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방식은 삶의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죽음이란 자기를 버리는 하나의 형식이며, 이 형식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살아 있는 동안 예행연습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은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지평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일 뿐이다. 38
자유낙하라는 소설은 ‘추락’이 인간의 자유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곤궁과 착취하고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간파한다. 추락은 우리 인간이 자가당착에 빠진 동물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간이 자가당착에 빠진 동물인 이유는 창조력과 파괴력이 똑같은 원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언어를 쓰는 동물은 신적인 창조 능력을 획득한다. 그러나 창조의 강력한 원천이 대부분 그렇듯 이 능력은 근본적으로 위험하다. 언어를 지닌 동물은 지나치게 빨리 발전하다가 한계를 넘어 자기 자신을 무화시킬 위험에 늘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45
인간의 의미화 능력에는 엉뚱한 길로 빠질 끊임없는 가능성이 탑재돼 있다. 옆길로 샐 가능성이 없는 이성은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자유에 파멸이 내재해 있는 셈이다. 48
악을 ‘인간 조건의 바뀌지 않는 존재론적 특성’으로 여기고 싶은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유혹에 빠지는 일은 인간이 악 앞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자인하는 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하고 공존해야 한다....질병도 연속성이 있지만, 의사들은 질병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운명론적 체념에 빠져 치료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54
악은 자기가 완전히 독립적이며 무에서 홀연히 나타났다고 믿지만, 사실 악은 혼자 생겨나지 않았다. 악 이전에는 늘 무엇인가 먼저 존재했다. 이것이 악이 영원히 비참한 이유 중 하나다. 82
파시즘은 타도해야 마땅하지만,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휴머니즘에 파시즘 타도라는 과제를 달성할 능력이 있을까? 결국 자유주의도 고매한 이론처럼 허약한 신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인류의 사악함을 교양 철철 넘치게 혐오하며 외면하는 자유주의나 휴머니즘 따위의 신념으로 어떻게 파시즘을 쳐부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방법은 이열치열, 곧 악을 포용함으로써 격파시키는 방식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모더니즘은 둘 다 자유주의적 휴머니즘보다 위험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파시즘 만한 깊이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다. 89
모더니즘과 파시즘은 모두 원시와 진보를 통합하려 한다. 정교함과 자연스러운 충동, 문명과 대자연, 지식층과 민중의 통합이 목적이다. 현대 기술의 추진력은 전근대의 ‘야만적’ 본능에게서 동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합리주의적 사회 질서를 내던져버리고 ‘야만’의 자연스러움에 깃든 뭔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새 미개함이 옛 야만하고 다른 점은 바로 자의식이다. 92
악은 인과율을 거부한다. 목적을 고려해야 하는 악은 자아 분열에 빠지고, 정체성이 파괴되며, 처지에 안 맞게 너무 앞서가는 꼴이 된다. 그러나 무는 이런 방식으로 분할되지 않는다. 무가 시간 속에 있을 수 없는 까닭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시간은 차이의 문제인 반면 악은 지루할 만큼 영원히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108
오셀로는 수수께끼의 핵심을 뽑아내자는 생각에 빠져 애초에 수수께끼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115
악은 순수한 도착이다. 악은 일종의 장대한 우주적 심술이다. 악은 불의를 숭앙받을 만한 업적으로 만들려고 기성의 도덕적 가치를 뒤집겠다는 주장을 하지만, 정작 자기는 도덕적 가치나 업적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악이 은폐하던 비밀이다. 119
대개 누군가를 대량 학살로 치닫게 하는 부류의 타자는 어떤 이유에서건 자기의 자아 심층부에 자리한 끔찍한 공허를 드러나게 하는 자들이다. 이 경우 그자는 이 고통스러운 부재를 물신, 도덕적 관념, 순수성이라는 환상, 광적 의지, 절대 국가, 총통의 남근 이미지로 채우려 한다. 이런 면에서 나치즘은 다양한 부류의 근본주의를 닮았다. 타자를 제거하는 도착적 쾌락은 자기의 건재를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정체성 중심부의 공허는 죽음의 전조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려면 당신의 자아에 이런 투라우마를 구현하는 자들을 일소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심지어 이론상의 정복도 불가능한 죽음이라는유일한 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126-127
지구상의 유대인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 나치에게 매혹적인 계획이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 일이 미적으로 완벽하다는 점이었다. 완벽한 파괴라는 관념에는 악마적 환희가 있다. 결함과 미진한 결말과 조잡한 근사치 따위는 악이 못 견뎌하는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악이 관료주의와 태생적으로 친밀한 이유다. 반면 선은 사물의 얼룩덜룩함과 미완의 성질을 사랑한다. 128
악은 삶에는 어차피 아무 가치도 없지 않느냐고 귓가에 속삭임으로써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거짓 위안을 준다. 늘 그렇듯이 악의 적은 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가 잘 알고 있던 대로, 악이 선의 면전에 침을 뱉는 이유는 선이야말로 단연코 가장 충만하면서도 가장 깊이 향유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134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사악함을 기뻐하는 자들을 ‘파괴적 기쁨과 비참한 행복’을 느끼는 자들이라 묘사한다. 이것은 이른바 현대식 용어로 도착적 쾌락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139
알코올 의존자는 절망한다. 그 사람은 출구라고는 없어 보이는 갈망과 자기혐오의 영원한 회로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비유하자면 일종의 지옥에 살고 있는 셈이다. 143
절망에 빠진 자들은 자멸적일 뿐 아니라 오만하다. ...절망의 증거야 말로 이자들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며, 이자들이 자기이기를 바라는 이유, 고통에 빠진 자기가 되려는 이유다. 145
악은 재치도 임기응변의 수완도 전혀 없기 때문에 큰 슬픔이나 환희나 격정을 마주하면 아장아장 걷는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한다. 악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이유는 믿음을 가질 만큼 충만한 내면의 삶을 갖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지옥은 형언할 수 없는 추한 것들의 현장이 아니다. 지옥이 그런 곳이라면 차라리 들어가겠다고 자원할 가치가 있으리라. 154
아퀴나스는 악을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결핍이라 여긴다. 아퀴나스에게 악이란 결핍이며, 부정이고, 결함이며, 상실이다. 악은 일종의 기능 부전이자 존재 심층부의 결함이다....고통이란 삶의 충만함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다. 155
악은 물질이나 세력이 아니다. 악을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포 영화처럼 악을 물신화하는 짓이다. 악은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속성이지 우리 너머의 어떤 외계 세력에게서 솟아나오는 무엇이 아니다. 또한 악이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이유는 악 자체가 인간의 자유가 가져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악이란 ‘존재로 더 충만한 것이 존재가 결핍된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다. 이런 면에서 악은 일종의 영적 슬럼화다. 156
악한은 삶의 기술이 결여된 자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삶이란 색소폰 연주하고 같아서 끝없는 연습을 거쳐 능숙해져야만 한다. 악한 자들에게 삶이란 요령부득의 문제다....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이런저런 면에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고장 난 존재다. 그렇지만 악한 자들이 삶의 기술에 엄청나게 무지하다면 나머지 우리들의 수준은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158-159
악은 몇몇 악의 실행자들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만큼 엘리트주의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악이 천지에 만연해 있다는 식으로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도 안 된다. 금전 이득을 얻으려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핵무기를 사용할 채비를하는 따위의 평범한 악이 순수한 악보다 훨씬 더 만연해 있다. 악은 잠 못 이루고 애태워 걱정해야 할 만큼 특별한 것이 아니다. 160-161
신이 악을 허용하는 이유를 따져 묻는 짓은 신을 합리적이거나 윤리적인 존재로 여기는 처사인데 신은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신을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일은 외계인이 삼각형 초록색 눈을 가지고 유황을 들이마시는 격이다....이런 식의 묘사는 빈약한 인간의 상상력만 부각시킬 뿐이다...기껏해야 신을 인간의 형상을 본떠 왜소하게 만들려는 맹목적 계몽주의 관점일 뿐이다. 신은 인간 논리의 범위 안에 가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176
많은 악은 나태와 두려움과 탐욕과 집착 등 고요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며 딱히 남부끄러울 것도 없는 동기에 따라 야기된다. 178
역사
헤겔은 역사를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지혜와 개인의 미덕이 희생되는 도살장’이라 봤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 속 행복의 시대는 텅 빈 페이지들이다. 또한 헤겔은 ‘악과 부정과 인간 정신이 창조한 가장 번영한 제국의 몰락’, 그리고 ‘인간 존재의 형언하지 못할 불행’에 관해 이야기한다.....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서의 행간에서 눈물과 아우성과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소리와 공포에 질린 대중의 비명과서로 죽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인간사의 ‘영원한 불행’에 관해 쓴 테오도르 아도르노 또한 견해가 똑같았다. ...인간 문명은 대부분 약탈과 탐욕과 착취의 역사였고,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다. 183
인간은 윤리적으로 모호하고 선악이 뒤섞여 있는 잡종이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왜 선이 정치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빈도가 그렇게 낮을까? 분명 사회사와 정치사의 성격, 곧 구조와 제도와 권력 절차의 특징 때문이다. 184
많은 부도덕한 행동이 물적 제도하고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원죄가 인간만의 잘못이 아니듯 그 행동이 전적으로 부정을 저지르는 이들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실 나는 원죄 교리를 유물론식으로 이해해보자고 제안한 셈이다. 행위란 행위자가 사악하지 않아도 사악할 수 있다. 선도 마찬가지다. 악당도 이따금씩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선행은 분명 선인보다 중요하다. 188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을 놓고 신뢰할 만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절망적일만큼 일그러진 조건 속이 아니면 인간을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조건이 달랐다면 인간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조건을 겪어보지 못했는데 당연하지 않는가....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야말로 따분할 정도로 끈질긴 착취라는 주제의 이런저런 변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종들을 돌파해 진정한 역사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가 어떤 윤리적 성분으로 구성된 존재인지 알아낼 기회를 갖게 된다. 분명 입맛에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마땅히 인간은 결국 내내 괴물이었다는 사실만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자원을 향한 끝없는 투쟁이나 잔인한 권력의 강제에 따른 시각의 왜곡 없이 자기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자리에는 서게 될 것이다. 190-191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정치 개혁에 더 큰 위협을 제기하는 요소는 악몽 같은 역사에 관한 인식이 아니라 무분별한 진보주의다. 193
이 책의 관점에서 보면 9.11 테러는 ‘악’이라기보다는 ‘부정’이며, 이런 구분은 궤변을 훨씬 뛰어넘는 논거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실로 인류의 안정과 생존은 악과 부정 사이를 구별하는 데 달려 있다고 판명될 것이다. 악한 자들의 파괴 행동은 설득으로는 막을 수 없다. 이 사람들이 하는 짓에는 합리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악한자들은 사람들이 사안을 보는 데 쓰려 하는 합리성 자체를 문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반면 합리적이거나 심지어 훌륭한 목적을 성취하려고 뻔뻔스러운 수단을 쓰는 사람들하고는 이론적인 논쟁이 가능하다.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