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은 무슨 일인가? 라는 질문, ‘농사일씨 뿌려 거두는 일이다라는 인간의 자신감 어린 대답, 이들 사이의 대화방식 및 과정’, 이 대화에는 단지 농사일이라는 인식 대상의 이름과 씨뿌려 거두는 일이라는 인식 작용의 결과로 얻은 인식 대상에 관한 지식만이 있다.

 

이 대화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빠져 있다. 첫째, 가문, 해일 등과 같은 사람이 관여할 수 없는 일’, 우연이 농사짓는 일에도 늘 개입한다는 점이 빠져 있다. 둘째, 농사짓는 일은 중간태적 작용 과정을 통해 농사일의 존재()’를 찾아서 거기에 이르러 그 일부나마 드러내는 일이라는 점이 빠져 있다. 셋째, 농사짓는 일은 낡은 이름과 고착화된 지식을 버리는, 소위 끊임없는 자기부정의 겸손을 통해서 농사일의 존재()’을 찾아 거기에 다가가고, 농사일의 제모습을 소망하면서 문제를 진단, 처방, 해결해가는 일이라는 점이 빠져 있다. 539

 

정치학의 기존 메타이론이 근대 특유의 인간 자아에 준거하고 있다. 기존 메타이론은 인간 자아의 피부의 경계를 기준으로 자아와 타인을 구별하는 근대 특유의 인간 자아에 준거하고 있다. 어떤 한 인간의 피부의 경계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인간 안의 육체 요소와 정신 요소 간의 내적 관계의 강도는 그와 타인 간의 외적 관계의 강도보다 훨씬 강할 것이라는 가정이 인간 자아의 경계에 관한 가정이다. 기존 메타이론의 연구 대상의 경계에 관한 가정은 이러한 인간 자아의 경계에 관한 가정에 준거하고 있다. 510

 

있음을 언표로도 구별하지 못하는 기존 메타이론은 그 사이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일 수 있는이와 같은 다양한 존재 양상을 알게 모르게 누락시켜놓게 된다. 512

 

기존 인식론적 메타이론이 이러한 결함을 갖게 된 것은 근현대 언어가 단순히 능동태수동태만을 유지하고 있고 중간태를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구술과 문자는 물론이고, 사유와 삶에서도,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 관여하는 일에서도 중간태를 찾아보기 힘들다. 523

 

이러한 중간태는 오늘날 한국어의 경우 자기 스스로 되어간다.’ ‘자기 절로 말한다.’ ‘일이 저절로 된다.’ ‘일이 제대로 된다등에서 스스로’, ‘절로’, ‘저절로’, ‘제대로등의 부사로 그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 영어의 경우에는 This book sells well에서 well과 같은 부사라든지 oneself처럼 재귀용법의 대명사로 그 흔적을 가까스로 남겨두고 있을 뿐이다. 525

 

변화-운동에 관한 기존 메타이론도 환원론적이고, 그 안에 지배와 피지배의 틀깊이 내장하고 있다. 526

 

농사짓는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문제의 원인을 내인, 외인, 내외양인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원인을 추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진단은 단순히 농부 탓이나 씨앗 탓(내인), 혹은 날씨 탓이나 영농자금지원 등의 사회구조 탓(외인), 혹은 그 둘 탓(내외양인)으로 문제를 축소시켜버리기 십상이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진단은 농사짓는 일에 수반되는 수많은 분할선과 분할 과정에서 생겨나는 중대한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고 은폐시켜버릴 수 있다. 530

 

정치학의 기존 방법론들이 정작 인간 자신을 그들의 제반 논의의 최종적인 유일한 근거로 전제하지 않고, 그것과 유사한 다른 것들로 바꿔치기하고, 심지어 바꿔치기한 그것으로 외려 인간 자신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바꿔치기한 그것들의 예는 실증주의의 경우 인간의 오관으로 확인한 사실 fact’, 현상학의 경우 인간의 주관으로 구성한 의미체하는 현상 phemomenon’, 비판적 실재론의 경우 인간의 합리적인 탐구 방법과 절차라는 과학 science’, 유물론의 경우 인간의 노동과 자연이 결합한 역사적 물질 historical matter’ 등이다. 533

 

 

 

안정평등’, ‘자유평등’, ‘조화갈등’, 이렇게 서로 다른 가치 기준들 역시 그 각각이 절대 기준일 수 없다. ‘존재()“에 비추어봤을 때, 그리고 제 모습일 좋은모습(좋음)과 여러 상대적 모습의 절대적 기준인 하나에 비추어봤을 때, 그 각각의 가치 기준은 얼마큼 결여된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가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하는 어떤 가치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어떤 방식이든, 그것은 인간과 함께 하나(절대적 기준)의 자리를 독차지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들이나 다른 방식들과의 결합과 그 결합 비율을 불가피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542

 

정치의 가능성 또한 지배하는 일에만 함몰된 것이 아니라 지탱하는 일 이기도 하다는 점을 밝혀둔다. ..물론 사람이 관여하는 일에서 지탱하는 일이 경향, 정도, 범위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유한자 속에서 무한자가 온전히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지탱이 정치 또한 유한한 현실 속에서 온전히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과정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늘 우연이 개입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자기부정의 겸손을 통해서 농사일의 존재()’(제 모습)을 찾아 다가가고 소망하면서 문제를 진단, 처방, 해결해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 것과 마찬가지다. 546

 

 

볕뉘.

 

1. 토요일 오후 가고싶고 보고싶던 바다를 찾는다. 평온함과 함께 낚시꾼들과 정박한 배들, 미역작업을 하는 포구를 걷다. 그리고 도시풍의 한 카페에서 책의 말미를 본다. 서문에서 주관자는 개요를 보려면 뒷장으로 가라는 안내를 따라갔더니 자신의 글이다. 헛헛한 느낌을 지울 수 없고, 논문 발표한 글들을 모은 것이라고 하여 실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메타정치학이라는 이 논문은 무척 끌렸고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2. 메타비평, 메타방법론, 메타정치학이란 기존 방식의 문제제기에도 마음을 기울이기도 한 연유다. 농사에 대한 비유는 적절하다고 여긴다. 모임에서 일들, 여러 해결해야 할 일들을 살피는데 식물을 키우는 비유가 그래도 과정을 맛보고 함께 나누고 보살핀다는 측면에서도, 과잉애정이 또 다른 결핍을 낳는다는 면에서도 적절하다는 느낌을 갖은 경험때문이기도 하다.

 

3. 조금 더 확대하자면, 주체의 개념때문이기도 한데, 나를 극단으로 몰아 사유한 서구의 학문에 대한 불신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비판으로 평등자유, 주체없는 주체 등등 사유의 확장에 동의하지만 여전히 환원으로 몰고가는 경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4. 보다 낫다고 하는 선민의식, 엘리트 의식은 위에서 언급하는 지배-피지배의 틀을 낫는다. 일상의 모임 역시 대행이나 과정이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듯 뿌리가 깊다. 여튼 반가운 흔적이 있어 고맙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5. 과정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중간태를 살리고 다양함을 살리는 그릇된 길이 아니라는 단서를 잡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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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타사유 - 액터 마르티네즈
    from 木筆 2016-05-10 09:09 
    액터 마르티네즈 - 줌인과 줌아웃, 두 감독과 두 배우. 연기인지 실제인지, 감독이 연출을 가장하는 것인지 드나들며 그 경계를 허문다. 몸으로 쉬는 숨의 몇 장면. 도대체 이런 짓한 게 대체 몇번이야라고 액터 마르티네즈의 분노의 말로 정지된 화면도 영화도 끝이 난다. 볕뉘. 1. '메타' 영화이든, 메타정치학이든, 메타철학이든 다른 관점에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일 것이다. 기존의 관점이나 시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고 하기때문에 극단까지 밀어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