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정치론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진태원 논문을 읽다가


(중략)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상상과 정념에 기초하여 전능한 신 야훼에 대한 표상을 만들어내고 자신들의 국가를 야훼의 국가로, 또 자신들을 야훼의 백성으로 간주했지만, 오랫동안 안정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념과 대립하는 이성, 또는 개인적인 능력으로 이해된 이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어리석은 이러한 표상과 믿음이 역설적으로 매우 유익한 결과, 제도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모세가 {...} 우중이 공포 때문이 아니라 신앙심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국가 안에 종교를 도입했기"때문이다. 곧 사람들의 정념과 상상, 신앙심을 억압하지 않고, 그것들을 국가의 발전에 활용할 수 있었던 모세의 정치적 능력이 히브리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곧 사회계약, 또는 국가의 구성과 보존을 위해서는 홉스식의 인공적인 법적 절차, 또는 고유한 의미의 정치적 계약만으로는 부족하며, 각각의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와 역량을 양도 할 수 있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보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또 하략)


모음..-------홉스는 계약론에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국가사이에 단층이 있다고 하지만 스피노자는 사회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자연권의 논리가 지배한다한다. 사회상태 안에서도 여전히 갈등, 기만, 증오의 메카니즘이 존재하고, 사람이 유덕하든, 배덕하든, 이성적이든 무지하든 간에 모든 사람을 이끄는 가장 원초적인 규칙은 바로 충동의 법칙이다라는 것이다. 홉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상적인 상태를 가정하여 나온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어 역량을 양도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며, 국가에 대한 견해나 관점마저 달라진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의견 및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규범적으로 부당하다는 이유때문이라기 보다는 본성적으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금지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판단 및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되, 이를 국가 보존에 유용한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1. 이상적인 사회, 이상적인 집단, 이성을 빌미로 가공하고 만든다는 발상차체가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다. 이성이란 틀에 아니면 짧은 지식으로 삶과 생활을 기획하려는 무모한 의도가 사람을 잘 모르기때문에 나타난 것은 아닐까?  신의 자리에 인간을 넣어 인간은 같다라는 근대적 기획, 발상의 전환 만큼이나 사회속의 인간은 그만큼 알기어려운 것일까? 사회 속의 인간의 개념을 또 한번 비트는 발상으로 출발한다면 가공물로 만들어진 제도도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숱한 정치-행정의 구축물도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정치는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 출발하지 않고, 선도나 교화라는 주장이나 발상으로 여기는만큼 위험한 것은 없는 것은 아닐까?

2. 무신론자인 나는 사실 여러 행태로 인해 종교생활에 매우 부정적이다. 학생때 얕은 지식과 강박적 교화덕에 아직도 사람을 갈라서 인지하는 버릇이 남아 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의 아름다움보다 늘 강박증으로 연꽃만 아름답다고 연꽃만 심으려는 허황함이 생활의 언저리에 베여있는 것은 아닐까? 논문 몇쪽을 읽다 별별 생각을 다해본다.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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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5-09-29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 논문이었군요. 이런 뒷북. 즐찾을 해놓고도 이리 관심이 없었다니, 후배가 권해 읽었는데 이런 무관심이라니. ㅎㅎ 트랜스토리아도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