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서 상징과 기능

 

건축은 기능이라는 측면 외에 표현이라는 전반적 영역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더욱더 경건함을 느끼게 하며, 대학에서는 더욱더 학구적인 느낌을 갖게 합니다. 사무실에서는 더욱더 사업적이고 능률적인 느낌을 갖게 하며, 도시를 돌아보고 그 다양한 삶에 참여하면 더욱더 시민답고 협조적이며 책임감을 갖게 하고 자신이 봉사하는 공동체를 더욱더 자랑스럽게 여기게 합니다. 건축은 배우들에게 완벽한 도움을 주어 그 사회적 드라마가 연기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의 지속적인 무대 장치입니다. 152

 

건축 작품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쇠퇴가 기술적 쇠퇴보다 더욱더 치명적입니다. 하나의 건물이 무의미하게 되면, 여전히 서 있다고 해도, 시야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현대 건축은 사람들이 낡은 상징주의 양식이 더 이상 현대인에게 말할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 그리고 반대로 기계가 낳은 새로운 기능이 현대인에게 말할 특별한 것을 가졌음을 깨달은 순간 나타났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새로운 진실을 현실화하는 행위 속에서 기계적 기능은 표현을 흡수하는 경향에 빠지거나, 더욱더 광신적인 사람들은 표현의 필요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경향에 빠졌습니다. 153

 

그런데 우리의 기술공정이 아무리 빨리 변한다고 해도, 표현에 대한 요구는 모든 문화에 언제나 남기 마련입니다. 표현 없이는 삶의 드라마가 진행될 수 없고, 줄거리 자체가 중심 없이 공허해집니다. 삶이란 반드시 의미, 가치,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고 맙니다. 즉 우리는 눈을 뜨고 있으나 장님이고, 귀가 뚫려 있으나 귀머거리이며, 입술을 움직이지만 벙어리인, 발로 서 있는 죽은 송장이 됩니다...각 시대는 그 자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160

 

인간의 개성을 낮게 평가한 사람들은, 특히 감각과 정서를 순수한 지성에 종속시킨 사람들은, 기계에 대한 과대평가로 그들의 잘못을 보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계만이 감각과 물리적 힘이라고 하는 무의미한 세계에서 삶의 목적을 표상합니다. 그 결과 기계는 인간이 이용해야할 도구가 아니라, 숙고해야 할 상징으로 변하게 되고, 현대 생활 전체와 동일시됐습니다. 162

 

현대인의 다원적 세계에서는, 주관적 관심과 가치, 정서와 감각이 객관적 환경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즉 삶을 성장시키는 것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하는 권력과 표준화된 상품의 성장보다도 더욱더 중요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163

 

모든 건물은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필요성과 마찬가지로 문화적이고 인간적인 목적에 의해서도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유기적인 기능주의는, 기계적이고 생리적인 해결만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국의 하원의사당을 재건축할 때, 윈스턴 처칠이 평상시의 의원들이 참가하는 상태에서 토론의 긴밀성과 친밀성을 유지하기 위해 좌석수를 의원수보다 상당히 적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현명한 처사였습니다. ...르코르뷔지에와 함께 기계화와 비인격화가 현대 건축의 만능적 요소로 간주된 1920년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은 상당히 부당한 비방을 받아야했습니다. 라이트의 작품에서는 주관적이고 상징적인 요소가 기계적 요건과 마찬가지로 중요했습니다....매튜 노비츠키는 모든 건물은 말을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말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물리적 기반에서도 엄격했던 노비츠키의 건축은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성과 개성이라는 차원으로까지 올라갔습니다. 겸양과 인간적 공감을 통해서, 삶의 모든 순수한 표현에 대한 존경을 통해서, 그는 동시대의 다른 어떤 건축가에게도 없던 유기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 지역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추상적-합리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을 더욱더 완전하게 화해시키는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164-5, 170

 

예술, 기술, 문화적 통합

 

기본적인 가정은 우리의 삶이 점차 서로 무관하게 구획으로 나누어지고 있고, 그 구획 속의 질서와 상호 관계의 형태만이 실제로 우리의 일상 실존을 지배하는 자동적 조직과 메커니즘에 적합한 것으로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율적 개인의 기본적 능력, 즉 자신의 목적에 따라 ’, ‘아니오를 말하여 결단을 내릴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기술의 높은 발전을 통해 우리의 힘을 엄청나게 증대시켰음에도, 그런 힘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치유책은 질병 자체의 징후를 더욱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됐습니다. 175

 

우리 시대에서 살펴보고자 애쓴 상태는 본래 인간 사회에 나타난 예술과 기술의 상태라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인간은 상징을 주술적 힘으로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언어든 이미지든 간에 상징은 인간됨의 핵심 그 자체였고, 순수하게 본능적인 동물의 지능을 뛰어넘는 탈출을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상징은 인간을 건방지게 만들었고 상징이 촉진하는 도구와 과정을 저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바로 그 반대의 조건이 지배적입니다. 우리는 상징에 대한 비굴한 의혹과 신랄한 냉소로 가득 차 있습니다....모든 상징의 가치를 저평가한 시대가, 기계 자체를 보편적 상징으로, 즉 숭배해야 할 신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술도 기술도 건강한 상태에 있을 수 없습니다. 176-7

 

에술가는 예술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기 있고, 내 속에서 삶은 하나의 형식을 취합니다. 나의 삶은 내가 그 의미와 가치를 완전하게 습득하기 전까지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내가 보고 느끼며 생각하고 상상한 것은, 나에게 중요하게 여겨진 것입니다. 그토록 중요하기에 나는 상징과 형식이라는 공통 언어를 통해, 표현 그 자체의 행위를 통해, 나 자신 속에서 절정으로 끌고 간 어떤 집중과 열정적인 환희를 가지고, 내가 보고 느끼며 생각하고 상상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예술의 힘을 빌려 나는 여러분에게, 현존하는 생애의 경험을, 생애의 수많은 가능태를 드립니다. 이러한 미적 계기들은 삶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이런 새로운 의미는 다른 미적 계기와 함께 삶을 고양합니다.” 177

 

예술 속에서 인간은 타인에게 창조성이라는 비슷한 반응과 비슷한 행위를 고취하면서, 본래 그 안에 살았던 생물체보다 더 오래 남는 껍질을 만듭니다. 그 결과, 세계의 모든 부분에는 결국 인간 개성의 어떤 흔적이 남게 됩니다. 이렇게 정의된 예술은, 과학과 기술에 반목하지 않습니다. 과학과 기술도 인간적 감정과 인간적 가치의 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반대는 무감각, 몰개성, 창조성의 결여, 공허한 반복, 무의미한 일상이며 벙어리 같고, 무표정하며, 형식이 없고, 무질서하며, 실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삶입니다. 178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문화발전을 인도적이고 유기적 단계와 무미건조한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기계 문명의 지배로 자신의 운명을 이해한 사람들이 기업 활동을 위해 서정시를 포기하고, 기술 공학을 위해 그림과 음악을 포기할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 인간의 자살은 삶에 대한 더욱더 전반적인 과소평가와 허무주의와 자기소멸을 낳습니다. 180

 

오늘의 삶이라는 위대한 드라마를 위한 가장 호소력 있는 표현의 근원은, 분열과 해체를 극복하는 노력,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은둔이 아니라 참여에 의해, 도피가 아니라 삶을 위협하는 힘을 정복함에 의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을 위한 주도권의 회복에 실패한 것, 내면의 평정을 회복하고 우리의 숨은 욕망을 확인하며 침몰된 희망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상징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 ‘절망의 수렁에서 우리를 끌어낼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은 모두 예술에만 특유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거의 대부분의 다른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87

 

우리는 기계의 죄수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가 기계의 죄수라고 해도 우리가 감옥을 만들었고, 우리 스스로 감옥의 규칙을 만들었으며, 우리 스스로 자신을 간수로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스스로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고 이 음침한 감옥에 자신을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옥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기계 신도들이 그렇게 믿도록 스스로를 속여 온 것처럼, 그 감옥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경험의 특수한 측면에 집중한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벽은 인간의 정신이 나팔을 불고 물질이 아닌 인간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면 예리코의 성벽처럼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195

 

더욱더 냉정하고 강제적인 형식 속에서의 기계가 더욱더 지배한다는 점이 아니라, 삶의 재생이야말로 우리시대의 중요한 테마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를 위한 첫걸음은 주도권을 쥐고, 삶을 위한 우리 자신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또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를 지배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우리 자신을 판에 박힌 일상생활로부터 충분하게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사물을 장악해야 합니다 그 규모가 아무리 거대하다고 해도 예술이 한쪽으로 치우친 기술의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창조나 재창조로서의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의 상태와 구조 속에 우리를 두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멈추어 서서, 침묵하고 우리의 눈을 닫고서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95

 

 

볕뉘.

 

 1. 왜 (로)봇의 도덕인가라는 책은 최근 연구동향을 반영하면서 철학, 윤리, 문화, 기술 전반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있다. 말미 인공지능의 출현이나 종합적인 노력에 긍정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두고있긴 하다. 반면에 빅퀘스천은 칼럼 글을 옮기었으며 유명세와 달리 모든 것을 말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책이었다. 잘나가는 평균이상 저자의 책을 읽지 마라는 충고가 책장을 덮자마자 밀려왔다.

 

2. 꽃잎도 떨어지고 한산한 동네 도서관에서 예술과 기술의 책장을 마저 덮었다. 기계의 죄수, 기계의 감옥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우리라는 표현에서 루쉰과 베버의 쇠감옥이 다시 떠올랐다. 삶의 재생, 객관화를 가장한 주관의 포기, 이성을 빌미로 한 감성과 감각의 포기. 삶이라는 표현은 추상인 것일까? 온전한 것일까? 객관과 주관을 동시에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것일까?

 

3.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이 표현은 무진기행에 나오는 무진의 안개에 대한 묘사이다. '삶'은 그런 것일까?

 

4. 저자는 기독교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순간 로마가 육교, 상하수도, 도로포장 토목사업을 멈추고 교회와 수도원을 짓기시작하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근본적인 변화라고 그것은 가능할 것이라고 말이다. 삶의 재생, 우리의 상상력이 멈추어 선 지점은 어디일까? 60년전의 이야기라 너무 구태연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