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존재 이유가 있다. 만약 사회학이 어떤 한 개인의 삶도 설명할 수 없다면, 혹은 그 연구대상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다면, 사회학은 학자라는 전문가 집단의 호사스러운 말잔치가 만들어 낸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6

 

세속 풍경을 담아 책으로 완성하는 동안 삶의 평범성이 학문적 보편성의 근원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존중하고자 했다. 8

 

쌀은 누룩을 만나야만 술이 된다 했다. 이 책은 이름난 명주가 아닐지라도 잔치를 위해 정성과 관심으로 빚은 술과 같다. 술을 나누는 자리를 우리는 잔치라 하고 서양에서는 심포지엄이란 한다. 이 책은 우리가 함께 바쁘다는 핑계로 돌아보지 못했던 자신의 삶과 마주치는 잔치로의 초대장인 셈이다. 11

 

좋은 삶은 특별한 삶이 아니다. 좋은 삶이 특별한 삶으로 귀착된다면, 좋은 삶에 대한 그리움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언감생심이 아니겠는가? 특별한 삶은 제로섬게임의 승자에게만 보장도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특별한 삶은 오르지 못할 나무에 불과하다. 특별한 삶과 달리 좋은 삶은 제로섬게임의 관계가 아니라 화수분처럼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호혜의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좋은 삶이라는 궁극의 뜻에 가까워진다. 16

 

좋은 삶은 선물 받을 수도 없다. 좋은 삶은 삶의 주인의 오랜 습관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좋은 삶은 단지 선한 의지로만 구성되어 있는 빈한한 삶과도, 지혜와 결합하지 못한 영악함으로 구성되어 있는 화려한 삶과도 다르다. 17

 

성공의 비법으로 처세술을 타락시킨다면 우리는 처세술 습득을 위해 자기계발서를 읽어야 하겠지만, 좋은 삶을 향해 가는 비법이라는 의미의 복원된 처세술을 위해서는 자기계발서 대신 세상물정의 이치와 냉정하게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18

 

세상은 분명 아름답지만 언제나 세상이 아름답지는 않다. 세상은 아름다운 만큼이나 추하고, 사람들은 선한 만큼이나 악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지만, 짐승만도 못한 인간도 있는 법이다.....좋은 삶에 대한 기대는 약간은 가슴 쓰라린 세상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공통감각을 상실한 애절한 신세타령이 아니라 삶의 보편성에 의한 공명을 지향하는 사회학은 이럴 때 쓸모 있는 학문이다. 20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전문화화된 분과학문으로 한국에 수입되면서, 신을 대신해 감히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설명한다는 사회학적 정신은 사라졌다. “내가 생각한다는 정신과 결합하지 못한 채, 책을 통해 수입된 이른은 세상으로서의 사회세계로서의 사회사이를 중재할 능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사회이론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의 느낌과는 유리된 자폐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261

 

우리의 공부는 학부생이든 교수든 막론하고 훈고학적 주석 달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다. 책 속에서는 생각했지만, 세속 속에서 내가 생각하지는 못했다. 어느새 책이 없으면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해 있던 것이다. 262

 

모범생은 밑줄 쫙!”이 능하다. 모범생은 퀴즈에 단골로 출제할 예상 문제를 잘 정리한다. 그래서 모범생은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범생에게서 삶에 대한 성찰의 깊이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기계의 암기하는 책 읽기는 그 순간을 위해 억지로 참아내는 과정이지, 도서의 즐거움이나 깨달음의 황홀함과는 거리가 없다. 263

 

사회학자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학이 사회 이론에 대한 해설의 지위가 아니라 세속을 영위하는 삶의 문제에 대한 탐색의 지위로 옮겨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사회학자는 세상으로서 사회세계로서의 사회연결하는 중재자 헤르메스가 되어야 한다. 265

 

콜드팩트와 마주했을 때 발샏할 고통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고, 고통을 치유해 준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당신의 고통은 당신 탓이 아니라는 점이다....상처받는 삶은 창처받는 사회를 치유하지 않은 채 치유될 수 없다...힐링 대상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각자가 살고 잇는 사회임을 깨닫게 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죄가 없는 개인들이 죄가 많은 사회에게 불만을 말하는 애처로운 시도다....그 외로운 노래가 합창이 될 때, 상처받는 사회는 비로서 자기 치유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66

 

 

상식

 

감옥에 갇힌 그람시는 지식인의 한계에 대해 생각한다. “대중적인 요소는 느낌인 반면 항상 앎이나 이해는 아니다. 이에 반해 지식인적 요소는 이지만, 항상 이해는 아니며, 특히 느낌은 더더욱 아니다......지식인의 오류는 이해나 심지어 느낌 및 열정 없이도 알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즉 민중의 기본적 열정을 느끼고 이해함이 없이도 지식인일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 대중의 느낌을 장악하지 못하는 한 진보주의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도 대중을 얻지 못한다. 30

 

참된 철학적 운동이란 몇몇 제한된 지식인 집단 사이의 특수한 문화를 창조하는데 그치는가, 아니면 상식보다 우월하며 과학적 정합성을 갖는 사상형식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조차도 결코 순진한대중과의 연관성을 잃지 않고 또 바로 그 속에서 실로 자신이 참구하고 해결해야할 과제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은 연관성을 잃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철학은 역사적으로 되며, 한 개인의 지적 호기심을 넘어서는 이 되는 것이다.” 32

 

명품

 

명품은 자본주의가 승자에게 선물하는 훈장이다. 나카무라 우사기는 명품의 본질을 잘 간파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부자라는 영광의 골을 향해 맹렬하게 싸우는 게임이다. 그리고 명품은 그 게임의 경품이다.” 39

 

명품계는 돈이 부족한 중산층이 상류층을 따라 하기 위해 고안해 낸 몸부림이다. 아웃렛과 면세점은 중산층의 또 다른 탈출구이다. 40

 

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 따위에 아예 관심도 없다. 하지만 한쪽 발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다른 한쪽 발은 욕심을 충족시켜 줄 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딛고 있는 중산층이 가장 가련하다. 중산층은 럭셔리 유행을 따라 하기에는 돈이 너무나 부족하고, 유행과 거리를 두기에는 자본주의의 훈장이 너무도 탐이 난다. 39

 

유권자가 소비자가 되는 사회에서, 소비주의는 개인의 무거운 선택을 가벼운 선택으로, 정치투표장에서의 고민을 백화점에서의 고민으로, 정치적 권리인 자유를 경쟁하는 브랜드 중 무엇을 고를 것인가의 자유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부자들의 불법 상속에 무관심해지고, 쇼핑몰에 습관적으로 북적대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투표율은 낮아지고, 고객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공적인 일에 분노하는 사람드은 줄어드는 법이다. 41

 

프랜차이즈

 

맥도날드화는 진보처럼 보인다. 합리화의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낡은 것들은 목아내리낟. 합리화의 비를 맞고 화려한 꽃들이 활짝 피기를 기대했지만, 합리화 그 이후 펼쳐지는 풍경은 모노톤이다. 도시의 장소감은 사라진다. 프랜차이즈 체인이 장악한 도시의 풍경은 서로가 서로를 복제한 듯 비슷해진다. 가맹점 옆 가맹점 또 그 옆의 가맹점이 연속으로 늘어선 풍경에선 삶의 다채로움이 빚어낸 지역 특색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과 유동만을 읽어낼 수 잇다. 프랜차이즈 체인망은 공간에 축적되어 있는 자본의 모세혈관 밀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이다. 50

 

그 속에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그 체인망이 제공하는 일자리는 고작해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일 뿐이다. 합리화의 끝에서 만나는 어이없는 비합리성은 합리화된 대학도 피해갈 수 업삳. 50 하나하나의 합리성이 모여 비합리성을 연축하는 순간 작은 합리적 선택이 쌓여 빚어낸 거대한 비합리성 속에서, 자본의 지배가 확대되면 우리는 자본의 울타리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쇠 감옥에 갇힌 꼴이 된다...자본은 서로 싸우지 않고 모세혈관을 도시 곳곳에 심어 놓기에 바쁜데, 그 모세혈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가련하게도 마주 보고 있는 빵집끼지 서로 경쟁하느라, 나란히 붙어 있는 서로 다른 편의점 덕택게, 마주 보고 있어도 곁에 있어도 서로 이웃일 수 없는 비합리적인 무한의 생존경쟁을 반복하고 있다. 52

 

해외여행

 

우리의 상식 속 나라 사이의 관계는 수능시험 등수처럼,나라별 올림픽 메달 순위처럼 수직적이기만 하다. 수직적 관계만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람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 앞에선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지 못하고, 뒤에 있다고 생각하면 근거 없이 깔보기 일쑤다. 57

 

슬프게도 우리의 여행은 선진국에서 주눅 들고, 후진국에선 선진구에서 주눅 들었던 감정을 보상받기 위해 돈지랄을 떠는 진자운동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항공사 마일리지 점수가 쌓이고 쌓여도 벗어나지 못하는 유길준의 안경을 쓴 우물 안 개구리 신세, 해마다 휴가철 공항에는 우물 안 개구리의 울음으로 가득하다. 60

 

군중

 

군중을 폄하하지 않고 기다리면, 군중 속에 공중이라는 꽃이 피는 순간이 다가온다. 하지만 사람의 떼가 군중이어야만 이득을 얻는 패밀리는 공중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공중은 자신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세력이지만, 군중은 자신들의 악행을 숨길 수 있는 가장 좋은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중에서 공중이라는 꽃이 피는 순간을 기다리지 낳고, 군중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의심해야 한다. 그는 마피아 집단의 비밀 멤버이거나, 뻣속까지 엘리트주의자이다. 70

 

수치심

 

소비자본주의는 수치심 자극이 그 어떤 판매 기법보다 효과적임을 알아챘다. 궁정의 쿠르투아지가 귀족에게만 수치심을 자극했다면, 소비자본주의는 대중의 수치심을 이용한다. 소비자본주의가 확대될수록, 대중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자극하는 영역은 점점 넓어진다. 자연스러운 노화현상으로 받아들여지던 이마의 주름이 창피해진다.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던 이마의 주름이 창피해진다.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고 나서면 망신스럽다. 휴가를 해외로 다녀오지 않았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골프는 쳐야 하고, 등산복의 소재는 최소한 고어텍스여야 한다. 자동차는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커야 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체면이란 관념적 상태가 아니라 소비 수준의 증명이 된다. 142 이제 개인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 라이프스타일조차도 단어의 뜻이 바뀌어 소비의 대상이된다. ‘라이프스타일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소비주의의 타깃이 되면, 삶을 영위하는 방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더 이상 삶의 방식은 개인의 신조를 따르지 않는다. ‘라이프스타일은 수치심을 느끼지 낳기 위해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142

 

우리가 입 냄새떡진 머리와 같은 사소한 수치심에만 예민해져 있을 때, ‘공금횡력’, ‘불법상속’,‘논문표절’, ‘위장 전입과 같은 짓을 한 후안무치 단어로도 부족한 사람들이 텔레비전에등장해 속류화된 수치를 가르치고 있다. 속류화된 수치에만 민감해진 문명화된 사회의 지독한 역설이다. 144

 

성공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갈수록 늘어나고, 금력 앞에서 권력도 맥을 못 추는 자본주의의 법칙이 확장되는 사회에서 성공은 인생의 옵션이 아니라 정언명령과도 같다. 121

 

하늘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론이란 장르의 규칙에 따르면 이 세상의 사람은 오직 두 종류로 구분이된다. 한편에 누구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다른 한편에는 실패한 사람이 있다. 두 번째는 성공과 실패를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는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이다. 셋째 자기계발서는 성공을 보장하는 책이 아니라, 심리적 위안을 선물하는 책이다. 역설적으로 자기계발서의 독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뿐이다. 124-6

 

현실의 계급 법칙이 던지는 질문 앞에서 나는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계발서를 읽지만, 현실의 원리를 아는 영리한 사람은 자기계발서의 장르 규칙을 파괴하고, 차라리 넓고 깊은 이분법의 양쪽 언덕을 이어 계급 법칙을 완화하는 다리를 짓는다. 동정의 다리에서 한계를 느낀 사람은 두 번째 공감의 다리의 설계도를 들여다 본다. 실업으로 인해 생활고를 겪고 있는 불우이웃을 선의의 감정에 따라 동정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과 달리,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 사람을 실패로 몰고 간 실업이 자본주의에 살고 잇는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보편적 위험이라는 인식을 놓치지 않는다. 공감은 동정이라는 따듯한 감정으로 냉혹한 현실을 잠시나마 가릴 수 있다는 낭만적인 태도와도 거리를 둔다. 동정의 다리 위에선 이따금 불우이웃돕기 모금이나 자선바자회가 열리지만, 공감의 다리 위에선 복지라는 제도의 나무가 자란다. 공감이 복지를 감정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복지는 공감에 제도의 옷을 입힌 것이다. 127

 

역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그가 남긴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구절은 장엄하게만 보이는 역사의 개념에 들어붙어 있는 공허함을 파괴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82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된다. 이 말은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의 매 순간순간이 인용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듯이다.” 87

 

종교

 

종교화에 깃들어 있는 성스러운 아우라가 상실되는 기술복제 시대의 사상가 벤야민은 그러한 시대를 낳은 자본주의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종교의 숨겨진 놀라운 유사 상동성을 발견했다. 종교의 전제는 근심이다. 근심, 걱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은 종교적 설득에 무덤덤하다. 근심이 없다면, 종교가 약속하는 구원도 매혹적이지 않은 관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원은 근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약속이다. 104

우리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지 않고서도 삶의 계급 구속력이라는 개념을 어느새 몸으로 익힌다. 삶의 계급 구속성이 몸에 밴 사람의 머릿속에선 걱정이 떠날 틈이 없다. 벤야민의 말처럼 격정들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 자본주의 속에서 산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인 탈출구 없음을 의미한다. 105

 

종교는 사람들의 걱정을 건드리고, ‘걱정을 대신해 구원을 약속한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현실적 걱정은 많은 경우 자본주의의 법칙에서 유래하는데, ‘걱정의 원천인 자본주의는 동시에 우리에게 자본주의적 구원을 약속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일종의 종교의 기능을 한다. “자본주의에서 일종의 종교를 볼 수 있다. 즉 자본주의는 예전에 이른바 종교들이 그 답을 주었던 것과 똑같은 걱정, 고통, 불안을 잠재우는 데 핵심적으로 기여한다.”106

 

종교에서 인간의 구원이 신에게 달렸다면, 종교가 된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돈에 의해 구원된다는 차이만 있다. 106

 

 

섹스

 

모든 형태의 친밀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타인과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이 타인은 다시금 친밀한사람으로 변하고,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다시금 유쾌하고 강렬하지만, 이 경험은 다시금 차츰 덜 강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바라게 된다. 162

 

섹스를 하기 위해 결혼이라는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는 세대, 섹스가 곧 결혼 약속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섹스는 일상적인 요소가 된 것만큼이나 관계의 지속성 불안을 유발하는 근심거리이다. 163

 

노동

 

임금노동이 평범한 사람들의 운명과도 같은 무게감을 지닌다면, 그 운명에 맞서는 방법 중 하나는 임금노동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을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연대라 한다. 연대가 지배적인 사회에선 거대한 공통분모에 주목하고 복지라는 수단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는 임금노동이라는 굴레를 헐겁게 해 주지만, 연대라는 단어를 살해한 사회에선 누구나 자신마늬 예외만을 꿈꾸며 임금노동의 세계로부터 혼자 탈풀할 궁리를 한다. 192

 

사포를 던지는 짜릿한 순간 만큼 복권 당첨이란 짜릿한 백일몽을 꿈꾸게 된다. 이는 징후이고 꿈일 뿐이다. 해결책은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다고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복권 따위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세상에는 복권을 사는 사람과 복권을 기대하지 않고 연대라는 죽어 버린 단어에 귀기울이는 임금노동자 두부류가 있다. 193

 

 

게으름

 

게으를 권리를 농담으로 들으면 부지런하지 못한 인간의 자기변명이지만, 진지하게 들으면 인간을 파괴시키는 노동시간을 주리자는 것이지요. 혼자 피우는 게으름은 패악이지만, 사회가 허용하는 게으름은 사람의 목숨까지 살린다오. 일하다가 죽는 과로사를 조장하는 개미들의 사회가 정상이라 할 수 있나요? 202

 

메이 앤 워클리 195

 

인정

 

인공 조미료를 흠뻑 뒤집어쓴 정크푸드화된 인정이란 단어는 성공과 단순 등치된다. 정크푸드의 달콤한 속삭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명예와 품위를 훼손당한 사람들이 자기 존엄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투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에게 인정이란 사물로부터의 인정에 다름 아니다. 몰고 다니는 자동차의 크기가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명절날 선물로 들어오는 갈비세트의 무게와 위스키의 숙성 연도로 인정 여부를 확인하는 사람들은 정작 자기 존엄에는 둔감하면서도,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물에 둘러싸여 있지 않늘 때만 모욕을 느끼는 물신화된 심성을 지니고 있다. 210

 

자기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인정투쟁을 이해못하는 사람들이라면, 개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인정투쟁을 벌이는 시위대를 보고도 아니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그만이지 인정이라니 웬 지랄들이래?”라고 말을 뱉어 낼 주제들이다. 212

 

 

개인

 

상품을 통한 개인 회복의 한계는 분명하다. 개인의 구원은 상품소비에 의한 개성 회복이 아니라, 개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를 문제삼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개인 구원의 최종 책임은 개인에게 있지 않다. 우리는 그 책임을 개인을 둘러싼 사회에 물어야 한다. 집단적 통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개인에 대한 관심이 이기심을 부추긴다고 협박하지만, 개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최종 책임의 담지자인 사회와 마주하게 된다. 219

 

침해받을 수 없는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자기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경제적 개인주의는 다르다.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을 때, 오히려 국가와 사회가 개인을 무명씨로 강요하는 악행의 근원일 때,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나만 잘살면 된다는 경제적 개인주의로 후퇴한다. 221

 

개인에 대한 관심은 나의 이익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작은 단위 속에서 반복되는 사회라는 커다란 단위에 대한 생각이다...자기 속에서 사회를 발견하는 사람은 개인을 언급할수록 품이 넓어진다. 222

 

가족

 

성인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을 담는 그릇이다. 229

 

 

편안함은 집의 시설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건물이 지어지면 처음에는 건축물이 사람에게 적응하라고 명령한다. 이미 잘 짜인 공간 속에 거주자의 의지가 들어설 틈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거주자가 텔레비전을 놓고 이부자리를 깔고 조석으로 음식을 하면, 도도한 듯 적응하라고 명령을 내리던 건축물에 거주자의 냄새가 밴다. ..오랜 세월의 때와 사람의 냄새가 장판과 벽지 위에 살며시 내려앉으면, 모든 이의 집은 세상에서 제일 내밀하고 안전하고 편한 곳이 된다. 234

 

좋은 집을 꿈꾸는 사람들은 시세 차익만을 생각하는 탐욕스러운 사람보다는 선하다. 하지만 좋은 집에 대한 꿈은 부동산 세계의 극과 극 사이에 끼인 중산층의 선한 꿈이다. ‘좋은 집에 대한 꿈은 부동산 난민에게는 언감생심이며, 부동산 재벌에게는 순박한 공상일 뿐이다. 237

 

인간은 정주를 꿈꾸지만, 자본은 정주를 업신여긴다. 자본은 부동의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자본은 정주하고 싶은 사람의 꿈을 하찮게 여기며 유동의 자유를 강조한다. 자본이 이윤을 쫓아 이동하면 할수록, 거주의 터전에선 막대한 규모의 난민이 만들어진다. 238

 

성숙

 

배움이 넘치는 우리 사회는 군자는 아니어도 최소한 성숙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품격 있는 나라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배움에 투자했지만 싸가지 없는 애들과 주접스런 중년나잇값 못하는 늙은이들이 뒤섞인 지하철 풍경은 배움이 사람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철썩 같은 믿음을 접도록 만든다. 241

 

양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한 성장성숙을 대체하여 삶의 목표가 되는 사회에선, 배움조차 성숙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수단이 된다. 전 국민이 죽어라 공부하고 졸업 후에도 승진하기 위해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지식사회의 외양은 갖추었어도 성숙이라는 목표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배운 사람과 성숙한 사람은 일치하지 않는다. 245

 

성장이 성숙으로 귀결되지 못함이 너무나 분명할 때, 차라리 성장하지 않겠다는 귄터 글라스의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의 선택은 오히려 성숙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246

 

죽음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매일매일 조금씩 노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한 발자국씩 죽음에 다가서고 있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시장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우리의 평범한 인생이라는 통찰이 헛헛함을 남긴다면, 삶의 그 쓸쓸함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노화는 젊음의 상실이지만, 그 대가로 원숙함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비록 젊음은 잃었지만 그 대신 원숙함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젊음만을 잃고 원숙함도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252

 

 

볕뉘. 주말 글을 쓸 일이 있어 도서관에서 빌리려고 했는데 연체중이라고 한다. 일요일 빌려 읽는다. 메모지가 없어 여기저기 문구를 전전하다 포스트잇을 구해 흔적을 남기고 흔적을 다시 들추고 몇번을 오고간다. 그러다보니 저자와 편집자의 노고가 읽히기도 한다. 설렁설렁 읽고 지난 기억때문에 바랜 흔적들을 돋군다. 상식과 양식, 그람시의 시선에 다시 한번 머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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