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화가 인쇄술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는 규격화되고 반복 가능한 의무를 수행하는 기계를 발명하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 전에, 인간이 기계화되어 인간 자신이 기계적이고 획일적이며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변모되거나, 정확하고 획일적이며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변모되거나, 정확하고 획일적이며 반복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스스로에게 가르쳤다는 사실입니다. 사회적 분업은 기계적 분업에 선행하고, 대체로 기계적 분업은 복잡한 자동 기계의 발명에 선행합니다. 최초의 단계는 인간 전체를 하나의 확대된 눈, 확대된 손, 확대된 손가락으로 전락시켜 모든 다른 기능을 이 확대된 영역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104
“낙서하나 없는 여백! 더러운 손자국이 전혀 없는 책! 모서리를 접은 흔적도 없는 책! 그러나 예술이 사적 생산을 저해하는 한, 문맹에 가까운 시대에도 충분한 책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결국 필사본의 발전 과정에서 기술성과 심미성이라고 하는 두 가지 추진력은 갈림길에 서게 됐습니다. 필사본의 심미적이고 개성적인 부분은 책의 실용적 임무를 방해했습니다. 따라서 사상의 유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예술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기계가 도입돼 그런 과정의 반복 부분을 떠맡았습니다. 그 결과 인쇄술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완전하게 성숙했습니다.” 108-109
“우리가 기계의 발전을 예술과 그 고도의 비밀을 상실하는 경우 다시 발명할 수 없는 예술인, 수공예 속에 있는 기계의 근원으로부터 너무 멀리 떼어 놓아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생물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기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기생이 아니라 공생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이는 기계의 실용적인 장점이 인간의 자율성이나 발전을 위협하면 기계와의 협동을 거부하고 심지어 일시적으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111
“회화가 입체주의, 미래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의 출현과 같은 급격한 변화 과정을 겪은 반면, 인쇄업에서 1920년대라는 광기의 시대에 화가의 동료들이 전환시킨 가장 거친 관념이란, 아마도 민주주의적 관심에서 대문자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 또는 음영이나 셰리프가 없는 활자체 – 너무나도 부적절하게도 현대 고딕이라고 불리는 – 가 과거 활자체보다 선호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13
“기계 예술의 규범은 본질적 요소에 대한 정확성, 경제성, 원활성, 엄밀성, 제한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규범이 부적절한 장식의 응용이나 부적절한 형식의 포장에 의해 침해될 때, 그 결과는 기계의 인간화가 아니라 비속화입니다. 가령 연필깎이나 다른 문방구를 유선형으로 만든다든다, 다른 자동차의 라디에이터를 상어주둥이 같은 기계적 장치로 만든다든가, 다른 자동차 설계자가 시도했던 것처럼 안전하게 몰딩해야 할 부분을 크롬 화살로 만들어 속도를 강조하려는 경우입니다. 이런 짓으로는 인간적 가치를 확보할 수 없고, 오로지 중요한 기계적 가치를 상실할 뿐입니다.” 118
“기술의 진로를 지속적 상승이 아니라 평탄한 수평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반적 견해와 매우 다른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또 다른 위험한 이단으로 보일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지난 3세기 동안 인류는 끝없는 개량, 개혁, 변화를 지향해 왔습니다. 그리고 공리주의적 교리 문답에 의하면 인간의 주된 의무는 기계적 변화를 유리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만큼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 변화에 스스로 적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케케묵은 견해는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배울 능력이 없고, 우리가 창조한 기계를 지배하고 그것을 제자리에 둘 능력도 없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그것은 우리가 기계에 사로잡혀 초래한 열광과 강제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고, 따라서 철학과 종교와 예술은 인간에게 다시금 전인적인 삶의 전망을 열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다시는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지 못한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우리 자신을 더욱더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면, 기계에 속하는 것은 오로지 기계에게로 돌리고, 삶에 속하는 것인 주도권, 선택 능력, 자기 관리, 요컨대 자유와 창조성은 삶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121-122 3강 [수공예에서 기계 예술로]
볕뉘.
1. 기술의 진로를 평탄한 수평으로 번지는 것으로 한다. 철학과 종교와 예술이 삶의 전망을 열어놓으려면 경제와 정치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기술이 우리의 영혼을 끌고 다니거나 삶을 내동댕이치고 있다면 말이다. 저자는 벤담의 공리주의의 뿌리부터 찾는다. 칸트의 세계시민으로서 역할이나 목적으로 대접하지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는 외침은 여전히 아무런 파고를 미치지 못하고 있다. 아무도 외면화와 내면화를 동시에 가늠하여 단 한명의 삶이라도 더 건지려고 의식하지 않는다.
2. 주말 처음 대면하는 마을, 길도 모르는 곳에 산책을 나섰다. 양손에 빈병을 가득 챙겨든 할머니가 다가온다. 여기가 어딘지 집을 찾지 못하겠다고 한다. 스마트폰은 있는지 집에 전화는 있는지 걱정이 되어 되물었다. 혼자 사신다고 한다. 어디에 사시는지 낯선 거리가 익숙하지 않아 망설인다. 같이 걷다가 보행길이 나타나서야 몸에 익숙한 곳이 나타나 집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초록불을 기다린다. 안부가 궁금해진다.
3. 조금씩 재독을 하고 있다. 생각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 하지만 쏙 파고 들어와 앉지를 못한다. 안개같은 점선같은 기억에 실선을 조금씩 긋는다. 낯선 공간에 마실을 다녀왔다. 지도가 가르치는 것보다 더 많은 풍요로움을 주는 시장거리에 점심 때를 놓치면서 거닐다 보니 안개같은 꽃, 눈같은 꽃들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다. 이렇게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