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실천적’인 문제의식들이 그 자체로 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화’에서 자주의 논리를 찾는 연구와 식민화의 원인을 찾는 연구는 너무나 달라 보이지만 강렬한 실천의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다. 고종과 대한제국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들 역시 실천적 문제의식의 쌍생아다. 물론 그런 치열함이야말로 역사가의 존재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선들이 혹시라도 텍스트에 대한 온전한 독해를 방해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5
우리가 읽고 써온 역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현실이 누군가를 위한 역사였다. 그것은 민족이고 국가였으며, 민중이었다. 때로 그것은 특별할 것 없는 하위주체이기도 했다. 역사학이 평가를 피해갈 수 없다는 점에서 본다면, ‘누군가를 위한 역사’란 사실상 역사학의 숙명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시간의 주인공들과 그들의 성취를 긴 호흡으로, 다중의 변수를 고려하면서 맥락적으로 독해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역사학을 역사학답게, 인문학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이 책을 ‘중화세계관의 본질을 옹호하려 했다’는 식으로 오독하지 않기를 바란다. 중화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는 긴 시간대의 단면들을 시뮬레이션하고 묘사한 것으로, 그런 식의 서사를 통해 역사와 현실의 소통 가능성을 찾아보려 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한다. 과거의 단면들이 현실에서 재현될 리가 없고, 우리는 다만 우리의 현실을 고민하지만, 오래된 변수와 새로운 변수가 얽혀 있는 현실에서 그 현실을 구성하는 맥락의 힘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을 것이므로. 595-596
조선후기 지식인의 '읽고 쓰기'에 역사서이다.
1장부터 4장 2천년의 동아시아의 역사를 학자들의 쟁점에 따라 비교 연구하며 자신의 관점을 밝힌다.
중간부터 중국, 동아시아의 현재 정세까지 세계사의 구조 후속편으로 이야기를 보태고 있다.
볕뉘.
1. 이삼성 교수는 동아시아 이천년을 다시 살펴보면서 유목과 중화라는 관점을 고정적으로 보지 않아야 된다고 한다. 조공과 책봉이라는 관계 역시 지배와 종속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이런 관점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자연과 인간이라는 책에서 중국과 동아시아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중국이라는 제국은 다른 서양 제국(제국과 제국주의를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를 교환양식에 따라 살펴보는데 서양의 약탈과 분배의 관계(교환양식B)가 아니라 책봉과 조공이라는 호혜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 관점이 현재에도 이어지면 네이션이 국가로 분리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2. 조선를 재조명하는 배우성저자는 60년대 이후 우리 역사가 보고 싶은 로망에 따라 역사를 보려해서 실제 텍스트와 틈이 많이 보인다고 한다. 그 틈과 균열을 제대로 보는 연구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으며 그 결실이 위 두권의 책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흐름을 '읽기와 쓰기'의 관점으로 보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등 은 지식의 위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문체역시 그런 입장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과 중화라는 책 역시 이런 문제의식의 앞선 결과물이다. 실학이나 북학이라는 것도 명을 중화의 마지막이므로 조선이 그것을 살려내고 이어야 하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3. 동아시아와 지금은 낡은 관점에서 사로잡혀서는 제대로 볼 수 없다. 의외로 그 고정관념들은 굳건하다. 지금 어쩌면 국가라는 종교에 시녀 역할을 한 역사로는 지금 현실을 한치 앞도 볼 수 없다. 총체성에 다가서려는 노력, 변하된 변화하지 않은 지점에 다시 서는 것이 훨씬 더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읽기 바꾸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의 연구동기와 흔적, 연구궤적을 따라 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4. 이중환의 택리지의 원본과 최남선의 해석본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뒤틀리고 편취하려는 역사의 오류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