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나라*에서 - 황우석신드롬 강연회에 참석하며




지난 3월말미에 대전에서 “황우석증후군”에 대한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같은날 서울에서는 한국사회포럼 2006에서 아래와 같이 ‘황우석’ 관련하여 토론회가 열렸지요.(아래 덧붙임.) 아쉽게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모든 과정은 사라져 버린 듯 합니다. 반사급부로 줄기세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하지만, 지금 남은 것은 “그래도 기회를 한번 더 주어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속마음인 것 같습니다. 본 듯, 안 본 듯한 광고가 선명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상품에 손길이 가는 것처럼 아파했던 그 과정은 기억의 골목길을 돌아서 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김교수님이 지적하였듯이 5개그룹에 속한다-그렇지 않다가 아니라 그 편집을 관통하는 것, ‘국익안의 민족’이라는 것이 모든 과정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과학만능’이라는 사고가 우리를 냉정하게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가지 인식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것을 주장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인식과 성찰의 수준에선 여전히 퇴물이 되어버리고 있는 이종장기이식이 국내에서 똑 같은 문제로 야기시킬 수 있고, ‘황신드롬’과 유사하게 사회적 싹으로 키울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맛보았던 실패를 또 다시 그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가능성 때문에 몸서리쳐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동차일수도, 원자력일수도, 나노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발생학에 전문가들이 되었다지만, 이젠 외려 시비를 가리기 위한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않으려는 것은 아닐까요? 전 동아일보기자가 쓴 <황우석의 나라>란 책을 보셨겠지만, 전직기자인 그는 수직적인 결정구조의 문화, 언론에서 숨쉴 틈이 없었습니다. 일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도 없고 지역도 없고 오로지 성과만이 있을뿐입니다. 그 속에서 양심과 왜곡된 결정, 이상하게 이것은 아닌데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의 간극이 있습니다. 알고있는 것과 표현하고 싶은 것과 현실은 그만큼 괴리감이 있었던 것이었죠. 수평적이거나 권한이 분산되지 않은 언론시스템에서 여전히 똑같은 오보나 대중조작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언론의 권력구조나 편집방향과 진실보도의 개선에는 안타깝게도 예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참터도 그렇고 우리의 요구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5개 그룹핑하여 매도하고 싶은 생각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한발자욱 더 딛기 위해, 과정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일그러진 일상 가운데 단 한가지라도 몇 달전보다 나은 상태로 보자는 것입니다. 사고를 갇힌 틀, 내가 있는 시스템 안에서만 보려하지말고, 약자나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혹 레드컴플렉스처럼  ‘국익안의 민족’우선과 ‘과학만능’이 내 몸에 찰거머리처럼 붙어있지나 않은지 돌이켜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입장에 맞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위주로 해서 온갖 자료를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두고 냉정하게 무엇을 판단을 하지 못했는지를 돌이켜보고,말하는 ‘차이’가 무엇인지 열어놓고 들어보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접근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자는 것이죠. ‘반공’과 ‘빨갱이’의 세뇌속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죠. 내면화된 의식 속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또 다시 ‘국익안의 민족’과 ‘과학만능’,‘성과’에 전도되어 다양한 스펙트럼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의 스펙트럼 하나하나는 모두 돌탑처럼 하나하나씩 쌓여야 될 것들인데, 모두 하나로 뭉쳐 원점에 되돌려놓는 것은 아닐까요?




일상에 지친 황우석의 나라에서 W B C - 월드컵에 기생하는 자본과 황우석, 또 다른 황우석, 하늘에서 내려올 스타에 굶주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치고 힘든 일상에 생긴 허전함을 상상임신에 기대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현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은 아닐까요. 술이 깨고난 고통은 지난 밤의 부푼 욕망의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현실에 있는 온기있는 방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마실 물만이 조금이나마 갈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을 뿐입니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지지자들은 △반미+친노 △반미+반노 △친미+반노 △반 서울대·경기고 △반기독교 등 매우 이질적인 배경과 동기를 갖고 있으며 ‘황빠’ 현상의 근본원인인 과학기술만능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환석 시민과학센터 소장(국민대 사회학과 교수)은 한국사회포럼의 한 행사로 24일 열리는 ‘한국 사회의 비이성적 집단주의, 사회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토론회에 사전배포한 발제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우선 반미+친노 성향은 미국이 꾸미는 줄기세포기술을 지배 음모가 ‘황우석 죽이기’의 핵심이라고 보며 노무현 정부는 이에 책임이 없거나 황우석을 도와주는 우군으로 간주한다. 서프라이즈나 딴지일보가 여기에 가깝다. 자주민보 등 반미+반노 성향은 미국이 ‘황우석 죽이기’의 주범이지만 노무현 정부도 이에 종속된 정권이기 때문에 결국 공범이라고 본다.

친미+반노 성향은 미국은 이번 사태와 무관하거나 오히려 황우석팀과 협력하는 존재로 주장하고 황우석의 연구를 정권의 친북적 목적에 이용하려 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있다고 본다. 인터넷 독립신문이 이에 가깝다. 반서울대·경기고는 서울의대 카르텔(대표 문신용)이 음모를 꾸몄고 경기고·서울대 인맥이 이를 뒷받침하는 세력이라고 간주한다. e-조은뉴스와 ‘정치웹진 판’이 이에 가까운 입장이다. 반기독교성향은 법보신문이 대표적이며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이 황우석 죽이기를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이질성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황우석 지지대중 사이에는 마치 아무런 견해 차이나 갈등이 없는 것처럼 눈먼 애국주의와 개인숭배가 황우석 지지자들의 판단을 마비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가능할까. 김 교수는 “이질성을 가로질러 이 모든 집단이 공유하는 뿌리깊은 이데올로기가 있다”며 “그것은 바로 과학기술 발전이야말로 최고의 애국이고 정당한 수단은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과학기술만능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했다.

과학정책, 민족주의냐 민주주의냐

황우석 사태가 한국의 정치와 사회운동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인가. 김 교수는 주저없이 “그동안 한국의 제도정치권은 물론이고 민주화운동과 진보세력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였던 전통적 과학기술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라고 단언한다. “과학기술은 이제 미래의 발전을 지속하는 데 핵심적인 의제로 부상했으며 더 이상 과학기술자나 과학기술이 몰정치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정치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한국 정치와 사회운동의 핵심을 이루는 주요 과제이다.”

이와 함께 김 교수는 “이미 과학기술사회가 된 한국사회에서 진보운동권도 누구와 무엇을 위한 과학기술 발전에 찬성하는지를 시민대중에게 제시하지 않고는 진정한 사회운동으로 존립하기 어렵게 됐다”고 주장한다. "두가지 선택지"가 있다. "민족주의적 과학정책과 민주주의적 과학정책"이 그것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황우석에 열광하는 애국주의 과학은 민족주의 과학정책 모델과 부합한다. 민족주의적 과학정책이 선진국을 목표로 삼고 발전중심전략을 지칭한다면 민주주의적 과학정책은 “환경친화적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삼고 균형적 과학발전을 추구하며 시민참여를 허용하는 열린 과학공동체를 지향”한다. 논쟁과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김 교수는 과학기술정책을 둘러싼 더 많은 사회적 논쟁을 주문한다


* 황우석 나라 - 전직 동아일보기자가 쓴 책 <황우석의 나라>에서 옮김. 2006. 3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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