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이울다. 봄이 고개를 넘는다. “꽃구경와서 이론이야기 하는 것이 합당한지 모르겠다.”는 말에, “괜찮지 않느냐.”고 건넨다. 어색함이 흐르기 전에 봄꽃처럼 화려한 이론이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딱부러지는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다소 추상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한 전개가 무척이나 인상깊었다.”고 했다. “‘무시받는 것과, ‘인정이아는 높은 미각으로 다시 들여본다는 것이 얼마나 색다른 일이 아니냐.” “그렇게 가슴에서 우려내서 지금의 현실을 다시본다면 얼마나 새로운 담론과 새로운 삶들의 가능성들이 많이 만들어지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유행은 없었고, 가슴에 담는 이도 없고, 자신의 개념에 뒤섞는 이도 없었다. “‘자유평등이란 개념과 달리 특별한 맛이 있지 않느냐. 무시당하지 않게 만들어야 하고, 다른 이들의 인정투쟁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을 토대로 세상을 다시본다는 일이 뜨끔한 것은 아니냐... ...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감에 맞는 생각만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맛있는 상품을 끈질기게 찾으러다닐 뿐, 받아들여 만들지 않는다고, 이름만 나면 눈길이나 줄까? 이름이 나서 더 외면하든가? 아무도 자신의 저류지에서 삶의 저장소에서 출발하려하지 않는다.

 

“‘용인과 달리 인정이라는 것은 위계를 함유하고 있는 것 같다.” 고 전한다.

 

, 그렇지만 이런 시각만으로도 서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야만 되는 것은 아닌가요.”

 

베버를 다시 불러들이고 맑스를 다시 만나는 것은 현실을 더욱 폭넓게 보고, 깊게 보자는 것이지, 이론의 문제점을 더 구성하자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정치철학 역시, 개인으로 사고하는 주체의 문제나, 위계의 문제로 파고들자는 것이 아니라 좀더 다른 관점을 지금으로 끌여내려 현실과 섞자는 이야기라고 전한다.

 

반지성주의의 이면에는 아마 트라우마처럼 실패의 역사를 담고 있거나 아니면 지금 이대로도 과거의 신념을 끌고가기에 벅차다는 우울이 섞여있는 것은 아닐까. 경끼를 일으키듯 한 앎에 대해서는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흔든다. 자신의 생각에는 이식을 시킬 생각조차 없는 듯이 물과 기름인 것처럼 앎과 삶을 이으려하지 않는다. 엘리트면 엘리트일수록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면 할수록 진보라고 자칭하면 할수록 그들의 남과 다르다는 인식은 독특하다. 뭐가 다른지 조차 모르면서 말한다. 절대로 시선과 반성은 자신을 향해 되먹임되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의 올무에 매여있다. 발버둥치면질수록 더 죄이는 악순환에 있는 것은 아닌가.

 

 

 

 

 

 

 

 

볕뉘. 절은 몹시 붐볐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런 번잡함에 고스란히 휩쓸려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얕은 산행으로 지는 꽃들과 푸른 숲이 넉넉했다. 내려오는 길  주고받은 메일에 이어 조금 더 얘기를 나눈다. 잊혀진 독서, 잊혀진 디테일들이지만 구름처럼 남은 느낌들은 여전하였다. 말련의 베버가 선거에도 출마하고 책임으로 정치에 대한 저작도 남겼다. 어쩌면 그것 또한 여운이거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필요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무엇을 애타게 갈구했는지 느끼면 좋겠다고 한다. 곧 자리를 옮긴 절은 한산하고 아름다웠다. 사월의 목련꽃 그늘아래는 참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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