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은 저자 이름을 빌어주지 않는다.(아닌가?) 책을 많이 팔아준다고 해서 그 사람 이름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다. 다음에 도움받을 것이라고 해서 공저자 이름에 넣지 않는다.  번역한 책이라고 해서, 번역한 사람을 데놓고 역자에 이름을 넣지 않는다. 감사의 글에 자그맣게 노고가 들어갈 뿐이다.(아닌가? 번역은 다 시켜놓고 편집해서 자기이름만 들어가는가?)

 

 2.

논문 이름빌어가기, 빌어주기를 보면서 참 이상하다. 보스 한명을 중심으로 해서 중간보스, 거래선까지 이름을 빌려주다보니 아무 거리낌없어진 것은 아닐까? 실로 이 보스의 힘-꼭지점의 힘은 무한대인 듯 보인다. 지도대국 한번 해 준 셈인가? 정점은 무한증식할 수 있는 파워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

3.

연구비를 받고, 평가잣대로 논문인용 회수, 돈을 얻기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하나 그렇게 자조하기엔 얼굴 화끈거리지 않을까? 관행이라고? 그 윤리에 대해 사회적 공론장에서 논의 한번 한 적이나 있는 사회인가? 누구나 한번쯤은 이상하다라고 느꼈겠지만 돌아서선, 밥벌이의 그늘에서 아니다. 나는 아니라는 몸의 강변에 묻어 지나가는 것은 아닐까?

 

4.

책의 공저자 관계는 거래가 있다라고 하더라도 이름을 서로 넣어주진 않는다. 이런 면에서 논문 이름 넣어주기엔 중앙집권적 발상과 실질적인 연구자 사이의 간극도 있고, 궁극적으론 논문의 가치도 서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적주의나 평가의 왜곡으로, 규모의 경제란 논리를 고스란히 들여와 추잡하게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5.

거래가 아니라 책임질 수 있는 선이면 되지 않을까? 그래야 일인집중체제가 아니라 다중분산체제로 이어져 더 양질의 논문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평가시스템의 변화, 과도한 실적주의, 보다 중요한 것은 양심과 감수성의 회복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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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5-19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정한 과학을 몰락시켜야..."
[시론] 진정한 가치는 "다른 사람을 돕는 자유"

▲ 91년 노벨 화학상 수장자인 리처드 언스트 박사  ⓒ
MRI개발로 노벨상(91년 화학분야)을 수상한 리차드 언스트(R. Ernst) 교수는 최근 국내 뇌과학연구소 개원식 기념 세미나에서 21세기의 사회상과 과학자의 모습을 ‘무한정(unlimited)’이란 단어를 사용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21세기 사회상을 요약하면...
▲ 개인의 자유를 ‘무한정’으로 요구하는 시대,
▲ 자유시장경제에 대해 ‘무한정’으로 신뢰를 표명하고 있는 시대,
▲ 부자와 가난한 사람과의 격차가 ‘무한정’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회,
▲ 협력은 사라지고, ‘무한정’으로 경쟁만 존재하는 사회,
▲ ‘무한정으로’ 윤리적인 토대가 무너져가는 사회라는 것.

언스트 박사가 바라보고 있는 이 21세기 사회상은 곧바로 과학자의 환경과 연결된다. 즉...
▲ 21세기 사회는 과학에 대해 ‘무한정’의 신뢰를 보내고 있으며,
▲ 많은 부자들은 과학에 대해 ‘무한정’의 지원을 하고 있고,
▲ 과학자들끼리의 격차가 ‘무한정’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 간에 협력이 사라지고,
▲‘무한정’으로 경쟁만 존재하는 상황이 ‘무한정’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 과학자 대부분이 너무 힘에 겨운 부담을 안고 ‘무한정’ 경쟁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

언스트 박사는 “세계 과학계가 지금 ‘무한정’의 속도싸움을 하고 있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리고 속도싸움을 하는 가운데 많은 과학자들이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거짓말이나 부정행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매우 우려되는 ‘부정한 과학(unjust science)’을 양산하고 있다는 주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언스트 박사는 속도경쟁이 아니라 이 ‘부정한 과학’을 세계에서 몰락시키는 일이 “21세기 과학자들에게 있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부정한 과학’을 몰락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 언스트 박사는 대학의 책임을 거듭 강조했다. “대학교는 살아 있는 인류의 문화센터로서 경쟁을 하는 곳이 아니라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것. 대학을 통해 학문과 장르를 뛰어넘어 인류 공영을 위한 대화가 이루어지면서 경쟁구도 속에 있는 ‘부정한 과학’ 풍토가 어느 정도 근절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언스트 박사는 이어 대학교수들로 하여금 경쟁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줄 것을 촉구했다. “교수와 연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며 대학교수가 경쟁구도 때문에 ‘부정한 과학’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크게 우려했다.

마지막으로 언스트 박사는 “과학자들이여, 세계를 이해하라!”고 촉구했다. 박사는 지금 세계의 모습을 “미국이 저녁을 짓고 있는 가운데 EU(유럽연합)가 접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로 풍자했다. “나머지 세계의 주장을 미국이 싫어한다는 것.”

언스트 박사는 그러나 과학자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가치는 “다른 사람을 돕는 자유”라고 강조하고, 아인슈타인과 프로이드의 사례를 들어 다른 사람을 돕는 자유로서의 “이 세계에 대한 과학자의 책임”을 역설했다.

이날 강연에서 주목을 끈 것은 황우석 박사에 대한 언스트 박사의 견해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지만 황 박사와 같은 사건이 “너무도 경쟁을 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발생했다는 것. 지금 세계 과학계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한국에서 곪아터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언스트 박사는 그러나 2003년 MRI(자기공명단층촬영장치)를 개발한 미국의 로터버(P. C. Lauterbur)와 영국인 맨스필드(P. Mansfield) 박사를 ‘성인(saint)으로 표현했다. 성인이란 동양적 의미로는 군자를, 서양적 의미로는 천사 또는 천국에 간 사람을 의미한다.

박사는 자신이 알고 있던 로터버와 맨스필드 박사의 인격을 힘 있게 ‘성인’이라 표현하면서 두 사람의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박애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날 언스트 박사의 강연을 듣는 한국 청중들의 마음이 매우 착잡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사회로부터 ‘성인’이란 찬사를 들으면서, 노벨상을 수상하는 인물이 과연 나올 수 없는 것인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부정한 과학’ 풍토 속에서는 과학은 물론, 노벨상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윤리적인 문제는 과학자 개인을 포함해 국민 전체의 몫이라는 것이다. 과학의 풍토를 ‘부정한 과학’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과학풍토로 전환했을 때 한국에 자랑스러운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강봉 편집위원  


2006.04.26 ⓒScience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