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전과'와 '요점과 급소' 논법은 바로 교육 현장에서의 '일망타진' 및 '속전속결' 전법이다. 결국 이것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삶의 방정식, 생활철학으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세 살 때 배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던가. 여기서 삶의 전 과목(분야)에 걸쳐 '급소'만 노리고 찾는 비장한 삶의 윤리가 잉태된다. '급소'만을 '요점' 정리하는 식으로 우리는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1.

황우석 사태의 최근 결과는 우리 집단의식의 맹점을 보는 것 같아 위태롭다. 사실 관계가 밝혀지고 있음에도 그 관계는 잊혀지고 황우석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비참함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몽매함이 한덩어리로 뭉쳐 마치 막다른 절벽이나 낭떠러지로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만큼 말이다.

우리의 상식은 어디쯤일까? 우리 사회가 전도된 가치관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작해낸 상식과 우리의 현실의 상식은 얼마만큼의 간극일까? 이런 우매한 물음앞에 어찌 답은 무척이나 간단할 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성찰하거나 돌이켜볼 능력만 있다면 현실과 조작된 상식의 간극을 쉽게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발견해 낸 상식이 각박한 세상과 남의 눈과 경쟁에 이겨야 된다는 생존논리에 어이없이 희석화되거나 묻히는 것은 아닌가?

저자는 1년동안의 캐나다 안식년을 통해 남의 눈과 자신의 눈을 비교할 기회를 가졌다. 단 몇분만에 남과 우리가 어떻게 다른가를 온몸으로 감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한번도 함께 돌이켜생각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맘 속에 넣으려고 하지는 않은 것은 아닐까?

황우석이란 신화에 묻힌 우리의 집단의식은 어쩌면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여 상식을 되살리는거나 폭발직전의 뇌관처럼, 잔뜩 부풀린 풍선처럼 놓아버리면 어디로 날아가버릴 줄 모르는 현실의 경계선에 있는 것은 아닐까? 최소한 외국인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 남의 시선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감각조차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

2.

저자는 가까운 현실을 비교하며 잘잘못을 가리고 우리의 끊어진 양심과 상식을 되살리려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양심과 상식은 비교 가능한 것이고, 우리의 불감증을 되살려주고 건강함을 보여주는 잣대이지 않을까? 우리는 맹목적인 믿음과 실현되기 어려운 꿈에 모든 현실을 맡기는 불감증에 걸려있는 것은 아닐까?

 

3.

황*석을 그래도 난봉꾼 내자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사고를 쳐도 믿는 그런 것으로...

 

4.

'속도전'에 취해 돌아보는 것을 모두 사치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집단망각처럼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모든 시선을 주고, 맘을 주는 어리숙함. 애초에 '돌아봄'은 우리의 취향이 아닌 듯, 도대체 시선은 앞만 향해있고, 자신의 행적에 대해 무감각해져 버린 것은 아닌가? 저자는 지금의 현실을 로마의 폐망직전으로 묘사한다. 사우나와 식당과 환락이 뒤범벅이되어 먹고, 마시고, 즐기고... ...세상은 온통 욕하기 바쁘지만, 자신의 행적에 대해선 객관적 시선을 잃는다. 무한한 관용, 타인에게는 잔인할 정도의 인색함이 우리라고 한다.

050115

5.

피해의식 -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 - 변이 자중심성, 개성이 강하거나 자기 주장이 뚜렷하다거나라는 것과 씨부터 다른 것 같다. 어쩌면 군사문화가 그 책임소재의 8할이상은 가지고 있다고 본다.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본질적인 생활의 논리는 내 위주이다.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으면, 병장의 반경으로 상병-일병-이등병이, 상병의 원으로 일병-이등병이, 일병의 반경으로 이등병이 돌아줘야 움직이는 시스템은 찬란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병장은 쫄병들 누구에게나 뒷담화에 주제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일사분란하게 병장 중심으로 도제가 형성되어있다. 화장실 청소까지? 그런 면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자중심성의 늪에서 도망갈 수 없다. 나는 아니라고 해도, 엄연히 그 포로가 되어 있다.

집단이 성찰해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해도 스캔들, 남이 해도 스캔들이란 바닥을 언제쯤 치고 올라올 수 있을까? 그런 빈틈은 있는 것일까?

6.

환상은 마치 마약과 같아서 취하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지요. 하지만 깨어나면 허탈하기만 합니다. 어제 황우석 박사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금단현상을 이겨내려는 굳은 의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진*권, sbs 창과*패, 1.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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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1-17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우석 교주 (진*권, sbs 창과*패 1.10)







잠시 후 11시에 서울대 조사위에서 황우석 교수 논문조작사건에 대한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듣자 하니 2004년 논문도 조작됐고, 1번 줄기세포도 처녀생식으로 생긴 돌연변이로 확인됐다고 하네요.




그 동안 수없이 거짓말을 해 온 황우석 박사는 아직도 자신이 줄기세포를 만들었으며, 누군가가 그것을 바꿔치기 했다고 주장하는 모양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그 거짓말을 믿어주는 이들이 많다는 거죠.




특히 황박사의 팬들은 논문 조작이 사실로 드러났어도 여전히 그에 대한 믿음을 버릴 생각이 없나 봅니다. ‘휴거’가 오지 않아도 다미선교회는 남듯이, 줄기세포가 없어도 황우석을 믿는 신앙의 공동체는 남지요.




남이야 ‘도널드 덕’을 신으로 모시고 살든 말든, 그거야 물론 헌법에 보장된 신앙의 자유겠지요. 하지만 를 비롯해 황 박사에게 의혹을 제기한 비판 언론과 개인에게 이들이 가한 집단폭력에 대해서는 사과나 해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황 박사에게 다시 재연의 기회를 주자는 얘기가 있네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진작에 할 수 있었겠지요. 다시 연구의 기회를 주자는 얘기도 나오네요. 하지만 논문의 조작으로 학자로서 그의 생명은 이미 끝났습니다. 누가 죽인 게 아니라 스스로 자살을 했습니다.




한 국가의 과학이 발전하려면, 국민들의 마인드 자체가 과학적이어야 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것처럼 경신과 맹신에 빠진 사회에서는 진정한 과학 대신에 사이비 종교가 나타날 수 밖에 없지요.



종교적 욕구는 교회나 절에서 해소하고 과학은 맨 정신으로 해야지요. 좋은 종교들 다 놔두고 우상을 만들 필요가 뭐 있는지 모르겠네요. 아직도 황 박사를 맹신하고 그를 맹종하는 이들을 보면서, 황박사는 과학자가 아니라 신흥종교의 창시자가 되었다면 더 크게 성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울 2006-01-1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섯개 중 하나만 있어도…"
  김민웅의 세상읽기 〈186〉
  2006-01-17 오전 9:15:47
  어떤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인간이 사는 방식과 그 결과는 사뭇 달라집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고 아파하는 눈길로 보는 이와, 함부로 해도 될 만한 상대로 보는 시선의 차이는 진정한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경계선이기도 합니다.
  
  약한 자는 업신여기고, 강한 자는 선망의 대상으로 대하는 사회는 인간성이 파탄 난 곳입니다.
  
  안쓰럽지만 기피대상인 다운증후군 소녀, 온갖 차별의식으로 똘똘 뭉친 대학원 출신의 한 남자, 고통스러운 적응과정을 겪으면서 오토바이 질주 외에는 그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탈북 소년, 운동권 학생을 고문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된 현실을 살아가는 수사관, 그리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버려진 조선족 노동자들의 모습.
  
  국가인권위원회가 다섯 명의 감독들과 함께 만든 〈다섯 개의 시선〉은 우리 사회가 놓치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우리로 하여금 아프게, 그러나 때로는 매우 놀라운 풍자로 마주 대하도록 합니다.
  
  그 다섯 개의 시선은 그래서 우리가 사실은 얼마나 시력이 나쁜 존재들인가, 우리의 시선은 얼마나 엉뚱한 곳에만 집중해 있는가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가령, 술 먹고 횡성수설하는 한 청년은 친구들 가운데 가장 높은 교육을 받았고 가장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자기보다 조금 못하다고 보이면 모두 눈 아래로 깔아뭉개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그런 그 자신이 사실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으며, 결국 그는 외톨이가 되어버리는 현실에 처합니다.
  
  다운증후군의 소녀는 그래도 남보다 낫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발음이 잘 되지 않은 한계를 극복하면서 최선을 다해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남한 사회에서 별종으로 취급받으면서 홀로 하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탈북 소년은 언제든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배낭에 잔뜩 선물을 집어 넣은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늘상 가해자로만 존재하던 한 고문 수사관에게도 가족이 있고, 하루하루의 힘겨움이 있으며 언제 직장에서 밀려나게 될지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운동권 학생에게, 나중에 잘 되면 민주주의니 뭐니 서민들이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 하지 말고 비정규직 문제나 열심히 해결할 생각이나 하라고 합니다. 학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수사관과 학생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오목까지 두게 되는데, 이 오목 놀이가 또 얼마나 포복절도 할 이야기로 이어지는지는 영화 속으로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토록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우리 사회의 외면으로 거리에서 죽어간 한 조선족 동포의 비극은 우리가 얼마나 잔인해져가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지도자라는 이들의 시선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대권을 쥐고 있거나, 또는 쥐려는 이들의 눈길에는 무엇이 보이고 있을까요?
  
  이 사회의 고통에 대해 아파하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여기지 않으며, 어떻게든 보살피려 안간힘을 쓰지 않는 이들이 권력의 의자에만 앉아 있거나 권력만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만 같으니, 민초들이 어디 정치를 거들떠보기나 하겠습니까?
  
  다섯 개의 시선 가운데 단 하나만 있어도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할 텐데 말입니다.
   
 
  김민웅/프레시안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