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뉘.

 

1. 가끔 책이 다가서는 느낌을 받는다. 밀쳐두고 있었는데 오늘만을 나를 챙겨달라는, 챙기고 싶은 날이었다. 그 책은 하루를 멍하니 버림받고 일요일 바닷가 옆 한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 시선을 끈다.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자연과 인간의 네덜란드-영국-미국의 상업-산업-금융의 순환구조가 잔상처럼 남아있기도 하다. 제임슨의 언제나 역사화하라는 명제도 그러하다. 경제와 형식을 눈치채지 못하면 전체에 근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늘 염두에 두어야할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예전에 읽은 리오리엔트가 생각이 난다. 동양이 유럽보다 훨씬 더 큰 부를 가지고 있었다라는 자각 뒤 여운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면서에 이 책은 그 궁금증을 잔뿌리처럼 내리면서 이어주고 있다. 울프는 1400년이후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인물을 통해 전대륙을 옮겨다니게 한다. 삶의 흐름으로 이어진 전체적인 조망을 우선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공납제적 생산양식, 다소 헷갈리겠지만 원시적 생산양식이 아니라 친족적 생산양식을 염두에 둔다.

 

2. 마르크스를 오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그의 변증법적이 접근방식이다. 예술가의 독특한 그림의 문체를 읽을 수 있듯이, 삶의 문체가 있다면 평생 유지한 관점이 이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전체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에는 예단이 없다. 그가 만일 지금 다시 재현한다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과물이나 한 말을 두고 단정짓는 것은 평생 피하고자 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속류마르크스주의자들은 늘 밑줄에 경도되어 있다. 경도되어야 할 것은 현실이다. 현실에서 전체, 총체를 향하는 노력이 조금 더 낫게 보는 이를 늘릴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강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좋은 책이 아니라 디딤돌로서의 책과 사실들... ...

 

3. 인디언 수많은 종족들이 모피교역에 어떻게 연루되면서 바뀌어나가는지, 왜 유독 아프리카가 노예무역으로 이어졌는지, 역사에 잡히지 않는 많은 흐름들이 융기하고 대륙을 잇고 뼈에 살점을 붙이고 혈액을 순환시킨다.  전체를 볼 수 없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4. 정치경제학에서 정치를 발라내어 정치학이라, 사회를 발라내어 사회학이라,  경제를 발라내서 경제학이라 이름짓고 결국 모르쇠로 일관하는 학문의 말로는 어쩌면 지금 여기 삶의 흐름이란 맥을 잡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는 반증에 늘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과학기술도 똑 같다.  그 총체라는 것, 전체라는 것, 실체라는 것, 또 다른 사고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전체를 맛보는 기술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학문이라는 것은 분과학문의 덧셈이 아니다.  통찰이나 깨우침같은 것이 학문을 살아있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껍다 아직 1/3을 남겨두고 있다.

 

 

울프의 연구에서 크게 관심이 가 있는 것은 경제적·정치적 힘의 격차가 존재하는 상황들에 사회적 관계들이 포섭되는 방식들이다. 자본주의를 다룬 이론들을 가져다가, 연구를 진행하면서 지역의 상황에 맞도록 이 이론들을 수정해서, 울프는 이 지금은 거의 보편적이 된 생산, 소비, 분배 체제가 갖는 거대한 변형력을, 그러니까 어떻게 교역이, 또 나중에는 대규모 산업적 생산이 세계 전역의 지역 공동체들을 변형시켰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19

 

학문적 연구에서는, 국경을 넘는 송금들을 지금껏 주로 개발이론의 틀 안에서 다뤘다. 지금까지 그 문화적·사회적인 총체적 배경 안에서 연구한 경우는 채 몇 명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태만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데, 송금이 문화적 의미로 사실상 넘쳐나고 또 중요한 사회적 관계들의 성격을 매우 정확한 방식으로 반영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러하다. 송금이 도덕적인, 증여적인, 또 사회를 조직하는 측면들을 가진다는 점을 크게 강조할 경우, 세계화 인류학이 사회 분석의 분명한 한 형식으로서 인정을 받는 데 도움이 되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3

 

우리는 지구 크기의 당구장 같은 세계 모형을 만들어, 그 안에서 국가, 사회, 문화라는 저 실체들이 같은 수의 딱딱하고 둥근 당구공들처럼 서로 떨어져 돌아간다. 그리하여 세계를 색깔이 다른 공들끼리로 분류하기가, “동양은 동양, 서양은 서양, 결코 이 둘은 만나지 않으리라고 언명하기가 쉬워진다. 이렇게 해서 어떤 순수한 서양이 똑같이 순수한 동양에 마주 놓이게 되거니와, 이때의 동양이란 생명이 값어치가 없으며 노예적 대중은 여려 형태의 전제정 아래 굽실거리던 곳이었다. 나중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서양과 동양 둘 다로부터 자기네의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하자, 우리는 역사적 지위를 구하는 이 새 신청자들을 저발전 상태의 어떤 제3세계에 할당하고는, 발전한 서양과 발전 중인 동양과 또 대비되는 것으로 취급했다. 54

 

전문화된 사회과학들은 전체론적 시각을 저버렸던바 그리하여 각각 밑이 빠진 물통에 물을 길어다 부어야 하는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은 저 고대 그리스 전설 속 다나에 자매들을 닮게 된다. 62

 

마르크스는 보편사를 주장한 역사가도, 사건사를 다룬 역사가도 아니었다. 물질적 관게들의 결합구조 또는 작동 양식을 연구한 역사가였다. 마르크스는 활동력의 대부분을 써가며, 당연하거니와, 한 특정 생산양식의 역사와 작동방식을 이해하려 노력했으니, 자본주의였고, 이것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려고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혁명적 변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전문화된 학문적 담론은 혁명과 무질서에 대한 해독제로서 발전했던 만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거니와, 이 유령 같은 질문자가 학문의 전당들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유령은 우리에게 불가결한 가르침을 준다. 첫째, 우리가 세계 시장의 성장사와 자본주의적 발전의 경과를 추적하지 않으면,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둘째, 이 성장과 발전을 설명할 가설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이 넓어져가는 흐름에 관한 역사와 가설 둘 다를 각 지역 인간집단들의 삶을 결정하고 바꾸는 흐름들에 다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82-83

 

네덜란드 연합주는 산업을 발전시키는 쪽으로 돌아서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해운, 조선, 또 여기에 맞물려 있던 활동들이 계속 중요했고 계속 수지도 맞았다. 둘째, 상업활동 쪽의 수익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는데, 사실 직물 생산에 투자하는 쪽의 수익보다 놓았다. 셋째, 네덜란드 연합주의 농업은 이미 자본집약적이고 전문화돼 있었으며, 거기다 높은 임금을 주고 있었고, 이런 까닭에 낮은 임금을 받고 산업노동력을 제공해줄 가난한 농촌 사람들이, 잉글랜드에는 있었으나, 여기에는 없었다. 넷째, 네덜란드의 발전상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두 기술이나 용역을 활용하는 능력에서 궁극적으로 비롯된 것이었지, 자체의 튼튼한 자원 기반 같은 것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 연합주는 인구가 적었다. 네덜란드 인구는 1514275000명에서 1680년에는 883000명까지 늘어났다가, 1750년에는 783000명으로 떨어졌다. 사실, 인력이 해운 쪽에서조차 부족해서, 18세기에는 스칸디나비아나 북독일 사람들이 갈수록 더 많이 고용돼 네덜란드 선박들에서 선원으로 일을 했다. 게다가 네덜란드 연합주는 석탄도 철도 나지 않았으니, 둘 다 풍부하게 묻혀 있던 잉글랜드와는 사정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이 공화국은 거의 자치적인 도시국가들이뭉친 정치적 단위였고, 도시들 각각에는 자체의 과두적 상인 지배집단이 있었다. 257

 

유럽 상인들은 심지어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할 때 채용되던 작업 조직이며 노동 조건까지도 여기서 또 저기서 바꿨다. 하지만 이네들이 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자기네 부를 자본으로 사용해서 생산수단을 획득해 변형시키고, 다시 노동자 계급이 팔려고 내놓은 노동력을 구매해 이 생산수단을 돌리는 것이었다. 264

 

이 공무-종교 조직은 생활단위를 초자연적 존재와 이어주는 의식들도 집행했다. 이런 의식들은 대체로 이중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기독교적이었고 한편은 이교적이었다. 기독교는 종교적 공간을 정하는 쪽으로는 종교적 시간의 경우보다 관심이 덜하다고 할 텐데, 예루살렘이나 로마, 아시시, 루르드 같은 종교적 장소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타락, 구속, 심판, 부활을 통한 시간의 누적이라 하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스파냐 지배 이전 종교들은 고도로 공간을 중심으로 조직돼 있어서, 공간상의 구획들을 가지고 시간의 구획들을 구별하고, 사회집단들의 속성들을 규정하며, 자연의 국면들을 구분하고, 초자연적 존재들을 분류했다. 이제 기독교 전례력과 에스파냐 지배 이전 종교들이 융합괴면서 기독교적 구원의 시간 틀이 기도교 이전 전통들의 이런 자연 대상들과 연결됐다....이 구조물을 조직하고 유지한 것이 포괄적인 정치단위인 잉카나 멕시카, 치브차였다. 정복은 이 더 큰 이념적 구조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기독교의 구원 계획을 들여놓았다....이렇게 해서 생겨난 종교적 구조들은 생활단위, 생활단위마다에서 서로 달랐거니와, 이념적 지역중심주의를 띠었던 점에서는 생활단위들이 정치적으로 분리돼 있던 양상과 비슷했다. 314 인디언 생활단위들은 이렇게 보면 더 큰 정치적·경제적 체제에 예속된 부분들이었으며, 이 체제가 바뀌는 데에 따라 같이 바뀌었다. 이 생활단위들은 에스파냐 지배 이전 과거의 부족적흔적들도 아니었고, 어떤 불변의 속성들로 특징지어지는 정태적 유형의 소농 공동체도 아니었다. 315

 

탈주노예들은 무리사회를 이뤘으며, 환경상의 조건들이 도와줬던 경우에는 더 안정적인 생활단위를 이루기도 했다. 마로나주는, 프랑스인들은 이 탈주 현상을 이렇게 불렀거니와, 재식농원 생활의 일관된 또 주요한 특징이었으니, 재식농원 체제로서는 서서히 그러면서 그치지 않는 일종의 출혈이었다. 탈주 노예들의 반란 공동체들은 어디서나 나타났다. ...이런 집단들은 밀수나 해적질에도 자주 손을 대서 자기네 생존형 농경을 보충했고, 남아메리카 북쪽 해안의 에스파냐 방어시설을 찔러노븐 무장 약탈 세력들에게 힘을 빌려줄 때도 많았다. 329

 

저지대 해안들과 섬들에 조성된 재식농원 지대에서, 유럽인 재식농원주들과 그 후손들은 기존의 친족질서적 사회들과 공납제적 사회들의 저항을 꺾고, 이제 이 사회들을 아프리카인 노예 작업대들로 대체해, 강제 집단농경 체제 아래서 일을 시켰다. 이 체제는 수출용 작물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했던 것이지만, 또 재식농원 지대를 격리시키기도 했으니, 내륙으로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이 해안 지대의 노동자들이 내륙 변경으로 탈출하지 못하게도 했던 것이다. 수출용 작물들을 생산하면서 이 지대는 유럽 쪽 시장들에 단단히 매이게 됐고, 거기다 새 노예들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게되면서, 재식농원 아메리카는 세 대륙이 참여하며 확대돼가던 노예무역에 직접 통합됐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인 노예들과 그 후손들은 브라질의 대서양 해안지대에서 지배적 인구집단이 됐고, 카리브 해의 섬들이며 해안 지대에서도, 또 콜롬비아, 에콰도르,페루를 잇는 해안을 따라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331

 

이런 식으로 말과 총이 조합되고, 거기다 상업적 관계들이 확대되는 상황이 맞물리면서 대평원 인디언식 결합구조가 출현하는 조건이 갖춰졌으니, 길지 않은 몇 년이 지나는 동안의 일이었다. 이 결합구조는 빠르게들 채용하는데, 말을 쓰지 않던 수렵-채집민들이나 경작민들이나 차이가 없었다. 여기에다, 이 다양한 인간집단들은 서로를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 닮아갔으며, 서로의 기원이 달랐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수렴이 일어난 이유들 가운데 일부는 새로운 생태적 적응 방식이 내재했다. 들소 떼는 겨울 동안에는 흩어졌는데, 작은 무리를 이뤄 무리를 이뤄 이동해 산속에서 겨울을 났고, 봄에 풀 많은 평원으로 돌아왔다가 7월과 8월 짝짓기 철 동안 다시 거대한 떼를 이뤘다. 들소사냥도 이 주기에 맞춰가야 했다. 373-374

 

포틀래치가 경쟁이나 동맹 맺기에서 가졌던 정치적 기능들은 더 강화됐다. “피의 강을 재물의 강으로 막았다포틀래치가 일종의 저축하기였다면 친족질서적 관계들을 저축했던 것이지 공납제적 부나 자본의 저축은 아니었다. 391

 

백인 하인들이나 아메리카 원주민 노예들은 자기네 집단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는 도움을 끌어낼 수 있었던 반면, 아프리카인 노예들은 탈주 노예들의 지원받을 기회를 강제로 차단당했다. 이 교역의 한쪽 끝인 아프리카에서 팔리거나 잡히면서 이네들은 친족들이며 이웃들과 관계가 끊겼거니와, 아메리카 항구들에 도착해서는 부족이나 언어상으로 출신이 다른 노예들끼리 의도적으로 섞어놓아 연대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인들한테로 넘어가고 나서는, 이네들은 백인 하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또 분리됐으니, 법률상의 차별이 이런 분리를 확인했다면 인종주의적 정서의 발달은 이를 더 강화시켰다. 만약 탈주를 했을 때는, 이네들의 피부색은 보상받는 일을 바치던 모든 노예단속반에게 식별표시가 돼줬다. 결국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았을 경우 얻을 수 있었던 노동력은 이런 것이었으니, 한 소유주의 통제 아래 두고 고되고 지속적인 작업에 동원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 따르는 법률상의 또 관습상의 제한은 최저선까지 완화돼 있었다. 이것이 신세계에서 다른 노동 집단들이 대안으로서 갖고 있던 가능성을 닫아버린 것이다.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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