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이 태어나면서 이어받은 것에 자긍심을 갖고 싶다는 소망과, 지난날의 불평등, 불의, 권력의 작용에 대해서 정직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성과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다양한 사상의, 사람들의, 제품의, 혹은 기술의 상호작용과 흐름을 어느 하나를 생각해보아도, 잘 알다시피 역사라든가 유산이라는 테마를 특정한 국경선 안에 가두는 일은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712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형성한 역사수정주의자의 일단은, 일본의 과거의 어두운 면만을 강조하는,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자학사관은 부당하다며 분노했다. 역사수정주의자 중에는 1937-1938년에 난징 대학살이 일어난 것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도 있다. 그들은 특히 일본이 독립된 근대국가로 급부상한 것을 비롯해서 일본이 이룩해온 다양한 성과를 강조함으로써 일본인인 것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역사가 필요하며, 특히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그러한 것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에 대동아전쟁긍정론을 주장한 하야시 후사오와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은 서양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고상한 영위였다고 간주하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은, 학교의 역사교육에서 위안부라든가 민간인 학살 등의 주제를 다루는 데 이의를 제기했다. 706

 

잃어버린 10년 뒤 10년의 회복 이유 - 해고, 인원 감축 등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감축은 3-5년에 걸쳐 이루어지거나, 자연감소(퇴직이나 전근에의해 생긴 결원을 보충하지 않음)나 희망퇴직에 주로 의존하고 있었다. 사실상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직장을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정년퇴직했거나 희망퇴직자였다. 오직 8%만이 사용자의 재량에 따라 해고되었다.” 이 비율은 1975년 오일쇼크 때의 정리해고 수준보다 낮은 것이었다. 노동자의 이직율은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일본이 여러 직장을 전전하는 사람들의 사회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2006년과 2007년에는 인구감소시대에 안정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임시직 노동자를 정규직 노동자로 전환하는 기업이 늘어났다. 이런 조치는 평생고용이라는 오랜 관행을 재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702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움직임도 제한적이었다.

 

요컨대 1990년대 일본경제의 고통은 일차적으로 파멸적인 거시경제정책의 산물인 듯하다. 2000년대의 경기회복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글로벌 경제의 변화에 발맞춘 몇 가지 정책이었다. 일본의 국제무역은 2000년에서 2006년까지 크게 증가했는데, 늘어난 수출물량의 절반이상은 동아시아로 향했다. 2004년에는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일본의 가장 중요한 교역상대국이 되었다. 중국은 일본 수출입물량의 5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중국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이 만들어낸 중대한 결과였다...금리는 낮추고....임금은 인상했다. 702-703

 

20058, 고이즈미의 우정민영화 법안은 자민당 내에서 상당수의 이탈표가 나온 탓에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그러자 고이즈미는 의회를 해산하고 9월에 중의원 총선거를 하기로 한 다음,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하고 새로운 후보들을 내세웠다. 매스컴은 이 정치신인들을 고이즈미의 자객으로 묘사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의원들은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 이런 대결구도를 만들어놓고, 고이즈미는 개혁에 반대하는 후보들을 지지하지 말라고 유권자들에게 직접 호소했다. 고이즈미의 자객들을 비롯한 자민당 후보들은 9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다음 달에 우정민영화 법안은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 법안의 주요 조항은 2007년에 발효되었으나, 민영화에 필요한 제반 절차는 2017년에야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700

 

19946월 자민당이 제1야당이자 오래된 이념적 라이벌인 사회당과 제휴했던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자민당이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의 총리 취임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 연립정권을 미국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민주당 정치인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다양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민당과 사회당의 연립은 일본의 유권자에게 여전히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사회당의 타격이 컸다. 국민은 자민당이 실용주의적 거래를 성사시키는 정당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자민당 지지자들은 이데올로기적 일관성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기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거에서 사회당이 획득한 지지는 상당 부분 평화헌법의 수호, 미일군사동맹 반대, 정겨유착 배격이라는 원칙에 대한 지지였다......사회당의 정치적 존재감은 순식간에 미미해졌다. 693-694

 

19937월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과반수 의석에 훨씬 못 미쳤다. 자민당을 탈당한 오자와와 그의 지지세력이 정치개혁을 내걸고 결성한 신생당과, 전년에 결성된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이끄는 또 하나의 개혁파 정당 일본신당은 함께 건투했다....선거 후의 정권담당을 둘러싼 줄다리기에서, 오자와의 신생당과 호소카와의 일본신당은 구래로부터의 야당들(사회당과 공명당)과 제휴하여, 1947년 이래 최초로 비자민당 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오자와는 연립정권 수립을 획책했지만, 자기는 입각하지 않고 배후역할자로 일관했다. 총리직에는 호소카와가 취임했다. 691

 

1993년 여름, 자민당의 아성이 결국 무너졌다. 야당세력은 미야자와 내각이 제대로 된 개혁에 임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들며, 내각불신임안을 상정했다. 의석이 반수도 되지 못하는 야당세력이 그런 불신임안을 상정한 것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때도 상징적인 항의행동으로서 끝날 것처럼 보였다.....오자와와 그의 지지자들은, 자민당에 반기를 들고 야당이 상정한 불신임안의 지지로 돌아섰다. 형세가 극적으로 전환됨으로써 불신암은 가결되었다. 미야자와는 내각 총사퇴,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 실시라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690-691

 

여당에 다행스러운 일로, 전후 헌법 아래서는 참의원은 국회의 이원 속에서는 중의원보다 열위에 있었다. 양원의 권한 차이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중의원이 예산의 선의권과 의결권을 갖고 있고, 참의원은 중의원에 의한 예산의 결정을 뒤집지 못하는데 있다. 자민당으로서는 중의원에서 과반수를 점하는 한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후 수개월 동안 사회당은 참의원에서의 약진을 바탕으로 자민당의 정책에 대항하려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19902월의 총선거에서는, 자민당은 중의원에서 과반수 지배를 더욱 확고히 해버렸다. 689

 

허술한 금융 시스템에 의해 부하가 걸린 경제는 1990년대 전반기 내내 비틀거렸다. 정부는 소비자와 민간기업에서 자신감과 활기가 되살아나길 바랐고, 경제 활성화를 위해 공공사업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정부는 댐과 고속도로 건설에 수천억 엔을 지출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공공투자로 침체된 경기를 부양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달러 가치가 유례없이 하락했다....수출을 통해 경기회복을 꾀하기가 불가능해 진 것이다..경제상황은 1995년과 1997년 중반 사이에 다소 호전되었다. 미일공동으로 엔화의 가치를 절하하고...GDP3%이상에 달하는 공공지출계획을 발표했다. 이런 조치들은 수출과 국내의 투자와 소비를 자극했다.....그러나 경제회복은 부실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실업이 늘어났다. 기업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신규채용을 하지 않고 기존사원들의 초과근무시간을 늘렸다. 물가는 하락했다. 그렇지만 소비지출의 증가는 크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했다. 19974얼 시행되었다. 683-684

 

미국은 또한 일본에게 군사 파트너로서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이 문제는 1991년의 짧은 걸프전기간에 전면으로 부상했다. 일본헌법의 평화조항은 파병을 금지하고 있었고, 여론도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에 대항하기 위해 구성된 다국적군에 파병하는 것을 반대했다. 미국은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습과 지상군 침투를 주도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전쟁을 지원하라고 일본을 압박했다. 결국 일본정부는 전쟁비용으로130억달러를 내놓았다. 678

 

 

군사행동이 시작되자마자 경찰과 군 당국은 군사행동을 반대하는 국내의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했다. 그러나 만주점령을 완력으로 정당화할 필요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일본서민은 물론 엘리트도 1931-1932년에 걸친 사태의 진전을 노골적으로 환영했다. 신문은 일본군의 전진을 열광적으로 전했다. 뉴스영화와 라디오는 경쟁적으로 최신전황을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좌익은 종전의 입장을 바꾸어, 만주 점령은 ㅅㄹ업을 줄여 국민 전체에 은혜를 가져다줄 약속이지, 결코 자본가적 제국주의적인 침략행위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일본제국이 만주국이라는 빛나는 왕관을 손에 넣은 것을 축하하는 새로운 가요곡, 신작 가부키, 심지어는 레스토랑의 새로운 메뉴도 등장했다. 가장 신경 예민해 있던 국가관료들조차도 한숨을 돌렸다. 사법성의 1932년판 위험사상조사는, 만주사변은 사회적 긴장이 고조될 때 불어온 가미카제라고 형용했다. 19325월에 육군성은 만주사변이 사회적 대립 대신에 새로운 연대정신을 함양했다고 지적했다. 425-426

 

서구의 파시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전쟁을 위한 동원을 창조의 어머니로 찬미했다. 전쟁의 수행은 변혁을 가져오는 촉매인 동시에 도한 그런 변혁의 결과이기도 했다. 469

 

히호시마와 나가사키는 화재와 죽음으로 생지옥이 되었다. 피폭 후 추가로 1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합계 250만에 가까운 일본인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류 최초의 원폭투하를 경험한 것이, 살아남은 일본인에게 자신들은 전쟁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강한 인식을 안겨주게 되었다. 패전이 체험은 수백만 일본인에게 모든 전쟁에 대한 강한 증오감을 심어주었다. 496

 

신헌법등 다방면에 걸친 단호한 조치는 일본의 사상 환경을 일신하고, 경제적 사회적 힘의 분포를 변화시켰다. ‘민주화열풍이 일본 전체를 휩쓸었다. 민주주의와 평등을 추진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을 창도한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것을, 선거라든가 농지개혁을 넘어선 꽤 넓은 의미로 이해했다. 많은 사람은 민주주의와 평등을 추진한다는 것을 인간의 혼을 다시 만드는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지식인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민주적인 자립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함양하는 것이 가능할까를 둘러싸고 주도면밀하면서도 고상한 논쟁을 벌였다....식량뿐 아니라 지식에 대해서 굶주렸던 많은 사람은 헌책방의 서가를 휘젓고 다니면서 책을 낚았다. 니시다 기타로 전집이나 정치사상에 관한 대저의 발매일에는, 며칠 전부터 대형서점 바깥에서 밤샘으로 줄을 서서 반드시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이 한창 혁신과 개조, 변혁의 화제로 들썩거렸다. 510

 

전전과 전중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학력에 근거한 위계구조는, 그대로 1950년대의 직장과 완전한 대응관계에 있었다. 중졸자는 남녀 모두 장래성이 비교적 한정된 공장노동자로 취직했다. 고졸 남자에게는 적어도 중견관리직으로의 승진이 거의 확실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승진도 가능했고, 숙련을 요하는 생산현장의 기술직, 혹은 사무직으로 취직의 길이 열려 있었다. 고졸 여성에게는 일류기업이 사무실에서 비서나 사무직으로일하는 길이 열려 있었다. 대졸 남성은 기업이나 관청의 엘리트 관리직의 길로 나아갔다....성역할과 학력의 조합에 의해서 사람들은 책임이 경중과 보수의 액수에 따라 몇 층씩이나 뚜렷이 구분된 여러 직종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548

 

종전 무렵 잡지가 겨우 몇 개밖에 없었는데, 그후 몇십 년 사이에 보도 중심의 주간지와 오락 중심의 주간지가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새로운 잡지는 젊은 여성, 젊은 남성, 주부, 성인남성 등 특정 독자층을 겨냥했다. 1960년에는 주간지의 발행부수가 매주 평균 1,150만 부에 달했다. 게다가 신문의 발행부수는 매일 2,400백만 부에 달했다. 같은 해 신간서적은 24천 종, 발매부수는 총 12,500만 권이었다. 이들 숫자를 보면, 일보의 독자는 세계에서 가장 활자에 굶주리고, 독서욕이 왕성한 사람들이었다. 일인당 판매부수로 비교하면, 일본과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웃도는 규모의 출판산업을 보유한 나라는 영국,독일,소련, 미국뿐이었다. 572

 

1950년대 후반 이래 여러 명의 관료출신 정치인이 총리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상호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던 정치인, 기업가, 관료라는 3자로 된 엘리트 집단은 일본의 철의 삼각형이라 불렀다. 자민당이 우위를 점하고 있던 40여 년간은 일당지배의 시대라고 불렀다. 584

 

자민당의 전략가들은 자신의 동맹세력을 키우기 위해 한층 힘을 쏟아부었다. 농촌지역에서 도시로, 농업에서 공업이나 서비스 부문으로 거센 인국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던 그들은, 이 추세가 계속 유지되면 사회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민당은 협조적인노조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근로대중에게 생활의 보장과 생활수준의 향상을 약속하는 노동협약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자민당은 폭넓은 정치적 견해를 허용하는 큰 텐트 형의 정당이 되어갔다. 606

 

일본은 이미 극도로 기업 중심적인 사회로 변용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업에게 좋은 것은 사회 전체에도 좋다고 믿게 되었다. 식자들은 일본적 시스템의 성공을 호들갑스럽게 칭송했다. 일본식 품질관리의 추진자로 저명한 가라쓰 하지메는, 1986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일본은 세계 속에서 실험국가였다. 일본인의 무원칙적인 점 덕분에, 세계의 모든 가설과 제언 등을 여기서 테스트하는 것이 가능했다...유럽적 발상의 원점의 하나인 데카르트에게대들 정도의 일을 하지 않고는 이상한 사태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642

 

여당인 자민당은 두 종류의 정치가들에 의해 인도되었다. 한 그룹은 지방, 특히 농촌지역에 탄탄한 기반을 쌓은 정당정치가였다. 그들은 선거구의 농민이나 건설업계 관계자 등을 중심으로 확고한 후원회 조직을 구축했고, 그런 지지자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대신 표를 얻었다. 644 대기업은 자민당의 선거전을 지원하는 정치헌금을 하고, 그 보답으로 자민당의 정책에 의해 이익을 얻었다. 정경관의 철의 삼각형은 너무나 견고해서 거의 부식할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646

 

야당세력의 교섭력이 강해졌다고 해서정치가 크게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1970년대의 정치적인 화해 조정으로의 분위기 속에서, 자민당은 이미 사회복지의 확대라는 야당측의 중요한 요구를 수용해버렸다. 몇몇 중도주의 정당의 등장도 마찬가지로 정쟁의 대립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당시 최대의 야당세력이었던 일본사회당은, 정부 여당에대한 비판에 점점 미온적이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바야흐로 보수적인 활동이야말로 사회당의 최대 공헌이 되었다. 사회당은 이따금 개혁의 필요성을 제창했지만, 정후 민주정체의 현상유지를 옹호했다. 모든 정당의 지도부는 갈수록 안전지향적이 되어, 대담하게 개혁이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1980년에는 중의원 512개 의석 중 세습의원, 즉 전 의원의 아들 딸 소자, 심지어는 증손자가 차지한 의석이 140석에 달하게 되었다. 이들 세습의원의 거의 90%는 자민당 의원이었고, 7% 정도가 사회당 의원이었다. 648

 

1990년대 - 이런 장수화와 저출산이라는 두 경향이 겹친 결과, 일본의 젊은이들에 대한 고령자의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급속히 상승했다. 650 1987년에는, 정부도 희생자의 유족이 보상금을 청구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업무재해의 정의를 완화했다. 과로사 110번에서 받은 상담건수를 토대로, 이 그룹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과로사 건수는 연간 500건에 이른 것으로 추정했다. ...서비스 잔업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풍조가 강했다. 654

 

풍요에 의해 판매 제조 시스템이 점차 유연해지면서, 대중이 바야흐로 자신만의 특별한 흥미와 취미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소집단으로 분할되는 현상, ‘대중의 마이크로화가 진행되었고, 다양한 의미에서 논쟁을 벌였다. 655 사람들이 맹렬사원에 의해 대표되고 있는 사상, 교육마마에 의해 공부로 내몰리는 아이들에 의해 대표되는 사회사상, 즉 높은 지위를 목표로 대단히 노력하는 생활방식을 우스꽝스럽다고 보는 것, “평균적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생활하는 방식이 가능하다면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것을 쓰루미 슌스케는 칭송했다. 656

 

고도성장기에 진행된 사회적 균질화 추세를 역전시킨 두 번째 움직임은 교육분야에서 나타났다....높은 일류 국립대학이나 사립대학 진학률을 자랑하는 사립고교와 심지어그런 고교에 직결하는 부속의 초중학교의 평판이 자연스레 높아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런 유명한 사립 진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학원까지등장했다. 입시경쟁에서 이기는가 지는가는, 부모가 부자인가 아닌가에 아주 크게 좌우되었다. 일류대학에서 부유한 가정 출신의 학생비율은 급격히 증가했다. 657 땅값은 튀고, 투기는 겉잡을 수 없었다....위험하고 지속 불가능한 투기적인 거품이 생겼음을 쉽게 알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호시절이 언제까지나 계속 될 거로 생각했다. 659 1990년에는, 1980년대의 투기적인 버블이 요란하게 깨지면서 10년이 넘게 지속되는 경제불황이 시작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인은 수십 년동안 중간층의 생활방식을 폭넓게 공유한 것으로 유명했던 나라가, 점증하는 사회적 분열에 의해 교란되고 있는 현실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청년층과 노련층, 부자와 빈자, 일본인과 외국인,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기성종교와 신흥종교의 대립과 갈등이 일본사회를 점점 분열시키고 있었다. 666

 

대학진학을 원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경쟁이 줄어들자, 일본정부는 대학들이 국고보조금을 받기 위해 경쟁을 벌이게 함으로써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정부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사례를 모방하여 100여 개에 달하는 일본의 국립대학을 독립행정법인으로 전환시키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초중등 교육이 여러 가지로 비판을 받자 학업부담을 줄이면서 선택권을 주기위해 교과목을 축소했다.....2000년대 초반에는 교사가 학생들을 통제하지 못해 수업을 아예 할 수 없는 상황, 즉 학급붕괴가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2006년 소학교 학급의 8-9%가 붕괴되었다고 추정했다. 670

 

볕뉘.

 

1. 자민당이 사회당에게 총리직을 제안하면서 연정을 한다. 그 뒤로 사회당은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국민들은 사회당에서 등을 돌리게 된다. 자민당 내부의 분열도 있었지만 특유의 철의 동맹과 중소사업자, 농촌의 침투성을 그들의 지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정치-사회적 출구를 잃어버린 그들은 팬덤과 팬심이 정치색을 가미한 오락거리에 심취하여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2. 삶도, 정치도, 문화도 자기 길을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사회적인 분위기의 확보가 관건이 될 것이다. 10-15년의 격차. 제발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일본 현대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복기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판박이처럼 삶을 배껴 살고 있는지 말이다. 그 틈새 또 다른 가능성도 되짚어보면 좋을 것 같다.

 

3.

  옆의 책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자민족, 자중심에 갇히는 순간 거꾸로 우리는 서로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전쟁은 늘 도나 모였다. 평화를 위한 전혀 다른 사유가 필요한 듯 싶다.

 

 

 

4. 도올의 차이나도올을 보고있는데 살짝 걱정된다. 고구려 패러다임이나, 동이 중심주의일까 우려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이삼성교수의 내륙아시아와 중화주의 개념을 달리보는 관점도 유념해서 보면 좋을 것 같다. 곧 도올 중국사도 새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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