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은 내향 세대를 옹호하는 근거를 헤겔의 지평을 변형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한번 깊게 ‘내향적’이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깥으로 향할 수 없다.” 자기 내면으로 가는 것은 헤겔식으로 말하면, 자기 안에서 대립을 만들고 그 대립을 자기의 한 계기로 지양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외면화와 내면화’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고진에게 내면화는 외면화의 기반이며, 철저한 주체성은 철저한 타자 관계성을 의식하고 있다. 이에 기초하여 그는 자신의 좌익적 체계를 ‘주체로서 좌익적 문학’으로 개념화한다. 이것은 전공투 세대를 겨냥한 것이면서 전공투 세대에게 비판받는 요인이기도 하다. 445
고진이 ‘보편적 인식’을 지향하면서 칸트와 맑스를 연결할 때, 연결 속에서 등장하는 세 항은 서로 독자적이지만, 긴밀하게 연결된다. 세 항들의 이중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맑스와 칸트를 도입하는 고진의 주장을 살펴보자. “나는 최초에 소위 네이션=스테이트란 자본=네이션=국가라고 서술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시민사회=시장경제(감성)와 국가(오성)가 네이션(상상력)에 의해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말하지면 보로메오의 매듭입니다. 즉 어느 하나를 없애면 무너지는 매듭입니다.” “칸트의 인식 기능으로 번역하면, “네이션은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라는 서로 다른 교환 원리에 서는 것을 상상적으로 종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환양식’ 논의와 분리할 수 없으며, 동시에 ‘어소시에이션’을 실현하는 ‘부단한 과정’과 맞물려 있다.“ 457
“고진의 반복강박은 ‘천체의 반복’처럼 ‘자본의 확장’과 ‘대의제의 불완전함’에서도 드러난다.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대표제의 불완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하는 것과 대표되는 것 간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는 논지를 설파한다. 맑스가 여기에서 지적하는 것은 – 유권자의 손에 의해 뽑힌 대표자가 선거 이후에 유권자의 의지를 저버리는 현상보다 더 –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선거 이후’가 아니라 ‘선거 이전’의 문제이다. 유권자는 투표할 때, 자신과 동일한 당파성이나 이해관계를 견지한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을 대표하는 사람인지 아닌지와 관계없이 투표하며, 뽑힌 대표자를 자신의 당파성과 배치되는 방식으로 지지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대표성의 불완전함’이다.“ 474
“고진은 ≪세계공화국≫에서 인류 전체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세 과제를 제시하면서 글을 맺는다. 즉, ‘전쟁’과 ‘환경파괴’와 ‘경제적 격차’로서 인류 문제를 제시한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공히 집약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국가와 자본의 문제로 귀착’하게 된다. 고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칸트처럼 국제연합을 고려하면서 각 국가는 장기적 안목에서 ‘국제연합’에 ‘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양도하는 구조, 그래서 점차로 ‘확장된 국제연합’을 구성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확장된 국제연합’의 최종 이념은 ‘세계공화국’이다. ‘세계공화국’은 현실적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규제적 이념’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만약 이념을 포기한다면, 지향점이 사라질뿐만 아니라 ‘노력을 위한 추동력’도 사라질 것이다. 고진은 그럴 경우 미래를 위한 ‘상상력’도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당면한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래로부터의 노력’과 ‘위로부터의 노력’이 동시에 요구되는데 ‘어소시에이션’과 ‘세계공화국’은 그 양면이다. ‘확장된 국제연합’은 ‘실현 가능한 구성적 이념’이며, 우리 모두가 ‘위로부터’ 강화해나가야 할 요소이다. 그러면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의 운동의 연계에 의해 새로운 교환양식에 기초한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가 서서히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478
볕뉘.
1. 재독하거나, 지나쳐버린 흔적들을 다시 쫓고 있다. 기억을 상기시켜주고 잊혀진 것들이 이어지는 느낌이 좋다. 쓰는 개념들이 다르긴 하지만 맑스에 고정점을 두고 다시 고민과 삶, 사상의 결을 반추하게 해주어서 고맙다. 읽고 스치고 안개같이 몽롬함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비교적 가까운 용어를 써야할 사실을 대비하는 연습이기도 하다.
2.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 라클라우, 무페, 그리고 고진을 다시 본다. 윤여일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서동민의 '두제곱의 사유', 지금 말하고 있는 '외면화와 내면화'는 타자와 관계성 확장을 위한 철저함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국가, 정치, 경제, 주체, 윤리라는 문제들을 좋은 것, 나쁜 것으로 구획짓고 객관화하는데만 익숙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볼 줄 아는 것, 정녕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라고 되물을 수 있을까? 맑스이전의 사고, 맑스에 멈추어선 사고이후 우리는 스스로의 허상을 얼마나 허물 수 있을까? 무너지는 만큼 다시 설 수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을까. 치열한 고민과 시선과 사유를 따라갈 필요는 없을까? 과거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얼마나 재사유화, 재삶화하느냐에 따라 다가올 미래는 다시 자리매김하는 것은 아닐까
3. 어쩌면 다 무용한지 모르지만, 내면화의 과정을 겪는 것과 겪지 않는 것의 지평은 다를 것이다. 자본을 너머서려면 노동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실업에 천착해야 하며, 정치의 공황을 너머서려면 프랑스혁명의 지점에 다시서야 한다는 점들. 어쩌면 이렇게 추상적인 개념들에 다시 논의를 불붙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환경파괴를 너머 경제적 격차를 함께 아우르지 않으면 우리의 상상력도 멈출 수밖에 없다는 고진의 말과 정치철학자의 외침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4. 오랜만의 푸념이다. 삼독을 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