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공명 - 두 역, 아니 세 역. 강남, 구의 그리고 곡성. 두 제단. 아니 공무원 그림자와 공무원의 안타까운 죽음. 그냥 스쳐가는 줄 알았다. 늦밤 떠지는 눈. 혹 우리가 놓치다 가는 건 아닐까.


강남.

하얀 가면들. 눈치채지 않으려던 우리 속의 그 사회적 가면의 경계를 문지르고 있는 건은 아닐까. 서구라는 쫒아가는 서양의 공모자와 같이 몸에 배인 남자라는 근거없는 정체성을 `사회적 공명`이란 약자의 울림으로 그 지문이 지워지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게 하얀 가면을 부수는 지표로 흰 그림자를 드리워 사회의 아우성을 깃발처럼 날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다른 제단에 바쳐지는 국화꽃들.

구의.

정규직이라는 지문을 지우고 사회적 형평을 찾아가는 민주주의를 찾아가는 공명의 흔적이자 또 다른 흰 그림자는 아닐까.

곡성.

그리고 또 다를 절규. 곡성에 울부짖음. 산자와 사자가 한몸이란 걸. 살 자와사자가 한 몸이란 걸. 또 다른 제단에 꽃을 바친다.

신문 사회면, 한줄기사의 안타까운 비운에도 공명하던 한 세대 전, 반세기 전의 일상들. 곡성이 일상인 퇴행의 시대.

`사회적 공명`이 또 다른 형태로 귀환하는 것이자 여명처럼 오는 것이라고. 우리는 너무 멀리 온 것이라고. 결코 가벼운 , 사소한 죽음은 없는 것이란 그림자.

곡성의 비극. 그 죽음에 흰꽃을 바치며 삼가고인들의 명복을빕니다. 눈물의 그림자를 올립니다.

발. `오보에를 위한 협주곡` 외 몇곡 더 연주회에 다녀오다. 너무 안스럽기도 했다. 붉게 부푸러오르는 얼굴. 호흡과 연주 사이의 간극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연주와 표정의 안온함이 같이 어울린 건 단 한차례. 어느 귀족이 자신의 악 취미를 위해 작곡시킨 건 아닐테지. 나라면 우리라면 저 작곡은 시키고 즐기고 싶진 않아. 그러고 싶었다. 삼삼오오 연주자와 식구들과 지인들과 뒤풀이. 즈문동이 아이들의 맘과 삶이 걸려온다. 밤바람도 좋은 날. 문득 생각이 사선으로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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