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생성

너 자신을 알라

의 포로가 된 것은 그곳으로부터다.

 

우리가 부르짖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인가? 우리가 외치는 진보는 '진보'일 수 있는가? ''로 향한 강박과 엘리트의 전유의식인 '보다낫다'''에게 다가갈 수 없으며 '함께' 해볼 수 있는 것을 낳지 않는다. 이는 ''를 대상화하면서 ''만을 돋보이는 유아의식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를 너에게서 발라내고 그 토대로 철학의 성을 쌓은 것은 서양이 한 일이다. ''로 환원하고, ''에 근거한 철학과 학문의 발달은 ''는 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끊어버린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로 갇힌 자유가 모두의 진보처럼 보이는 착시효과가 나타난다. ''만을 배경에 둔 평등을 주장한다. 이런 되먹임의 반복구조는 모든 구조와 삶을 사회적 유아기에 머물게 만든다.

 

나와 너

 

''''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너로부터 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몸이 아니라 애초에 한덩어리이자 하나다. 주관과 객관이 따로 있지 않는 것처럼 객관은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없다. 서사적인 나, 나의 곁에 이어진 너로 인해 사회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흐름 속의 나. 나만은 없다.

 

하나만을 지향하는 학문은 성립할 수 없다. 하나의 관념만 쫓는 학문은 살아남을 수 없다. 동시에 쫓기고 쫓고 만드는 학문만 겨우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나는 없다. 나의 환상을 쫓는 이상 아무 것도 만들 수도 움직일 수 없다. 나에 머무는 이념과 가치를 쫓을수록 곁의 너의 비참을 목도할 수밖에 없다.

 

 

너를 자각하지 못하는 나의 울타리는 거울같은 방이다. 온통 나만 보이는 사회적 유아방이다. 나만 봐달라는 유치원이다. 자유와 평등과 자매애 외 숨쉬는 공기는 형평이라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시체처럼 해부해서나 얻을 수 있는 가치다. ''만의 절대가치를 추구하였기에 구현될 수 없는 이상향일 뿐이다. (결코 나만 실패를 해보았을 뿐, -너가 움직인 실패와 실패의 상처로 생긴 흔적은 없다. 찬란한 ''로 치장할 뿐이자 늘 머물 수밖에 없는 ''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나는 너로부터 자란다. 주어로부터 맺어진 것이 우리가 아니다. 동사나 형용사가 움직여야 ''가 드러난다. 나의 곁은 늘 ''였다. 너의 경중으로 인해 나의 가벼움과 무거움은 드러난다. 곁의 움직임으로 나의 움직임이 읽힌다.

 

,,우리,

 

너는 우연한 마주침이다. 만남은 마음의 겹침이다. 마음의 시공간을 따로 비워두는 일이다.

 

-너의 주춧돌이 세워진다면, 나의 곁에 너가 의식된다면 나-너 곁의 그물이 아주 희미하게 보일 수 있다. 아주 자그만하게 느낄 수 있다.

 

나만의 자유에 경도된 운신은 거울만 보고 달려드는 아이같은 짓이다. 나만의 평등에 경도된 운신은 어린아이같은 짓이다. 나만의 독선에 경도된 삶은 악몽이다.

 

 

결사

 

결사는 지독한 덧셈이다. 나만 바로 설 수 없기에 끊임없이 너를 탐하고 기댄다. 곁의 너로 인해 간신히 디딤발을 한 걸음, 반 걸음 디딜 수 있는 것이다. -, 우리, 그리고 모임이란 결사. 지금여기 결사가 왜 이리도 허망한 것인가. 아무 것도 구제해내지 못하는 조직의 단위는 여전히 ''를 뿌리삼고 있기때문이다. 조직-단체-특정 ''로 이어지는 위계에는 대리자만 있다. ''의 대행으로서 ''만 있다. 너를 느끼지 못한다. 너를 느낄 필요가 없다. 너의 고민이 나로 스며들지 않는다. 나의 아픔이 너를 타고 '--'의 그릇에 고이지 않는다. 나의 삶이 섞이지 않는다. 살아지는 일상을 돌이키지 못한다. 배회하는 욕망에 결박되어 풀려나지 못한다. (, -, --, 모임, 단체 가운데 마음이 번지는 속도는 다를 수 있다. 삶이 미치는 기울기도 다를 수 있다. 차이를 갖고 만나고 차이가 삶에 섞이고 부대끼면서 일상은 마음으로 버무려진다.)

 

모임

 

모임은 그릇이다. 생생한 현장이다. 차이의 마법사이다. 파격을 어루만지는 곳이다. 삶의 예비기지다. 주고 받고 나누고 격론과 쟁점이 충만한 곳이어야 한다. 사발통문같은 그릇에 ''는 오목하여 ''를 받아 안을 수 있다. 고민은 자라고 숙성된다. 생각은 너로 번지고 깨달음의 길목과 노력, 시련의 흔적을 가져갈 수 있다. 삶의 충전소다. ''만의 삶이 아니라 ''의 삶 곁으로 가는 길이다. ''만의 삶이 아니라 '-'의 삶으로 가는 징검다리다.

 

모임은 마음을 닮아있다. 마음의 끈으로 움직이는 모임들은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은 긴장을 유지한다. 긴장하는 것은 빈공간과 만일을 예비해둔다. 의식적이되 무의식으로 뿌리내려야 한다. ''만을 '우리'만을 위한 모임이지 않기때문에 열려있어야 한다.

 

도시와 삶

 

구획된 도시는 삶을 섞을 수 없다. 보이는 삶만 존재한다. 비참을 목도할 수도, 삶의 실패도 일상에 섞이지 않는다. 거대 도시 속의 삶에서 사람들은 실패를 맛볼 기회를 잃는다.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 삶을 마칠 때가 되어서야 세상은 그렇게 움직일 수 없다고 한다. 직선과 같은 삶 속에 세상은 자신에 도취된 ''만을 뱉어낸다. 너로 향한 발성은 나로 옮겨올 수 없다. 너로 향한 외침은 나에게로 메아리친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삶이란 나와 관계조차없는 시간의 뭉텅일뿐이다. --삶에 깃든 웅성거림이나 옹알이조차 들을 길이 없다. 들리지 않는다. 나의 생존만이 눈앞에 보이는 경주견의 고깃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사회

 

사회적 옹알이가 필요하다. ''만을 지지대로 쌓아올린 학문의 상아탑은 '학문의 격벽'을 만들었으며 학문과 학문은 삶의 저수조에 흐르지 않고 손내밀지 않는다. 사상의 누각을 버티고 있는 ''는 더 이상 쓸모도 필요도 없다. 사회도 삶도 처음부터 간극도 벽도 없었다. 하늘아래 남도 없어 사람의 호흡으로 지내야한다.

 

 

지역

 

지역은 늘 나만 있어 너를 의식하지 못한다. 너를 눈치조차 챌 수 없으므로 ''가 한 일들의 여파를 알지 못한다. ''의 목적과 가치만이 계몽의 너를 거느리고 다녀야하기에 나에게 보이는 건 가치와 목적이다. ''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는 없는 이상에 끌려다니는 것이다. 앞만보고 달리는 경주견이다. 나도 너도 없다. 시간을 담지 않는다. 지나온 시간을 담고 나누지 못한다. 다가올 시간도 품지 못한다.

 

 

그리고 삶

 

삶은 계속된다. 아주 작은 물빛, 햇빛에 비치는 웅덩이 속의 잉크 한방울 그렇게 번지는 것이 나-너이다. 그렇게 출렁이는 그물코에 바뀌는 색은 너로부터 온다. 나는 너의 여기저기에 있다. 너는 나의 저기여기에 있다.

 

 

볕뉘.

 

모임과 민주주의의 변주 - 결사

 

(0) , 서사적인 나, 서로주체, 나와너

(1) 왜 다른가

(2) 결사학은 왜 없는가

(3) 악마의 변호인, 묵자의 동이, 덧셈

(4) 결사는 왜 독특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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