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와 정체성을 둘러싼 모든 논란의 당사자들은 각자의 전형적 공격성과 공포를 포함하는 동일성과 차이의 필수적 균형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모든 구성원을 최대한 똑같이 만들고 싶은 사회는 최대한 큰 차이를 만들려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38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보면 정체성 발달은 이중의 위험을 안고 있고, 이는 항상 공격성으로 귀결된다. 동화가 너무 일방적으로 진행되면 똑같은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 탄생하고, 모든 공격성이 바깥을, 다른 집단을 향하도록 조절한다....두번째로 집단 형성의 측면이 너무 약해 구분과 개인주의가 너무 강조되는 경우에 나타난다. 경쟁심, 사회적 고립, 고독이 초래된다. 이를 두고 거울상을 향한 나르시시즘적 공격성이라고 부른다. 결과는 질투를 유발하는 끝없는 좌절이면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공격성이 가까운 주변의 타인을 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9

 

개인의 성격을 그의 정체성 및 타인과의 관계를 보고 판단할 수 있듯 사회 역시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세가지 대립쌍: 가득 찬:텅 빈, 열린:닫힌, 안정된:불안한) - 검열로 구성원들에게 규격화된 서사만 제공하는 사회는 틀에 박힌 인간만 생산한다. 가득차거나 텅비어도 모두 전형적인 정체성 장애를 일으킨다. 브리타니아가 바다를 지배한다는 빅토리아시대 영국인들의 과대망상...보드카에 취한 공허한 러시아인들의 영혼이 그렇다..열린 혹은 닫힌 사회의 극단적인 형태는 늘 과장된 최신 유행만 쫓아다니는 히스테리 인성이다. 그 반대편에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과 정확히 거리를 두는, 전염이 두려워 사람을 피하는 강박 노이로제이다. 마지막으로 안정된 사회와 불안한 사회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지배서사와 관련되어 있다. 지배 서사가 강할수록 교류는 안정되고 더불어 정체성의 형성도 안정된다. 하지만 너무 과도하게 안정되면 사회가 굳어 권위적으로 변할 수 있다. 아도르노가 말한 권위적 인격역시 이에 속한다. 물론 오늘날엔 이런 위험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바우만이 말한 유동적 정체성이 탄생하고, 이런 흔들리는 정체성은 정해진 경계를 넘어 경계성 인격장애로 치닫는다. 불안한 정체성이 쉬지 않고 감정의 변화를 야기하는 질병 말이다. 42-43

 

규범과 가치는 자신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를 대하는 방식이다. 동시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기에 우리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로 보아야 한다. 정체성은 오로지 우리와 외부 세계의 상호작용,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타인들과의 상호작요에 기반을두고 있다. 이런 규범과 가치는 우리의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쉽게 사라질 수가 없다. 둘다 변할 수 있고 또 변하지만 항상 같은 방향으로 변한다. 윤리적 차원의 변화는 정체성 차원의 변화를 일으키고, 거꾸로 정체성 차원의 변화는 윤리적 차원의 변화를 초래한다. 49

 

고대는 윤리를 고유한 성격의 발달, 즉 자아실현과 동일하게 보았다. 이런 본질주의적 인간관은 개인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기독교 시대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다. 윤리는 밖에서, 신의 심급에서 우리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공동체에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그리스 시민 쪽에서 내세의 구원을 바라며 스스로 고행을 택하는 신심 깊은 기독교인 쪽으로 바람직한 인간상이 이동한 것이다. 자아실현이 자기부정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54

 

고대에는 최고의 (자기)인식에 도달한 사람에게 지휘권을 넘기는 편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관점은 전혀 다르다. 지배자는 신의 부름을 받은 자이며 전지전능한 신과 신앙인들 사이에 낀 중간적 위치에 있다. 서열은 명백하다. 신이 모든 것의 위에 군림하며 바로 아래에 신이 선택한 자가 있다. 공동체와 정치적 지휘권은 신보다 아래에 있으며, 국가의 법도 신의 왕국에서 통하는 법에 비추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을 사자 밥으로 던져준 이유도 그들의 신앙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제국의 법을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종교 문제에서는 매우 관대했다. 그러나 국민의 불복종에 대해서는 결단코 참지 않았다. 56

 

칼뱅파와 과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자기 단련은 이상하게도 양쪽 모두에게서 인간적 요소를 몰아냈다. 종교는 인간의 상을 투영하지 못하게 했고, 과학 역시 엄격하고 객관적이고자 했다. 두 경우 모두 자기부정이 필요했다. 과학은 객관적 인식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종교는 신의 진실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말이다. 종교와 과학의 공통점인 유일한 자기인식은 인간은 나쁘고 더럽고 주관적이라는 진실이었다. 이 시대 이후 윤리적 행동이라는 개념은 아직도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자기극복의 뒷맛을 남긴다...프로이트는 질병을 유발하는 그런 윤리의 효과를 깨달은 최초의 학자였다. 61

 

현재 우리는 윤리와 도덕을 고대인들과 다르게 우리의 자연적 성향을 거스르는 외적인 무엇으로 생각한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자연적 성향이 나쁘다는 뜻이다. 둘째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더 놓은 권력에, 만인을 항상 예리한 눈으로 감시하는 전능한 심판자에게 해명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 결과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탈출구를 생각해야 한다. 62

 

아리스토텔레스가 무덤에서 살아나온다면 그는 분명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당장 규범과 가치의 상실을 한탄할 것이다. 전형적인 기독교의 덕목인 사랑, 소망, 민음은 신식 헛소리로 치부해버리고 우리의 분열을 부족한 자기인식의 결과로, 자기부정을 장애로 해석할 것이다. 그리고 즉각 현대인들이 인간의 천성, 인간의 본성을 부인한다는 내용의 글을 쓸 것이다. 이런 현상이 규범과 가치의 상실이 아니라 더 광범위한 사회 진화로 인한 정체성의 변화이며, 이로 인해 고대와는 다른 규범과 가치가 정체성의 구성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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