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뻐끔뻐끔 숨을 몰아쉬는 물고기들은 아닌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란 물을 다시 삼키다
물고기는 물밖으로 튕겨나온 뒤에야 물의 존재를 알 수 있다. 패인 수레바퀴 자국의 남은 물기로 온몸을 버둥거린다. 하루하루 일상은 어김없이 다시 온다. 왜 사느냐는 물음도 사치이고, 힘겹게 견디는 나날이 버겁다. 우리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건조해지기만 한다. 그런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전제를 다시 한번 의심할 수 있을까? 삶이 목전에 위협을 느껴서야 다시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삶들을 비틀면서 감싸고 있는 물기축축한 사회의 존재를 다시 한번 의심해볼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낙인처럼 패여있는 수레바퀴 안, 뻐끔뻐끔 숨을 몰아쉬고 있는 물고기들은 아닐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를 그렇게 외치고 불렀건만 과연 무엇이 나아졌으며 우리는 국민이기나 한 것일까? 선거때만 돌아오는 주권은 있기나 한 것일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민의와 사회의 돌아가는 시스템 사이의 간극, 차이, 괴리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것은 아닌가?
거시적인 안목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나만 잘먹고 잘살고, 우리가족 밥벌이 하기도 힘든데 왜 통찰을 가져야 한다고 주제넘은 소리를 들어야하는가? ‘지금여기’를 300여년의 호흡으로 조금 떨어져서 다시 본다고 나아지는 것은 있을까?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어 분노의 나날을 지내는 것보다는 생산적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의 포화 속에 저자들은 이 질문과 박제화된 삶들을 분별해내게 할 수 있을까?
두 저자의 목소리는 남다른 데가 있다. 고병권 저자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되삼키고 있다. 또 한 저자는 “항아리 속에선 항아리를 볼 수 없다”라는 맑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본주의를 모르면 자본주의에 당한다고 경고한다.
현재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지는 이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마키아벨리가 여러 공국의 정치가로 조언을 하던 시대가 아니라 단일한 국가를 만들면서 법위에 존재하는 주권을 그려내고, 단체별로 조합별로 각각 힘이 다른 집단의 단결을 금지하면서 동등한 인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한다. 보댕, 홉스, 루소는 토지와 마을에 귀속되는 개인이 아니라 홀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법적으로 분리된 개인화가 되는 과정을 발명해내고 균질한 통일된 인민을 셀 수 있게 되기까지 끊임없이 사유했다. 그리고 그 사상을 토대로 근대국가가 발견되었다. 그 한가운데 외톨이가 된 개인은 사회계약이나 맹약이라는 형태로 자신이 권리를 양도하는 상상의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단결할 수도 없는 개인의 존재임과 동시에 국가의 인민이 되어가는 과정과 연결된 것이다. 그 과정은 동시에 국민이 되는 것이었다. 필연적으로 크고 힘센 짐승같은 민주주의의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대의제인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여기 민주주의의 속성과 같은 시작이며 아무런 해결도 할 수 없는 현재 민주주의의 봉착점이기도 하다고 한다. 봉건주의, 절대군주시대와 달리 법위의 힘인 주권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균질화된 인민이 법적인 힘을 갖고 대표를 통해 권한을 행사하는 것, 주권=인민=대표체계는 대의민주주의제의 출발이면서 자본주의의 탄탄한 지반을 다지는 것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그물망에서 ‘난민’은 국가도 없고 주권도 없고 국민도 아니면서 대표할 수 있는 민주주의도 없는 존재이다. 살아있으되 아무런 주권도 법적인 힘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추방되는 이주노동자도, 선거권도 없는 청소년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비정규직도, 선거때면 선거하지 않는 유권자는 결코 대의될 수 없는 것이 보고 있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이 그물에 빠져나가는 ‘사이존재’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현 대의민주주의 그물에서 대표될 수 없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하수구에 빠진 채 민주주의의 밧줄을 잡을 수 없다.
발라낸 개인으로 성장한 자본주의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미시적인 접근으로 그 많은 변화를 헤아릴 수가 없다.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은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 수많은 경제행위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에게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자본주의의 삶밖을 보고자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연구만한 시각이 없던 것이다. 『위험한 자본주의』라는 책은 저자가 맑스의 자본론을 40여년간 연구하면서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여 대학생들에게 쉽게 강연한 것이다. 그 사유와 연구를 통해서 현재의 자본주의가 얼마나 세계화하면서 국지적으로 구도를 바꾸고 있는지 보여준다. 최근 TPP의 경제협력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은 공적연금의 민간보험화와 대학교육의 세계적인 균질화와 시장화에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틀내에 어떻게 한계지을 수밖에 없는지 그 이력들을 세세하게 밝히고 있다.
두권의 책을 통해서 독자가 작은 통찰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 삶의 전제가 되는 민주주의 시스템과 300여년 움직여온 자본주의를 얼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는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의 전제가 되는 자본주의-민주주의 경계에 대한 시선을 놓치고선 좋은 삶도 함께하는 삶도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후배 고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 그중에서도 너를 제일 사랑한다. 부디 공부 좀 해라. 공부를 지독하게 하고 나서 지금의 그 발랄한 생리와 반짝거리는 이미지와 축복받은 독기가 죽지 않을 때, 고은은 한국의 장 주네가 될 수 있다. 철학을 통해서 현대공부를 철저히 하고 대성해라. 부탁한다.”
비교적 얇고 서술하는대로 읽어나가면 금방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를 수 있다. 그대 독서에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 세상을 보는 눈도 이 시선들로 인해 조금이라도 초점이 맞추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저자들의 무등에 타고 잠깐이라도 멀리 바라보며 안타까운 시선을 느낄 수 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