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철학적으로 가정되었던 단일한의지로서의 인민이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점이다. 우리는 국가가 규정하는 인민(‘선거용 인민’)의 바깥에서 자신의 권력을 요구하고 선언하는 다른 인민의 존재를 목격한다. 그것은 국가적 제한에서 배제된 비실존의 인민’, 거리와 광장에서 자신의 존재를드러내고, 권력 집단과 거대 자본에 대항하는 싸움 속에서 형성되는 모호한 인민이다. 우리는 그 인민을 바깥의 인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바깥, 국가의 바깥, 제도의 바깥, 권력의 바깥에서 포착되는 인민에 대한 성찰로 채워져 있다. 단일하고 통일적인 인민을 사유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이 책의 저자들은 어떤 잠재적 인민,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적 다수의 구성으로서의 인민, 인민에서 배제된 인민 바깥의 인민, 인민의 내재적 예외로서의 인민에 대해 말한다.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들은 인민의 현재적 한계와 또 다른 인민의 가능성을 성찰한다.

 

바디우는 정체성에 의해 봉인된 인민이 의미가 있는 경우는 외세의 식민지적 침략에 맞서 해방을 쟁취하고자 하는 정치적 과정에서 형성되는정체성이 문제가 되는 상황뿐이다. 오늘날 국가에 의해 추인되고 국민 형용사를 통해 봉인된 인민은 단지 선거에서만 의미를 갖는 잘 길들여진 인민, 중간 계급으로서의 인민이라는 것이다.

 

버틀러는 실질적인 인민 주권의 실행이 거리로 몰려나와 집회를 통해 우리를 만들어내는 우리, 인민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발화의 실천은 수행적인 실천이라고 말한다.

 

디디-위베르만은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다시금 재현되는 인민들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진정한 인민의 모습, 여러 인민들의 모습은 감각적인 것으로의 재현을 통해서만 그때그때 인식되는 것이다....‘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야말로 사람들이 감동하기 시작하고, 사유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미적-정치적 사유는 바로 그러한 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지배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적 인민의 이념을 군중의 위험한 이미지와 결합시킴으로써 현재의 의회 민주주의를 정당한 것으로 강변하는 일이다. 그 군중은 우리를 전체주의로 몰고 갈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무분별한 인민’, 포퓰리즘의 인민은 위험한 것으로 낙인찍는다는 것이다.

 

영웅에 대한 목마름의 신화 그 배후에는 일반화된 정신적 부패가 있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일반화된 자본주의적 욕망이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경제적 불안정을 일소하여, ‘를 잘살게 해주는 것이고, 나와 내 가족의 안전, 그리고 사회의 안정을 위해 강력한 치안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노동3권과 같은 기본권의 유린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러한 욕망을 위해 민주주의를 정지시키는 것쯤은 받아들일 수 있다. ....파시즘은 현재의 민주주의적 과두정을 극복하는 대안이 결코 될 수 없다. 수동적 인민을 필요로 한다는 점 이외에도,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정치라는 점에서 그 둘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사람들은 이념없는 삶’,‘생각 없는 삶속으로 황급히 도피하는 것이다...그러한 이해관계의 정치는 민주주의적 과두정과 파시즘을 모두 아우르는 절대적인 정치 원칙으로 남는다. 188-198

 

볕뉘. 메모 겸 흔적을 남긴다. 정치에 대한 감각이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 스타에 얽매여있거나 정당정치에 매여 있어 옴짝달싹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싱싱한 정치사유의 날 것은 그 선입관에서 벗어나는 데부터 시작할지 모르겠다. 직접 만드는 맛, 하는 맛...그런 것이 멋있게 보이는 것. 맛과 멋은 일상에서 바텀 업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탑다운이 아니라.... ...인민, 국민, 주권에 대한 뭉음을 던지지만 스타와 영웅을 바라기만 하는 국민들의 시선 속에서는 자랄 수 없다. 인민은 없다라는 사유에서 재구축되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