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동에 내리는 비>, 윤중호, 1988, 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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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겨울보리
나뭇잎들도 어지러이
흩어졌다. 지난 늦가을
차가운 흙 속에 널 묻으며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오지 않는
새벽 대신으로 산비탈 눈 덮이고
내 할 말 뜨겁게 멍진 겨울
바람결에 엷게 비치는 봄 같은 것을
아니다 아니라고 즈려 밟았다.
밟히지 않으면 뿌리가지 얼고 말아
살고 싶었다. 언뜻 부는
바람결에도 봄이 그리웠지만
강은 얼어 흐르지 않았다.
흐르지 않는 강을 보면서
소문은 추운 얘길 흘려보냈다.
그래, 추운 얘기에 뿌릴 내려야지.
4월의 아픈 푸름으로 설 때까진
껄끄럽게 살아온 내가
땡볕 아래서 너를
껄끄러운 흥겨움으로 안을 때까진.
2.
본동일기-셋
-도혁이 성님께 보내는 편지
성님, 옆집 아저씨가 또
싸웠읍니다.
며칠을 잠잠하더니, 오늘은
세간을 다 부수는 것처럼 난리였읍니다.
소주 한 병만 더 먹겠다는 아저씨와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무슨 술이냐는 아줌니가
욕지거리로 맞대꾸하며
어스럼할 때까지 싸우다가, 성님, 결국은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모양이지만
판자집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고
달무리 주위로 부는, 겨울 바람을 따라
동네 개들이 짖어대고......
그런데 성님
그 아저씨만큼 구수한 옛노래를
아줌니만큼 간절한 기도를 들은 적이 없읍니다.
이 세상은 아무래도
구수한 옛노래와 간절한 기도만으로는
되는 게 없는 모양이래서, 성님
감춰논 삭월세를 헐어서
아저씨의 남은 소주 한 병의 주량과
아줌니가 채 못한 기도를 제가 대신 했읍니다.
"주님,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는
절대 용서해주지 마옵시고......"
3.
不滿의 時代
울지 말아야 한다
사랑할 수 없는 자들
모질게 견뎌온 이 땅에서
별수없이 다가온 모든 실체를 위하여
안으로만
안으로만 죄어드는 자들
울지 말아야 한다
굳어져가는 얼굴을 향해
끝없는 아픔을 던져대면서,
우리가 슬프던 것들
다시 돌아보면
어둠을 날으는 한갓 티끌 같은 것들
물 위에 반짝이는 햇볕 같은 것들
바닥이 드러난 시간에 얼굴을 꼴아박고는
죽어가는 것들
머무르는 것들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얼룩진 적삼을 걸치고
검붉게 취한
겨울 밤바다 게가 되어
히히히 웃는
伐木당한 솔바람이 되어
매서운 애동지 눈사람이 되어
厄투성이의 팔자라지만
가는 데까진 가봐야지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의
서러운 이빨로
울지 말아야 한다
울지 말아야 한다
4.
8월, 수박장수
1
꿉꿉이 배어나는 땀을 닦으며
개장국집이 즐비하고, 손금보는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삼아 부채질하는
원동 뒷골목을 간다.
애초에, 소리지르는 맛으로 시작한 장사지만
왜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 길만 많은지
빌어온 리어카 바퀴가 퉁겨지게 끌어도
맨숭맨숭한 등허리만 보이는 수박은
영 줄질 않는다.
2
세방살이에 이골난
건넌방 월성댁한테는
떼온 값으로 팔고
아랫배가 둥그런 사람한테는
둥근만큼만 붙여서 팔고
점심끼니야
막걸리 한 사발로 때웠지만
삐꺽거리는 리어카를 끌고, 팍팍한
먼지를 내며 휩쓸려가는
길거리에 서면
막걸리를 질펀히 걸쳐도
목이 탄다, 목이 타
누이야 누이야
가난이 지겨워 도망나온 고향이
산수박으로 이름난 전라도 어디라지?
빼앗길 것도 이제는 없어
맨몸으로 부대끼며 산다는, 너의 현주소는
대전의 중동 10 번지.
수박 한 덩이 값으로 건네받은
너의 쓴웃음이 묻은 돈으로
길거리의 냉차를 나눠 마시며
네가 내뱉은 욕설을 낄낄거리며 듣다가
애꿎은 고물 리어카만을 걷어차고서
다시 낄낄거리며 어깨를 움츠린 까닭을
누이야 누이야
너는 알지 몰라.
5.
본동일기-여섯
-다시 4월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황사바람이 불어왔다 가라앉고
꽃샘바람이 다시 활사를 털어내는 4월
바람결에 묻어온 소문으로는, 남녘 어딘가에는
진달래가 피었다고도 하고
개나리가 피었다고도 하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한강물은 풀리고
서초동 꽃시장엔, 철도 없이
무더기로 핀다는 꽃들
남 일이지 도리질하며
오지 않는 봄을 헹구어, 울긋불긋한
겨울 빨래만 펄렁대는 산동네엔
그 흔한 개나리꽃도 피다 말고,
고향의 살구꽃 대신, 줄줄이
때낀 가난을 걸어놓아도
돌아가지 않겠단다, 일 많은 고향으론.
6.
입 춘
추워하는 얼음덩이도
슬슬
강기슭으로 다가와
꺼칠한, 땅의 뿌릴 적시는데
때없이 날아든
따슨 바람에 놀라
습습하게 깨어나는
새벽.
산 1 번지 연립주택
양지밭 들꽃풀이,
지하철 공사장 함마 소리가
엷은 바람에도
울멍이는데......
뱀발. 시인의 마음 흔적에 붙어있는 것들. 아니 삶에 부터 있는 것들, 한결같음(이런 표현 마저 사치이겠다.). 이런면에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오히려 하강에 대한 안달이 맞겠다. 백무산의 시도 하강의 안달이 맞을지 모르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인으로 남을 것인가? 시골 한편 씁쓸함처럼 문학하네하는 부류들의 안목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든다. 온통 문학입네하고 수식어로만 엽기로만 변태적 삶으로만 헛헛한 시류하곤... ... 맘속에 들어와 떠나질 않는다.
<해설> 임우기 - 시인의 자기 무화과정은 사회내에서의 상승의 욕망 그리고 하강의 미련, 양자 사이를 끊임없이 비워내는 과정이다. 시인은 하강의 삶을 살지만, 현실에 대해 어떤 분노나 한탄을 늘어놓지 않는다. 상승의 욕구와 하강의 안달을 모두 버리면서 시인은 불우한 이웃들을 감싸안는다. ..윤중호의 시에서 '비', '눈'과 같은 하강의 이미지들은 삶의 암울한 국면들을 비유하는 것이지만, 그 이미지들은 부드러움과 스며듦, 따스하게 하는 적심을 그내용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