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제 목
저 자 이근
출 처 미래전략연구원
발간일 2005/12/19
출간형태 보고서
종 류
    
목 차
[선진화 담론의 허구]
[“난자기증, 원천기술 담론”의 후진성과 개발독재의 유령]
[정부 대응의 후진성과 소프트 파워의 실추]
[우리의 영웅과 희망은 황우석이 아닌 젊은 자연과학도였다]
요 약
근대화, 민주화 담론 이후에 주류 정치세력과 주류 언론에 의해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구호가 “선진화”이다. 선진화는 아직 담론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근대화는 근대를 목표로 하고 있고, 그 근대의 내용이 무엇인지 대부분 합의를 하고 있다. 민주화는 민주를 목표로 하고 있고, 그 민주의 내용이 무엇인지 대부분 합의를 하고 있다. 선진화는 선진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 선진의 내용이 무엇인지 대부분 모르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선진화는 아직 담론이라기보다는 실체 없는 단순한 “구호”이다.

필자는 이글을 통해 황우석 사태에서 드러난 “선진화 세력”의 “후진적 담론”을 따져보고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러한 담론에 동조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모든 선진화 세력을 똑같이 보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태에 대하여 방관자적, 기회주의적으로 눈치만 본 정치, 언론 세력, 그리고 적극적으로 선진화를 주도하지 못한 정치, 언론 세력들은 역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기존의 선진화 세력임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이 사태에 대한 진정한 반성 없이 스스로 선진화세력이라고 다시 주장하는 또 한번의 무책임성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본문내용
[선진화 담론의 허구]

근대화, 민주화 담론 이후에 주류 정치세력과 주류 언론에 의해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구호가 “선진화”이다. 선진화는 아직 담론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이름은 멋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아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딱 부러진 설명을 해 주지 못하고 있다. 만약 2만불 시대를 달성하자는 것이라면 선진화는 고작 돈으로 환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법치를 통하여 확립하자는 것이 선진화라면 이는 근대화, 민주화와 별 다를 것이 없다. 아니면 선진국에서 이러 저러한 것을 배워오자는 것이라면 아직 무엇을 왜 어떻게 배워야 할 것인지 그 누가 뚜렷한 원칙과 철학을 제시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선진화는 아직 담론이라기보다는 실체 없는 단순한 “구호”이다.

이러한 선진화를 가장 앞서서, 자랑스럽게 외친 것이 한국의 여야를 막론한 주류 정치세력과 주류 언론들이다. 앞에서 지적하였지만 무엇인 선진화인지, 무슨 철학과 원칙을 가지고 선진화를 추구하는지 스스로 확신이 없지만 뭔가 국민을 끌어당길 화두가 필요해서 일단 던지고 본 구호가 아닌가 싶다. 근대화는 근대를 목표로 하고 있고, 그 근대의 내용이 무엇인지 대부분 합의를 하고 있다. 민주화는 민주를 목표로 하고 있고, 그 민주의 내용이 무엇인지 대부분 합의를 하고 있다. 선진화는 선진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 선진의 내용이 무엇인지 대부분 모르고 있다. 다만 앞으로 나가는 것이 선진임을 알 뿐이다. (근대와 민주는 대상이 되는 명사인데 선진은 어떤 그 무언가의 대상을 향해가는 동사가 아닌가?)

그런데, 최근 황우석 사태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서, 선진화를 외치는 주류 정치세력 (정부를 포함한)과 주류 언론들이 진정 선진화를 외치는 그들이었는지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이들의 언행은 선진화가 아니라 근대보다도 훨씬 뒤 떨어진 가장 후진적인 것이었다. 역시 이들은 아직도 선진화의 내용에 대한 충분한 철학적 천착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정작 가장 선진적인 대응을 했어야 할 사안에 대하여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하게 대응하였는지, 항상 그래왔지만 또 다시 “혹시”가 “역시”가 되는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도 “선진화”의 내용에 대하여 천착을 하지 못하고 있고, 단 한번도 “선진화”를 주장해 본 적이 없어서 “선진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다만 필자뿐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발전을 희망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선진적이지 않은 것” 혹은 “후진적”인 것이 무엇인지일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황우석 사태에서 드러난 “선진화 세력”의 “후진적 담론”을 따져보고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러한 담론에 동조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모든 선진화 세력을 똑같이 보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태에 대하여 방관자적, 기회주의적으로 눈치만 본 정치, 언론 세력, 그리고 적극적으로 선진화를 주도하지 못한 정치, 언론 세력들은 역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기존의 선진화 세력임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이 사태에 대한 진정한 반성 없이 스스로 선진화세력이라고 다시 주장하는 또 한번의 무책임성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난자기증, 원천기술 담론”의 후진성과 개발독재의 유령]

우선 이번 사태에서 가장 후진적인 담론은 “난자기증”과 “원천기술”의 담론이다. 자발적으로 기증한 난자,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상징적인 보상은 한국적인 윤리기준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담론, 그리고 마치 금융위기 당시 금모으기에 비견되는 난자기증 열풍에 대한 예찬 등은 여성인권과 난자추출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위험성, 그리고 생명에 대한 비윤리성이 철저히 무시된 매우 “선진적이지 않은” 담론들이었다. 이에 대하여 선진화 정치세력들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을 주도하고, 개탄을 하는 경우를 전혀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러한 논리를 정당화하거나, 부추기는 역할을 한 인상마저 갖게 한다. 거꾸로 평소에 선진화를 줄기차게 외치지 않았던 소위 비주류의 정당과 언론이 가장 선진적인 주장과 보도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불행하게도 정부를 포함한 여야의 선진화 세력, 그리고 주류 언론들은 아직도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합리화 될 수 있다는 과거 개발독재 시절 논리의 여운을 남기는 “무서움과 공포”를 재현하였다. 여성인권, 생명에 대한 윤리, 그리고 여성 개개인의 안전에 대하여 이렇게 무책임한 언행을 하거나, 이를 방관하는 지도층이 어떻게 선진화세력이 될 수 있는지 정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로는 “원천기술”이 있으면 이것이 바이오산업의 미래와 국익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보유한 사람과 팀은 도덕적, 학문적, 절차적 하자가 있어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또 한번의 후진적, 개발독재적인 담론이다. 선진국의 특징 중의 하나는 절차적 진실성(integrity)과 정직성이다.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지도자의 위치에서 바로 추방되며 기존에 주어졌던 모든 기득권은 박탈당한다. 물론 재기할 기회는 주어지지만 그것은 사회적 관용에 의한 재기의 기회가 아니라 전적으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며 대부분의 경우 재기에 성공하기 어렵다. 그만큼 절차적 진실성과 정직성이 중요하며 일단 이러한 문제가 드러나면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은폐할 수 있다면 의혹만 제기된 채 넘어갈 수도 있으나, 사회가 투명해 지면서 이러한 은폐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러한 면에서 정보조작, 인권침해 방치를 정당화하는 최근의 미국은 선진국에서 후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에 대한 건전한 비판세력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한다.)

황우석 사단은 현재 진행 중인 서울대학교의 검증과정에서 틀림없이 밝혀질 것으로 믿지만 학문적, 절차적 진실성의 면에서 너무나 많은 의혹을 남기고 있다. 특히 2005년 사이언스지에 기고된 논문의 데이터 조작은 이미 거의 사실로서 드러나고 있으며, 황우석 교수의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관계자, 주류 선진화 정치세력과 언론은 얼마 전 까지 “원천기술”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 국익을 위해서는 그 정도의 진실성의 하자는 이쯤에서 “덮고 가자”,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황우석 팀을 살리고 지원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성과만 있으면 그 과정상의 조작과 진실의 왜곡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매우 후진적인, 개발독재의 담론이 다시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주류 언론이 보여준 근거 없는 오보와 의도적 기사 조작, 사설, 칼럼 등은 정직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분개시켰다. 도대체 이 땅의 선진화 정치세력에게 있어서 절차적 정직성, 도덕성은 이렇게도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주식시장에서 큰 돈만 벌 수 있다면 내부정보를 통하여 비정직하게 투자를 해도 괜찮은 것인지,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범법을 하여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지,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치인을 매수해도 괜찮은 것인지, 국익을 위해서라면 정직성, 도덕성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다. 이들이 어떻게 일반 국민들과 학생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라고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이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면서 “봐라 결과는 우리가 이기지?”라고 거리를 활보한다면 한국의 선진화는 어떻게 달성될 것인가?


[정부 대응의 후진성과 소프트 파워의 실추]

이러한 전 과정에서 가장 실망을 금치 못하게 한 것은 정부의 대응이다. 참여정부 역시 선진화를 주장하였다는 면에서 위에서 언급한 “선진화 정치세력”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한 후진적인 담론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처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민주화를 달성하고 개혁을 강조하는 정부와 여권이 황우석 교수 사태에서 제기되었던 다양한 문제인 생명윤리, 여성인권, 국민의 안전, 도덕성, 정직성, 과학적 연구에 있어서의 진실성의 위반 등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반응을 보여주었던 것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정말 선진적인 정부이고, 또 선진화를 추구하는 정부라면 황우석 팀의 진실성과 정직성에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 순간 정부의 연구 지원 원칙과 사후 처리의 방향에 대하여 진실성과 정직성에 근거한 선진적인 원칙과 입장 발표가 있었어야 했다.

과정상의 하자보다는 오히려 원천기술을 강조하며 정직하지 못한 학자를 비호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줌으로써 현 정부는 도덕성에 있어서 국제적으로 치명적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이렇게 도덕성과 선진적 규범의 위반에 관대한 정부가 어떻게 동북아시아에서 중재자, 균형자 역할을 하고, 신뢰구축을 하고, 어떻게 소프트 파워를 사용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특히 한국정부는 북한인권이라는 인류보편적 가치에 대하여 적극성을 보이지 않아서 국제적으로 한국정부의 가치지향에 대하여 의심을 받고 있다. 또한 현정부가 가장 중요시하는 외교사안 중의 하나인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하여는 인류보편적 가치의 잣대를 적용하여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외교적 문제를 보완․강화하기 위하여, 정직성, 진실성(integrity)과 같은 보편적 규범과 가치에 대해서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단호하게 나갔어야 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나가 국제적 신인도를 더욱 하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과적으로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일은 이러한 후진성으로 인하여 소위 선진화 정치세력이 약자와 장애인, 보통사람들의 희망을 부풀리고, 결국 저버리게 된 것이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였다면, 진정으로 절차적 투명성과 평가과정을 강화했다면, 조금만 정치색을 배제했다면 이들의 절망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필요이상으로 기대를 부풀려 놓고 이제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다시 정치적으로 특정인에게만 전가하려 한다면 진정한 선진화 세력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사태를 선진화세력이 다시 태어날 (born again) 계기로 삼는 것이 오히려 정도를 걷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영웅과 희망은 황우석이 아닌 젊은 자연과학도였다]

모든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이지만 황우석 사태의 과정에서 발견된 희망은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의 활약과 비판세력의 존재이다. 필자도 이 과정에서 프레시안과 BRIC, 그리고 과학갤러리 웹사이트를 “눈팅”하여 이들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고, 정직하게 제기하는 문제점들과 비판을 읽어 왔다. 그리고 감탄하였다. 이들, 특히 젊은 과학자들은 정치색을 배제하고 최대한 자신들의 기준과 원칙에 맞추어 철저하게 스스로 정직하려고 하였고 또 한국의 우상과 권위에 정당한 도전을 하였다.

또한 웹사이트의 운영을 보아도 최대한 지켜지는 게시판의 예의, 실증적 데이터와 체계적 논리를 사용하는 과학적 엄밀성, 그리고 넘치는 재치와 창의성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우리의 영웅은 황우석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은 황우석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들에게 있었다. 이들은 국가이익이라는 국제정치학적 개념에 대해서, 그리고 국가의 신인도라는 소프트 파워에 대해서도 기성 국제정치학자를 능가하는 뛰어난 분석력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문제를 색안경을 끼지 않고 진실하게 접근하는 자세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인문사회과학을 하는 우리가 이들에게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물론 이들 웹사이트에 인문사회과학도도 일부 참여 하였다.)

선진화를 원한다면, 그리고 선진화라는 구호를 사용한다면 이제 우리는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를 나누어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사회를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슈에 따라서 가장 정직하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을 적용하여 잘못을 비판하고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선진화라는 구호를 사용하지 말고 실용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사안에만 국한한다면 가장 선진적인 세력들은 MBC, 프레시안, 민노당, 오마이뉴스, 그리고 한겨레 등 (무순임) 이고, 이들 보다 더욱 선진적인 사람들은 정치적인 판단보다 과학적 진실성이라는 가치를 꿋꿋하게 추구한 젊은 과학자들, 그리고 BRIC, 과학갤러리 등이다.

이들 비주류 언론과 정치세력, 단체 등이 이번 사안에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안에서도 선진적일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에 얻은 명성을 계기로 다른 모든 사안에서도 진정한 integrity (정직, 진실)를 적용하여 한국의 선진화를 이끌어 나가길 기대한다. 그리고 인문사회과학도도 열린 마음으로 이번에 자연과학도가 보여준 선진성을 배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번 황우석 사태를 통하여 선진화 정치세력은 선진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진실되게(with integrity) 성찰하고 천착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상당수의 국민들이 전체주의적 “공포”를 느꼈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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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5-12-23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우석 사건으로부터 바라 본 과학기술계의 여러 문제들


2005. 12. 16


작성: 시민참여연구센터 사무국장 이상동






들어가며




한마디로 추악하다는 것 말고는 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은 이들이 완전한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벌이는 쇼인가? 살풀이인가? ‘세계 최초’의 환자맞춤형 배아복제 줄기세포 수립 기술의 ‘권위자’이며 수백억에 달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는 ‘영웅’은 마지막까지 진흙탕에서 뒹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아직도 ‘진실 공방의 오리무중 상황’이라면서 여론을 호도하고 동시에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일부 언론들이 있긴 하지만, 이미 논문조작은 사실로 밝혀졌고 과학자 황우석의 생명은 다했다. 필자는 솔직히 정부와 언론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를 제외하면 그 외의 진흙탕 싸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어느 네티즌의 말처럼 ‘황우석의 폭탄 돌리기 게임’에 가담할 정신적 여유가 내겐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어떤 교훈과 과제를 남긴 것인지 정리하는 데에도 머리가 아프다.




이번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사건은 ‘통제되지 않는 한국사회의 과학기술계’가 갖고 있는 갖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응축되어 폭발한 사건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정신을 쏙 빼는 스펙터클 영화를 한 달 동안 보고 나서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 글에서는 많은 문제들 중에서 과학기술계의 현황과 관련된 문제 몇 가지만 제시하기로 한다.






과학기술에 스며든 국가주의




먼저, 과학기술에 스며든 국가주의의 냄새가 난다. 한국에서 70년대 이래 과학기술은 경제개발의 도구로써 기능해 오다가 21세기에 즈음하여 하나의 사회문화적 코드로 그 지위가 상승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지식이 생산력 증대와 자본 집중의 중요한 지렛대가 된 것에서 기인하고 그것을 조직하고 영향 받는 단위가 여러 매커니즘들과 시장 주체들이 상호 복잡한 네트워크로 얽힌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된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소위 ‘과학기술 중심사회’라는 현 정권의 모토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읽힌다. 과학기술이 생활 곳곳에 더욱 깊숙이 침습해 가는 변화된 양상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70년대 이래 과학기술과 대중과의 관계를 계몽적 시각에만 입각한 과학대중화로써 접근해 왔다. 국가주의라는 혐의는 과학기술이 노동자 민중에게 미치는 다양한 사회, 경제, 문화적 측면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한다거나 전문화된 지식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을 강화하는 과학대중화 방식이 아니라 국가의 목표를 보다 용이하게 전달하고 그것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위로부터의 과학대중화 방식을 정부가 취하고 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과학기술은 무조건 발전해야 하고 그것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므로 국가시책에 따라 오라는 식의 이런 접근이 ‘신비화된 과학기술의 영웅’ 황우석과 맞닿아 있다. 대중이 아무런 의심이나 문제제기 없이 쫓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영웅’과 ‘신비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치마케팅과 상업언론마케팅은 ‘영웅’의 이미지를 자신의 마케팅에 적극 활용함으로써 동시에 ‘위로부터의 과학대중화’를 더욱 강화, 확대하는 역할을 한다.






의료시장 개방의 지렛대, 생명공학




둘째로 과학기술이 어떻게 산업과 연계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하고 실증적인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며 필자의 고민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번 황우석 사건에서 드러난 생명공학(BT)과 의료산업의 동맹 양태에만 국한시켜 본다면 그들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약간의 자락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는데 결론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대체적으로 황우석이라는 과학권력은 줄기세포의 경제적 효과를 부풀림으로써 대중들에게 의료산업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심어줌과 동시에 국가의 자원이 집중되도록 하고 산업계는 황우석 교수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소위 ‘의료선진화’-실제로는 의료, 병원 개방- 추진의 여론 형성에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분석이다. 덧붙여 황우석 교수팀과 관련된 각종 병원, 연구시설, 농장 등이 경제특구로 지정되거나 지정될 예정인 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과학기술 쪽에서만 접근해 보자면, 문제는 경제적 효과가 대단히 불투명하고 아직 상업화하기에도 성숙도가 대단히 떨어지는 기술을 ‘시장개방’을 위한 여론 형성에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비유를 들어 보자. 예전에 여러 사립학교 재단들이 지역의 인재를 위한 ‘고귀한’ 교육사업을 명분으로 정부의 특혜를 받고 서는 실제로는 땅투기를 하던 행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런 식의 행태는 신자유주의 시장개방을 위해서는 효과적이겠지만, 해당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풍토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하다. 과학기술자와 연구기관들은 기초를 다지고 저변을 확대하는 것을 소홀히 하고 ‘세계 최초’와 ‘첨단’을 쫓거나 경제성과 실적을 부풀리는 데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자 사회의 규범’을 훼손시키는 기업가적 대학과 수직적 연구실 관계




마지막으로 과학기술계 내의 정직성과 불편부당성이라는 규범이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짚어 보자. 과학계 특히 대학은 1980년대 이후 소위 ‘산학협동연구’가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강화됨에 따라 산업경쟁력 확보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이것을 어떤 학자들은 “제2차 대학혁명”이라고도 부르는데, 과학지식이 본격적으로 상업화 사유화로 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과학지식의 공공성이 약화되고 시장적 가치가 연구기관들을 지배하면서 개별 과학자는 자신의 프로젝트 지원자의 이익에 반하는 연구를 진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원자가 원하는 결과를 원하는 시일 안에 수행해야만 한다. 연구자는 그렇지 않을 경우 거대 과학기술시스템 체제 내에서 경쟁에 뒤처지게 된다. 이미 ‘과학 진실성’을 개별 과학자의 양식에 맡기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한국 대학에서는 연구실 내의 수직적 관계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대학원생들의 연구노동은 노동으로 인정치 않고 학업이나 수련의 과정으로 치부되고 있다. ‘스승’은 ‘제자’에게 적절한 신분보장과 정당한 임금보상을 제공하는 대신에 미래를 볼모로 한 수직관계를 강요한다. 불평등한 수직관계 속에서 ‘스승’의 비리와 부정직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불가능함은 물론이고 ‘은밀한 요구’에 저항할 수 조차 없게 만들기 십상이다.






제도적 장치: ‘과학자진실성위원회’의 설치를 위해




이제 연구 과정의 왜곡을 개인의 문제로 남길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거짓말쟁이 교수‘가 없기를 바라거나, ’정직한 학생‘을 바라기만 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민주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검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사건이 과학계의 건강성을 살리고 수직적인 연구실 내 관계를 변화시키는 계기로 자리 잡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써 ‘과학자진실성위원회’와 관련 정부 기구 설치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과학자진실성위원회 (Committee on Scientists Integrity)’- 이 명칭에 대해서는 논의가 더 필요할 듯 하다. ‘과학건전성위원회’ 혹은 ‘과학자 윤리규범 위원회’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한 논의가 필요하다. 는 과학적 부정행위가 제보되었을 때 그것을 조사해야 할 일차적인 의무가 있는 각 연구기관 내에 설치되는 기구이다. 기관으로부터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받는 이 위원회는 부정행위를 조사할 뿐만 아니라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고 나아가 부당하게 연구 업적을 가로채는 일을 감시하기도 한다. 소장 학자들과 연구실 내 약자들이 과학진실성위원회 설치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 차원의 기구로는 미국 연방정부 산하의 ‘연구정직국(Office of Research Institute), 독일 연구재단(DFG, German Research Foundation) 산하의 과학적 부정행위 조사위원회(Committee of Inquiry on Allegations of Scientific Misconduct) 그리고 덴마크의 과학적 부정직위원회(Committees on Scientific Dishonesty) 등의 외국 사례를 들 수 있다. 이들 기구들은 모두 정부와 학계로부터 독립적이다. 개별 연구기관들의 부정행위 조사를 지원하고 사례를 분석하며, 부정행위에 대한 정책과 규정들을 만드는 일을 수행하기도 한다.






나가며




이번 사건은 ‘조작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지극한 상식 차원에서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식이 상식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와 구조들, 그 가운데에서 한국사회 과학기술의 왜곡과 관련된 작은 일단이 보였을 뿐이다. 이제 겨우 연구 수행 과정의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와 감시’의 필요성이 드러났을 뿐이다. 앞으로 연구주제, 선정과 기획 그리고 활용의 전 과정에 ‘민주적 통제와 감시’의 시선을 던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