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 비평을 위하여

 

통상적 사고과정을 강화함으로써, 마치 당면한 혼란의 와중에서 정신이 의지와 명령으로 자력에 의해 힘차게 스스로 분기하려는 듯 당혹의 대상에 새로운 빛의 물결이 퍼부어진다. 비반성적으로 사유하는 정신의 작용과정과 대면하여(그 정신이 철학적 예술적인 문제와 대상을 다루든 또는 정치적 과학적인 문제와 대상을 다루든) 변증법적 사고는 그런 과정의 적용을 완결하고 완성하기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의식 속에 포함하기 위해 자신의 주의를 확장하려 애쓴다. 바꾸어 말해서 변증법적 사고는 특정한 문제의 딜레마를 해결하기보다는 그런 문제가 더욱 높은 차원에서 스스로 해결되도록 전화하며, 문제의 존재와 사실 자체를 새로운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변증법적 과정에서 가장 예민한 순간이다. 358

 

대상지향적인 보통의 정신활동으로부터 이런 변증법적 자의식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어떤 숨막히는 느낌, 즉 승강기의 낙하나 비행기의 급강하에서 느끼는 어떤 메스꺼운 전율과 같은 것이 있다. 이런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육체를 새로이 자각하게 만들 듯이, 변증법의 사고전환은 사유자 및 관찰자인 우리의 정신적 입장을 새로이 자각하게 만든다. 실로 그 충격은 근본적이며 변증법 그 자체를 구성한다. 이런 전환의 순간이 없다면, 즉 이전의 좀더 소박한 입장에 대한 이와 같은 최초의 의식적 초월이 없다면, 어떤 진정한 변증법적 의식화도 불가능하다. 359

 

헤겔적 문학비평: 통시적 구성물

 

지식인의 습성대로 우리가 일련이 추상화를 쌓아올리며 그때마다 현실적인 것 자체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져가고, 동시에 이 위태로운 지적 구조물이 사실은 새로운 자연법칙이 아닌 어떤 개인적인 정신적 취향의 규칙에 대한 기념비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의혹에 휩싸일 때, 바야흐로 변증법적 사고는 우리에게 가장 조야한 진실을, 상식 자체만큼이나 불쾌하도록 진부한 사실을 급작스럽게 복원해주는 돌연한 찢음으로, 매듭의 절단으로 나타난다. 360

 

현존하는 기념비들 사이에는 이상적 질서가 형성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진정 새로운) 예술작품이 도입되면 수정된다. 새로운 작품이 도래하기까지 현존 질서는 완전하다. 새로운 것이 첨가된 후에 질서가 지탱되려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현존 질서 전체가 변화해야 하며, 이에 따라 전체에 대한 각 예술작품의 관계·비율·가치도 재조정된다. 이것은 물론 매우 변증법적 개념이다. 365

 

모두들 쬐끄만 통찰하나 가지고 해먹으려든다.”...‘역사이론의 번창은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문화적 질병의 징후인 것 같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현재보다 앞서가려는 시도이며, 또한현재 자체까지도 완결된 역사적 순간으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 배후에까지 사고해들어가려는 시도이다. 또한 이것은 자기가 처한 순간이 역사책 자체 속에서 영원의 상 아래서 궁극적으로 인준되기도 전에 그것을 명명하고 분류해보려는 시도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시간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와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유래하며, 삶의 역사성을 더욱 강렬하게 실존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환영하고 향유하는, 역사로서의 현재에 대해 맑스주의가 갖는 감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지적 작용이다. 373

 

살아있는 인간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이 말하고 상상하고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하거나, 이야기되고 생각되고 상상되고 인식된 바의 그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 행동하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며 그들의 실제적 생활과정에 입각해서 이런 생활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과 반향의 발전을 입증한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형성된 유령들 역시 물질적 생활과정의 승화물일 수밖에 없는바, 그 물질적 생활과정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하며 물질적 전제에 구속된다. 도덕 종교 형이상학 및 여타 모든 이데올로기와 이에 대응하는 의식형태들은 따라서 더 이상 독립적 모습을 띠지 않는다. 그것들에는 역사도 발전도 없다. 물질적 생산과 교류를 발전시킴으로써 자신들의 현실 존재와 함께 사고와 그 사고의 산물까지도 변화시키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다. 삶이 의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삶에 의해 결정된다.독일이데올로기에서 379

 

문학적 범주: 내용의 논리

 

사고의 수직적이며 단일한 차원과 같은 것을 구성하는 한, 문체의 핵심에 자리하는 언어적 요소와 언어 외적 요소의 잠재적 모순을 드러내는 데까지 나아간다. “문체와 관계를 맺는 것은 역사보다는 생물학이나 과거의 차원이다. 문체는 작가의 대상이며 영광이자 감옥이며 고독이다...그 비밀은 작가의 육체에 파묻힌 기억이다. 문체의 암시적 힘은 말하지 않은 것이 일종의 언어적 간격으로 남아 있는 회화에서처럼 속도가 아닌 밀도의 형상이다. 문체의 비유 속에 거칠거나 부드럽게 조합되어 문체 밑에서 단단하고 깊게 지속되는 것은 언어와는 전혀 다른 현실의 단편들이기 때문이다.” 388

 

사고가 불완전하게 실현된 경우에만 그러한 실례를 제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례란 부가적이며 분석적인 반면, 진정한 변증법적 사유에서는 모든 개개의 대상 속에 전체 과정이 함축되어야 한다. 실례에서는 변증법적 사고와는 반대로 구체적 사유가 전혀 별개의 두가지 작업으로 분열되는데, 하나는 진정한 사유가 아니라 방법의 제시이며, 또 하나는 진정한 대상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일련의 실례일 뿐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사유의 본질은 바로 사고가 내용 혹은 대상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392

 

형식과 내용의 매개로서의 동어반복

 

이론뿐만아니라 사고의 문제와 범주 자체도 (그 범주가 돈 폭력 사회 문체 시점 등의 실체 중 어떤 것이든 간에) 역사적으로 계속 변화하며, 어떤 고정된 객관적 실재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는, 분명히 분석적 사고로서는 괘씸하다고 여길 만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자연과학 자체도 다음과 같은 심히 당혹스런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하고 있다. 즉 우주에 내재하는 법칙 자체가 진화상태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물리법칙 및 고정불변하는 자연질서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시된다는 것이다. ..“사회의 해법은 어떤 개별적 사실로부터 연역될 수도, 그렇다고 개별적 사실 자체로 이해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사회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396-397

 

서사시적 세계가 사라지고 산문세계라 부르는 중산계급 개인주의의 세계가 출현한 것을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개개인은 자신의 개인성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자신을 타인들의 수단으로 만들고, 그들의 제한된 목적에 봉사해야 하며, 또한 자신의 협소한 이익을 충족하기 위해 그들을 수단으로 전환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일상적 삶과 산문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개인은 그의 활동원리를 하나의 총체성인 자신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므로, 그 자신만으로는파악할 수 없고 단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존재다. 그것들을 내면화해냈든 못했든 간에 그는 법률 정치 구조 가족관계 등 자기에 선행하며 자기가 복종해야 하는 외적 영향들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 개별 주체는 타인에게 총체성이 아니며, 단지 그의 행동과 소망과 의견에 대해 타인들이 어떤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관심을 갖는가 하는 견재에서만 그는 드러난다. 사람들의 직접적 관심사는 자기네의 목적과 의도에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는 것뿐이다. .....개인은 언제나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하나의 밀봉된 통일체로 보는 모순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시도와 싸움이 계속되는 한 지속된다.” 407

 

구체성의 일정한 차원에서 사물자체 혹은 우리가 후에 그 실존적 현실이라고 부를 것은 많은 다양한 약호 중 어느 것으로나 표현될 수 있으며, 상이한 많은 차원들 중 어는 것으로나 재분절화될 수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문학적 구조로도, 한 특정 사회조직의 체험된 진실로도, 주객관계의 한 특정한 유형으로도, 대상과 언어의 특정한 거리로도, 전문화나 노동분업의 특정 양식으로도, 계급간에 함축된 관계로도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이 진정 구체적인 것의 장이며, 여기서 비로소 우리는 현실의 한 차원과 다른 차원을 매개하고 관념의 전문적 분석을 사회적 역사의 체험된 현실의 진실로 번역할 수 있다. 어떤 예술작품이 주어졌을 때 그에 상응하는 이런 궁극적 현실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변증법적 비판의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408

 

애초부터 모든 이야기와 일화에 모종의 서술시점의 선택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왔다면, 시점을 역사적 현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히 역설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시점이라는 하나의 범주는 현대 중산계급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만큼 역사적으로 다른 형식을 다루기에 부적합한 개념이며, 용어의 모순 없이는 중세설화나 구비서사시에 적용될 수 없다. 413

 

관념론 실재론 유물론

 

세계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데 대해 한마디 하자. 이 문제에 대해 철학은 항상 지각생이다. 세계에 대한 사고로서 철학은 현실이 그 전개과정을 다 마친 후에야 나타난다. 개념이 가르치는 것은 역사가 이미 필연적인 것으로 보여주었다. 현실이 성숙했을 때에야 이상은 현실적인 것과 대치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때 이상은 이 세계의 본질을 포괄하는 지적 영역의 형태에서 이 세계를 스스로 재구성한다. 철학이 그 백발을 잿빛으로 칠할 때 삶의 형식은 이미 노쇠했고, 이 잿빛으로 칠한 백발은 삶을 회춘시킬 수 없으며, 단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기 시작한다.”...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사고를 연구대상와 동일한 측면에서 하나의 역사적 행동으로 느낄 수 있게 되는 순간, 또한 관찰자인 자신의 입장을 진행 중인 변증법적 사유과정에 포함할 수 있게 되는 순간, 헤겔의 모순은 극복되고 우리는 이제 역사적 사고를 행하기 위해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필요가 없게 된다. 정신적이든 그렇지 않든 본질적으로 깊이 역사적이며 상황적인 모든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맑스의 사상은 역사철학자의 자리를 역사의 바깥에 마련해두었으며, 또 그만큼 가장 역설적인 차원에서 상황 내 존재의 개념을 포착할 수 없었던 헤겔의 상상보다 한걸음 더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419-420

 

서구국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분명히 영미의 경험적 실재론이다. 이는 모든 변증법적 사고를 위협으로 간주하며, 또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문제에 법률적 윤리적 해답을 부여할 수 있게 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정치적 평등의 언어로, 자본주의자체에 대한 의심을 자유에 대한 고려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사회의식의 저지를 돕는 것을 그 과제로 한다. 다양한 형태로 위장되어 나타나는 이런 사고방식은 현실을 밀폐된 칸막이로 분할하고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법률적인 것, 역사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을 면밀히 구분함으로써 특정 문제에 함축된 모든 의미를 결코 알 수 없도록 하며, 또한 사회생활 전체에 대한 통찰로 나아갈지도 모를 어떤 사변적 총체적 사고도 배제하기 위해 모든 진술을 불연속적이며 직접 검증 가능한 것에만 국한한다. 423

 

 

싸르트르의 본래성이나 비트겐슈타인치료요법적 실증주의니체의 계보학이나 또 프로이트의 분석적 상황 자체 등과 같은 역설적이며 자기 연루적인 개념들도, 우리가 여기서 변증법적 자의식이라 기술한 것의 비교적 전문화되고 왜곡된 변종으로 간주하고 싶다. 나아가 러시아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같은 미학적 개념이라든가 실제로 현대예술 도처에 보이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지각의 갱신을 지향하는 심원한 경향등도 변증법적 의식의 운동이 미학적 형식과 미학적 차원으로 나타난 것을 뿐이라고 생각된다...철학적 측면에서 이런 개념들이 진정한 변증법적 사고와 다른 점은 물론,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우리의 지각이 애당초 왜 마비되었던가를 설명하지 못하고 존재론적 결여도 충분히 역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책, 다만 윤리적 심미적 용어로 설명할 뿐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런 지적 왜곡, 즉 상황의 본질적 요소의 구조적 억압은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즉 우리가 사회경제적 진리에 점점 가까이 접근함에 따라 더욱 강력해지는 일종의 저항이나 자기기만이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사회경제적 진리가 철저히 투명하게 자각된다면 당장 우리를 실천으로 몰고 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30

 

맑스주의 대 사회학: 작품의 재정초

 

맑스주의 비평에서 작품이란 엄밀히 말해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처음 행해진 상황과 그것이 누구에 대한 응답이었던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파악할 수 없는, 일종의 몸짓이나 언어적 일격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다시 말해서 맑스주의에 있어 문학에서 사회경제학 혹은 역사로의 이행은 한 전문분야에서 다른 분야로의 이행이 아니라 전문화로부터 구체적인 것 자체로의 이행이다. 이미 앞에서 밝힌 대로 맑스에게 정치경제학은 여러 가지 연구 중 하나가 아니라 다른 연구의 기초가 되며, 현대에서 정치경제학이 인위적으로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로 분할되어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정치학 인류학 등으로 단편화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사회생활을 이해하는 통일된 방식인 정치경제학이 지닌 전복성을 함축적으로 언급한다. 433

 

이데올로기가 적을 비방하면서 동시에 특정 계급의 인간적 위엄과 깨끗한 양심을 선양하도록 고안된다는 점은 우리가 자주 듣지만 또 자주 잊어버리는 교훈이다. 실제로 이 두가지 작용은 하나이며, 문화적 내지 지적 대상인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런 양면구조, 즉 접근방향에 따라 체계나 기능으로 나타나는 사상들의 복합체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명예라는 봉건계율은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계급들을 비방하며,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는 귀족들의 태만과 과시적 낭비를 매도하고, 19세기 중산계급의 남다름이란 개념은 육체적 삶을 영위하는 방식에서 중산계급을 노동자와 분리한다. 436

 

맑스의 계급 개념은 우리가 지금짜지 강조한 변벌적 공시적 차원뿐만 아니라 통시적 차원도 포함한다. 계급은 당대 다른 계급과의 적대적 관계 못지않게 역사적 과정상의 위치에 의해, 역사적 전개의 주어진 특정 단계에 대한 참여로 규정된다. 그러나 계급의 이런 시간적 운명은 밖으로부터, 즉 경제사회의 전과정을 개관하는 외면적 도표나 차트 위에서 측정되기보다 안으로부터, 일종의 내부온도의 상승과 하강 같은 것에서, 다시 말해서 열린 가능성과 역사적 기회의 만조를 타는 자신감이나 아니면 자신에게 빠져드는 일종의 침울 또는 침체와 허망함, 그리고 문이 닫히고 재능이 쇠퇴하고 활력이 낭비되는 듯한 느낌으로 측정된다. 상승기에서 하강기로 옮아가는 한 계급의 기분이 이렇게 바뀌는 현상을 맑스주의는 진보적 혹은 반동적이라는 잘 알려진 정치용어로 묘사한다. 441-442

 

현대적 창조의 모범이 개별 장인의 기술보다는 제도화된 공장노동이 된 만큼 우리는 이제 개인적 측면보다 집단적 측면에서 생각하기를 기대할 것이며, 따라서 동력인은 이미 확립된 과정에 직면한 노동자계급으로 굴절되며, 그들을 고용하는 계급도 포함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펠레스 모형에 따라 자본주의 현실을 제대로 통찰하려면 예술작품을 수제품보다는 생산품으로 간주해야 하며, 생산양식뿐만 아니라 분배와 소비 양식도 다뤄야 한다. 그것은 생산자뿐만 아니라 소비자에 대한 연구도 포함할 것이며, 실로 공급 및 원료의 근원에 대한 문제까지 다루게 될지도 모른다. 448

 

지적 삶의 상품구조에 대해 라이트 밀스는 생산자란 지식을 창조하여 최초로 발표하고, 또 이를 검사하기도 하며, 최소한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시장 부문이 이를 글로 구매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생산자 속에는 아직 지배적 유형인 개인기업가와 사실상 생산단위 관리자인 다양한 연구기관의 법인 간부들이 있다. 그다음에는 도매업자가 있는데, 이들은 스스로 사상을 생산하지는 않고 다른 학자에게 이를 교과서로 배급하며, 그 학자들은 다시 이를 직접 학생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가르치는, 그리고 단지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은 지식과 자료의 소매업자인데, 그중 좀 나은 자는 원생산자로부터, 좀 못한자는 도매업자로부터 공급을 받는다. 모든 대학인은 누구나 다 다른 사람의 생산물의 소비자, 즉 책을 통해서 생산자와 도매상에 대해, 그리고 어느 만큼은 지역시장에서 개인적 담화를 통해 소매상에 대해 소비자가 된다. 그러나 소비만 전업으로 하는 것도 가능한데, 이들은 책의 사용자라기보다 훌륭한 이해자가 되며 서지목록에 밝다.” 449-450

 

계급의식은 사회 전체의 지도나 도표 같은 것으로, 즉 다른 계급과 관련해 나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변별적 감정으로 내부에 간직된다. 455

 

맑스주의와 내적 형식

 

문학의 원료 내지 잠재적 내용의 본질적 특징은 그것이 애당초 결코 무형식이거나 우연적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구체적 사회생활의 요소인 말 생각 대상 욕망 사람 장소 활동이라는 점에서 애초부터 이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술작품은 이런 요소들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애초의 의미를 어떤 새롭고 고양된 의미구성으로 변화시킨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술작품의 창조나 해석이란 결코 자의적 과정일 수가 없다....나는 이것이 제사로 삼은 실러 발언의 유물론적 핵심이라고 믿는다. “나는 미란 한 형식의 형식일 뿐이며 보통 그 내용이라 부르는 것은 이미 형식화된 내용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459

 

비평과정은 내용의 해석이라기보다 내용의 계시이자 드러냄이며, 다양한 종류의 검열에 의해 왜곡된 내용 배후에 있는 원초적 전언과 원초적 경험을 회복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계시는 왜 내용이 그렇게 왜곡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의 형태로 나타나며, 따라서 바로 이런 검열의 기제를 묘사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460

 

공상과학소설 작품에는 환상뿐만 아니라 집단적 삶을 다루며, 또한 우주적 위기를 일종의 전시하의 결속과 사기 같은 것을 부활시키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다른 종류의 환상도 들어 있음을 밝힐 수도 있겠다. 따라서 전지구적 재앙의 생존자들이 함께 모이는 것 자체는 좀더 인간적 집단성과 사회조직에 대한 왜곡된 꿈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 표면의 폭력에는 이중 동기가주어지는데, 그것은 이제 중산계급 생활의 틀에 박힌 일상의 권태를 깨트리고 나오는 것으로도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는 경우에든 위장된 폭력은 이렇게 환기된 무의식적 환상이 실현되지 않는데 대한 분노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변증법적 비평은 이런 관계가 계시되고 다시 한번 드러날 수 있는 방식으로 작품과 내용을 분절화해야 할 것이다. 463

 

헤밍웨이의 마치스모 숭배는 1차대전후 미국의 거대한 산업적 변화에 대처하려는 시도로, 그것은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를 충족하는 동시에 여가를 찬양하며, 또한 전체성을 향한 가장 활력있고 깊은 충동과 오로지 스포츠 속에서만 우리가 온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는 현황을 화해시킨다. ..헤밍웨이에게 희석된 현실, 즉 외국문화와 외국언어의 현실을 다루는 편이 유리한데, 이런 외국문화 속에서 개인들은 우리 자신이 연류되어 있는 구체적 사회상황의 밀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그려낼 수 있는 대상들의 명료함을 지니고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말년에 세계가 바뀌기 시작하고 꾸바혁명이 미합중국 변경 내에서 적절한 은둔처를 제공했을 때, 그를 문체적 무기력과 결국 자살로까지 몰고 간 것은 그가 작가로서 결코 취급한 적이 없었던 이런 미국적 현실이 가해오는 저항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역설은 아닐 것이다. 470

 

현대가 비록 비평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프랑스에서 엉성하게 행해지듯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문학창조의 차원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그다지 어울리는 일이 못되는 것 같다.그보다는 비평이 관련되는 범위와 영역이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계기 자체에 따라 바뀐다고 지적하는 것이 좀더 정직하고 변증법적이다. 그리하여 문학비평이 검열을 피해 사상과 은밀한 정치적 논평을 밀수입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19세기 전제정치에 대항해 투쟁하는 특권적 무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제 외재적 의미가 아니라 내재적 우의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문화작품들은 거의 잊혀져버린 약호의 한 기호로, 더 이상 질병으로 인식되지도 않는 질병의 징후로, 그것을 볼 수 있는 기관을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상실해버린 총체성의 파편으로 나타난다....이제 문학적 사실은 우리 사회현실을 구성하는 다른 대상과 마찬가지로 언급 해석 풀이 진단을 갈구한다. 이때 다른 학문분야에도 호소해보지만 허사일 뿐이다. 영미철학은 위험한 사변능력을 거세당한 지 오래며, 정치학을 보더라도 현재 영미 정치학이 과거의 위대한 정치적 유토피아적 이론들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사실밖에는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하는 절대적 무능력으로 인해 우리 문화에서 사유가 얼마나 질식당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473-474

 

계속해서 내부와 외부 및 실존과 역사를 비교하고, 계속해서 현재 삶의 추상성을 심판하며, 구체적 미래라는 이념을 살려나가는 일은 문학비평이 맡아야 할 작업이다. 문학비평이 이런 과제를 제대로 해낼 수 있기를! 474

 

 

볕뉘.

 

1. 조금 늦게 갈무리한다. 출장으로 다음 저작 후기마르크스주의의 여운이 남아 있다. 포스트모던을 맑스주의에서 재사유한 이 책은 아도르노의 삶과 왜곡, 편견을 다시 살피고 있다. 

 

2. 맑스주의와 형식의 마지막 장인 변증법적 비평을 위하여는 4장까지의 내용을 다시 구도를 잡고 들어가고 나가면서, 씨줄과 날줄을 직조하고, 손끝을 따라가는 이들의 참여를 의도적으로 열어둔다. 적막 또는 숨표, 다시 앞에서 보여준 카드를 보여주며, 이건 몰랐을 것이다라는 놀라움을 주면서 어느 새 얼굴에 식은 땀을 흘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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