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지금까지 논한 바와 같이, 감정을 배제한 냉철한 자기반성과 분석은 대다수 동료 사회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독자적인 지적 전통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가 쓸 수 있는 사상적 개념적 자원이 서구의 것밖에 없다는 슬픈 현실을 노정한다. 즉 우리는 서구의 개념적 자원과 이론적 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구의 지적 지배를 인정하고 그에 도전함으로써 뭔가 새로운 것을 변증법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우리의 학술문화에서 하기 어려웠던 ‘지적 도발’을 하고 싶었다. 250-251
개인의 ‘느낌’이 다루는 주제라면 굳은 강의실에서 세미나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집에서 읽고 느낌을 가지면 될 것이다. 토론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느낌’과 ‘혼잣말’이 부유하는 가운데 대체 무슨 놈의 ‘접점’이 생기겠는가? 접점에서 갑론을박해야 ‘쟁점’이 발화할 텐데 여기저기서 갑론을박만 무성하다. 60 ( 볕뉘 1. 조한혜정교수가 학생들과 수업하는 내용을 지적하면서 하는 내용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세미나가 그렇기도 한다. 인상비평에 가깝고, 혼자도 인상만 남기고 만다. 이론의 맥을 잡고 서로 다투는 것도,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희귀한 일이다. 자칫 논쟁을 발화하자고 하면 비판이 아니라 비난으로 느끼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의 지적풍토의 현실이 이렇다. )
윌리엄스는 ‘반영’과 ‘매개’ 대신 ‘한계짓기’와 ‘압력 가하기’라는 은유로써 “언어를 통한 인간의 상호작용 영역”에서 결정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는 토대와 상부구조는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토대가 이미 사람의 일상세게에 스며들어 그들의 언어와 인식, 상호작용을 가능케하는 틀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토대가 “압력을 가하고 한계를 짓는다”는 그의 주장을 ‘문화유물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윌리엄스에게 토대(물질적인 것)는 상부구조(문화)에 “배여 있거나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상부구조를 ‘원격조종’하는 게 아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역사의 진정한 전제라고 부른 물질적 삶의 조건인 토대는 속류 마르크스주의 추종자들의 주장처럼 언어나 역사적 자료와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66 ( 볕뉘 2. 80년대 학생운동은 무엇을 지향했을까? 89년 소련의 몰락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마저 내동댕이친 것이 우리의 실수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외치고 이해하던 것은 대부분 속류마르크스주의였을 것이다. 토대와 상부구조를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변증법이라는 것도 정반합으로 암기하고 마는 소련동구류의 인식에 그쳤는지도 모른다. 그런 몰이해와 지적인 전통과 다른 흐름을 붙잡으려는 노력은 부족하거나 현실을 보는 눈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는 것 같다. 김경만저자가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핵심에 대한 몰이해다. 인식의 확장을 위해 깊이 들어가지 않는 사회학에 대해 내놓으라는 교수들의 지적단절이 아닌가 싶다. 더 이상 학문을 하거나 지적흐름을 살피려고 하지 않는 그 지점에 마르크스가 서 있다. 복기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속류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이러한 일련이 지적흐름을 살피는 것이 또 다른 현실에서 김경만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론을 모색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쿤에게 패러다임은 추상적인 ‘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소위 ‘예시’라 부른 실제 문제풀이 과정에 ‘녹아들어가’ 있다. 또한 그는 주어진 문제들을 풀어가는 행위/실천의 ‘과정 자체’가 바로 실재라고 주장한다. 실재 역시 문제풀이 ‘행위’에 녹아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결국 과학자들은 문제풀이라는 실천 행위와 실재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습득한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문제풀이를 통해 습득한 실재의 ‘경계 안’에서(한계짓기!) 문제풀이, 즉 가설을 수립하거나 실험을 진행하고, 이 과정에서 쉽사리 그 경계선을 넘지 못하게끔 제약을 받는다(압력 가하기!) 67
생산력에 조응하는 생산관계 속 위치, 즉 주어진 계급구조 아래 특정한 계급에 위치한 사람들은 ‘계급 하비투스’를 몸에 체화하고 있는데, 이것이 일상의 모든 국면에 판단 기준으로 작동해서 사람들의 언어와 사고를 ‘제한’하고 ‘압력’을 행사한다. 69 (볕뉘 3. 계급의 특성이 달리나타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스펙트럼을 계층으로 포함해서 더 형식의 관점에서 넓게 봐야할지도 모른다. 그 한계를 보거나 사유할 수 있을 때 현실은 또렷하게 상이 맺히기도 하고 더 유연하게 상황을 헤쳐갈 수 있는 여력도 생기게될지 모른다. 계급에 매개하거나 녹아있는 다양한 삶의 양태들에 대한 학문의 결과물이 없다. 인식조차 없으니 그런 결과를 바란다는 것도 의아할 것이다. 문화분석이라는 형태로 뭉둥그려 해석하고 마는 것이 지금은 아닌가 싶다. )
윌리엄스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수정분화시켜서 ‘지배문화’ ‘잔여문화’ ‘부상문화’같은 일련의 개념들을 내놓는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헤게모니는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전제하지만 당대 사회의식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지배적 의식에 편입되길 거부하는 과거의 지배적 사유가 잔존하고, 한편으론 지배적 의식에 ‘대항’해 새롭게 부상하는 의식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헤게모니가 있는 지배적 의식이 존재하지만, 당대 사회의식 전체는 항상 이 세 힘의 역동적 관계, 즉 지배와 저항의 동력학적 관계에 따라 형성하고, 변화하고, 이행한다. 70
“왜 최재천과 그를 따라하는 학자들은 이미 30년 전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논쟁을 폐기물 재생업자처럼 ‘지금’ 수입해 재생하는 걸까?” 80 위키피디아와 ‘식탁류’의 책들은 내용의 ‘간략함’이란 공통분모가 있다. 간결함이 왜 문제가 되는가? 어떤 주제든 간에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학자가 논문을 쓸 때 위키피디아를 보고 짜깁기해서 쓸 수는 없다. 논문을 풀어가다 보면 반드시 ‘깊이 파고드는’ 논의가 필요한데, 이런 식의 짜깁기로는 깊이 들어가기는커녕 금세 바닥이 드러나고 말기 때문이다. 78 과학의 대중화니,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니 하는 온갖 구호를 갖다붙이겠지만, 나는 이런 행태가 지적 거인들과의 힘겨운 싸움은 회피한 채 세속적인 성공을 향한 ‘쉬운 길’로 가려는 ‘기회주의’의 소산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81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미명하에 저자-출판사-미디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해온 학자들은 자신이 대중적 지식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교묘히 감추고, 오히려 글로벌 지식장에서 상당한 상징자본을 획득한 저명한 학자인 양 행세한다. 85
한국 사회과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서구이론이 한국에 적실성이 없는데도 무차별적으로 차용한 데 있는 게 아니라, 애당초 적실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황소걸음’ 같은 진득한 탐색과 고구가 전혀 없다는 데 있다 92
항해 도중 고장난 배를 수리하려면, 배 전체를 바다 한가운데서 전부 해체해 다시 조립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배의 다른 부분들은 괜찮다고 ‘가정’하고 당장 필요한 부분을 배가 ‘떠있는 상태’에서 수리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또다른 부분을 ‘다른 모든 부분은 괜찮다’는 가정 아래 고쳐야 한다. 이 과정이 하버마스가 제시한 의사소통행위를 통한 언어게임/전통의 변화를 예시해주는 적절한 은유다. 100
우리는 이미 서구 사회과학의 개념적 자원과 틀에 젖어 있고 그 언어게임 안에서 움직여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현재 주어진 전통은 유교가 아닌 서구 사회과학임을 강조한다. 유교를 재해석하는 것은 여러 문제가 있고 비용면에서도 현실성이 없는 작업이다. 매몰비용을 생각하면 서구이론과 개념에 따라 연구해온 우리의 과제는 내재적 비판을 통해 서구 사회과학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지, 고비용 저효율이 거의 확실한 ‘유교의 재활용’은 아니다. 101-102
자료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111
이론은 “실재나 현실을 잡아내거나 담아내기 위해 고안된 유기적으로 연결된 개념들의 망”이다. 118
낮은 봉우리들은 최정상의 거장들을 추격하고 있는 학자, 예컨대 랜들 콜린스, 조너선 터너, 악셀 호네트, 존 오닐 등이라고 할 수 있다. 122
“상아탑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고통”이며, 지금까지 진화해온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의 망을 통해 형성된 계보나 전통 ‘안’에서 논쟁해 창의적 이론을 정립하는 것만이 고통스럽지만 글로벌 지식장에서 상징이익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129
하버마스나 부르디외 같은 서구학자가 방한하면 정작 자신의 주장은 까맣게 잊은 채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법석을 떨며 세계적인 학자이니 한국 현실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고 간청하는 양면적인 모습이 우리 학술문화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글로벌 지식장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국제 미아로 전락해버린 데는 이러한 병적인 풍토와 서글픈 자화상이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131
볕뉘 4. 글로벌 지식장도 중요하지만 학문을 하는 사람, 학문하려는 태도와 지속성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분위기가 우선인 듯하다. 그것이 지켜진다면 관심사를 이어나가고 심화시켜 나가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 수 있지 않을까. 가라타니 고진을 지금을 120년전 청일전쟁의 전야와 같다고 말하면서 남북을 쇄국과 개화의 두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해서 다소 의아했다. 하지만 어찌보면 그렇게 봐도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하다. 외부의 흐름을 소화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크게 달라진 것도 없으며 풍토또한 단 한발자욱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다. 횡행하는 반지성주의나 대중과 뒤섞여버리고자하거나 가르치고자 하는 표풀리즘이 제 살을 더 깊숙이 찌르거나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은 아파해야 할 것 같다. 지적전통이라는 것은 이렇게 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현실을 읽지도 못하는 현실 안에서...볕뉘 5. 담론과 해방이후 너무 오랜만이라 지적인 단절이 있었나보다 했다.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 다행이다. 독자로서 이것저것 바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