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이래 그림은 벽화나 유화의 형식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판화라는 값싼 매체로 가정에 들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성을 상실한 대가로 친근성과 다양성, 광범한 보급성을 얻게 됐습니다. 수준 높은 예술에 여전히 좋은 작품들이 풍부했을 때에는, 이러한 통속적 복제품도 원화가 갖는 많은 장점을 간직했습니다....그것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하는 민주주의의 승리였습니다. 이 명제는 정치에서 제창되기 오래전에 예술에서 성취됐습니다. 127
사진의 참된 승리는 사진가의 매체에 대한 존중, 자기 앞에 있는 사물에 대한 관심, 그날의 시각과 빛의 성질 및 움직임, 감광판이나 필름의 감도, 렌즈 윤곽의 영향을 받는 눈앞을 지나치는 수많은 이미지 중 아나를 선택하는 능력과 같은 요인들이 자신의 의도와 합치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선택의 마지막 순간에 – 이는 사진을 찍는 시점에 생길 수도 있고, 수없이 인화를 해 본 뒤에 생길 수도 있는 – 인간적 개성이 다시 작동하게 됩니다. 즉 그 순간, 오직 그 순간, 인간의 정신을 반영한다는 이유에서 기계제품은 진정한 예술작품이 됩니다. 132
과거에는 그림이 희소한 종류의 상징이었고, 주의 깊은 집중을 요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는 실제의 경험이 희소하게 되었고 그림은 어디에나 있게 됐습니다. 마치 경기장에서 경기를 참가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인 반면 텔레비전으로 그 경기를 보는 사람은 수천 명이듯이,....우리의 세계를 2개의 계급으로 급속히 나누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복제 과정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소수이고, 다른 하나는 삶 전체를 이러한 복제 과정의 수동적 감상자나 자발적 희생자로 낭비하는 다수입니다. 135
너무나도 지속적이고 끈질기며 집요하여 우리 자신의 모든 목적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내면적 충동이나 자주적인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이미지들입니다. 이 전반적인 기계적 과정의 결과로, 우리는 더 이상 다차원의 현실 세계, 즉 앙상한 골격으로부터 가장 부드러운 정서에 이르는 인간성의 모든 측면이 활동하는 세계에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를, 대체로 시각적 상징물의 대량 생산을 통해 – 실제로 음향의 재생과 증폭이 선동하는 – 모든 사람이 간접적이고 파생적인 삶을 사는 간접적 세계, 유령의 세계로 바꾸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실제 존재의 이 창백한 환영을 히데스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그림자 왕국이 우리의 기계적이고 황금만능 문화의 궁극적 목적지여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36
에술가는 거대 광고업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사용되는 묘기와 유사한 과장과 왜곡이라고 하는 과정을 지나도록 강요당합니다. 따라서 ‘더욱 빨리, 더욱더 빨리’라는 수량화의 원리는 ‘더욱 시끄럽게, 더욱더 시끄럽게’라는 선정주의를 유도하게 되고, 이어서 예술가가 사용하는 상징의 의미에도 영향을 미쳐 ‘더욱 공허하게, 더욱더 공허하게’로 나아갑니다. 이는 대량 생산과 그것과 경쟁하는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무거운 대가입니다. 138
토크빌이 지난 7세기 통안의 본질적인 명제로 설명한 과정인 평등화라는 전반적인 민주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기계화는 상향적인 것이든 하향적인 것이든 간에 모든 방향에서 참된 평등화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경우 그 실제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비선택성이라고 우리의 뿌리 깊은 습관으로 인해 그 결과는 상상하듯이 그렇게 다행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140
“좋은 것도 너무 많이 가지면 지나칠 수 있다”로 표현했는데 그 잠언의 배후에는 인류의 오랜 경험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것도 많이 가지면 지나친 일은 실제로도 있습니다. 사실 강렬한 경험일수록 그만큼 가치가 있고, 많을수록 지속은 더 짧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너무나 잦은 축복은 저주가 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기계의 선물인 규칙성과 반복성은 신체의 반사 조직에 해당하는 삶의 그런 측면에 한정돼야 합니다. 141
미술관의 위대한 예술 작품은 볼 때마다 새로움을 주는 충격과 환희의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한 작품은 그 의미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즉 너무 자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험의 희소성이야말로 환희를 위한 필수적 준비입니다. 리듬과 간격이 없다면 오로지 포만과 권태가 있을 뿐입니다. 143
복제 과정을 그 극단까지 밀어붙인 사람들은 예술의 본질적 성격인 독창성을 잊고 있습니다. 모든 활동의 배후에는 일종의 질서와 형식이 지배적이어야 하는한, 자극과 의미의 강도를 촉진하는 심미적 관심은 필연적으로 그 존속 기간이 짧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동화 능력에 따라, 반복의 시간, 양, 기간, 빈도를 통제하기까지, 지금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이미지와 소리의 홍수를 제한하는 법을 배워야만 예술의 복제 장치는 인간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145
지난 몇 세기 동안의 엄청난 기계의 팽창은, 과거에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어서 가르칠 필요가 없었던 교훈을 인류에게 주었습니다. 즉 유일한 것, 독창적인 것, 귀중한 것, 참으로 개성적인 것이라는 가치입니다. 삶에는 귀족주의적 원리가 민주주의적인 원리와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예술의 철저한 개성주의가 기술의 몰개성주의, 나아가 따라서 기술의 피상성을 중화시켜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한 방울을 주기 위해 포도주에 물을 무한정으로 타서 나누어주면 누구에게도 아무런 봉사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147
이러한 결론은 예술과 윤리, 선과 진 사이에 너무나도 오래 존재한 갈등을 어느 정도 수정해 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대량 생산의 시대에 예술의 환벽성과 환희를 즐기기 위해서는 건강한 인간만이 감각적이고 반응적이듯이, 인간이라는 유기체 전체가 최고로 활기있고, 감각적이고 반응적으로 고양돼 있어야 합니다....고도의 도덕적 민감성과 의식의 통제도 필요합니다. 이는 결국, 자신이 갖는 최상의 것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베푸는 우정의 축복과 같이, 순수한 예술 작품이 부여하는 최고의 선을 위해 그보다 못한 선을 거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뜻합니다. 148
볕뉘
대량생산과 복제, 표준화는 왕이 누리던 것을 누구나 누릴 수 있게해주었다. 평등과 민주주의의 원리가 작동하는 듯이 보인다. 어떤 면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원리는 삶의 독창성과 유한한 존재인 사람에게 좋은 것만이 아니다. 선택을 하지못하고, 그만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중독의 지점에서 일상, 삶은 살아지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능력에 따라 이 범람을 제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말이다. 삶의 귀족주의 원리를 대상에 구현하는 법을 배워야하는 과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는 '선택이 창조다'라는 니체의 말로 [표준화, 복제, 선택]이라는 강의를 마무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