머리를 끄덕이게 만든다.  정착하면 살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일상을 비장함과 생존으로 치장하는 사보타지는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점점 바빠지고 점점 반경이 좁아지는 현실속에서,  인식의 관계망이나 사람의 관계망, 사고의 외연은 조금씩 조금씩 움추려드는 것은 아닐까? 살아야겠다는 절망감이 몸을 점차 파고들어 인식의 폭을 그만큼 줄이는 것은 아닐까? 피상적인 관심, 피상적인 앎, 피상적인 관계 - 점점 깊어지는 외로움들

나는 그런 면에서 돌연한 '잠수'를 나르시시즘를 표현하는 하나의 징표라 여긴다.  잘못된 인식일까? 그리고 OFF가 부족한 e-편한 접속망도 그러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여긴다.  잘못된 생각일까?

2.


우리의 몸에 녹아 살아있는 십장생은 더 이상 십장생이 아니다. 오감을 벗어난지 오래된 일이고, 오직 시선에만 의지하는 눈팅으로만 박제화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 속에 마음과 몸이가는 것은 대체된 십장생들이다. 스타이거나, 잔인함이 증폭된 오락이거나, 관음증이거나... ...

자본주의에 대체된 ' 대체 십장생' 을 오감으로 체험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더이상 밋밋한 것에 재미와 감수성을 느낄 수 없는 불감증 환자인지도 모른다. 자극적인 맛에 입맛이 길들여져 더 이상 평온한 맛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3.




'자기연민'은 단절을 전제로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시각에만 의존해 깊어지는 관계, 대면하지 않고 풍부해지는 관계란 과연 있을까? 주고 받고, 매개고리가 없으면서 나눈다는 것은 가능한가?

그런면에선 나는 돌이켜보면 환자수준이다.  관계맺기와 쌓여가기 - 풍부해지기는 숙제처럼 불편하다. 그렇게 길들여지고 편해져서 다른 감각의 공간이 있는 것도, 만드는 것도 감히 생각해보질 못했다.

4.





5


끊임없는 자기 보기, 보호본능에서 시작한 자기애는 경로를 잘못 선택한 기관차처럼,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흐릇해지는 주변 경관처럼, 시선을 놓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통증마저 잃어버린 시대. 내 것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동정도 사치로 변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무신경과 불감증, 뒤섞인 뻔뻔함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지? 소통과 교류란 없고 끊임없는 자기만들기만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면에서 나르시시즘은 우리가 인지못하는 자본주의와 한통속일지 모른다. 끊임없는 자기애로의 지향과 그 속도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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