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 불안정, 해고' 위협이라는 공포는 거꾸로 '자유'의 소망 위에 세워진다 (1)
유연한 노동주체
자본의 변증법은 노동과 노동주체를 분석함에 있어 두 가지의 근본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먼저 노동을 자본의 운동법칙에 종속된 경제적 실재로 환원함으로써(경제주의), 노동주체를 노동력, 그것도 직접적인 고용관계에 종속된 노동자로 한정한다. 따라서 오직 경제적인 삶, 그것도 노동력이라는 범주의 매개를 통해서만 노동 현실을 표상한다. 125 그 탓에 노동 분석은 임금, 고용관계 등 노동력의 경제적 삶을 분석하는데 머물러버리고, 노동주체 분석 역시 노동력의 분석, 혹은 노동자라는 특수한 법률적이고 경제적인 주체를 분석하는 것으로 축소된다.
다음으로 자본의 변증법은 경제적 삶 바깥에 놓인 자본의 운동을 이차적인 배경이나 조건, 아니면 '상부구조'로 환원함으로써 자본이 재생산되기 위해 사회적인 삶 자체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따라서 자본은 자신의 지속적인 운동를 실현하기 위해 공장과 사무실 밖에서의 삶이 이뤄지는 조건과 규칙을 '동시에'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노동력(노동자)이 아닌 주체 역시 자본주의적인 삶의 권력에 따라 빚어내고 또한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노동의 분석은 자본의 정치경제학으로, 노동주체 분석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분석으로, 각기 한정되어 버린다. 125
자본주의란 곧 사회적 삶을 자본이라는 명령에 복속시키는 사회적 배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사회적 삶을 주체화하고 대상화하는 담론적/비담론적 실천을 지배하는 규칙과 코드를 끊임없이 갱신하고 변형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변화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사회적 삶을 생산하는 방식을 교체하고 변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새로운 경제적 운동의 조건을 고안하고 강요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그와 더불어 반드시 주체성을 새롭게 생산하지 않을 수 없다. 126
후기근대 혹은 고도근대, 유체적 근대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사회적 조건을 제시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분석하고 있는 자아정체성이란, 비록 직업과 일의 세계에서 자아정체성의 변화를 포함한다고 할지라도, 의미와 해석이라는 재현의 영역에 갇힌 것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이 "기초적인 신뢰의 위기"(기든스), "위험사회"(벡)를 역설하며 새로운 주체성을 가능케 한 맥락과 배경을 분석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관적 의미와 객관적 세계의 관계"를 문제삼는, 반영 혹은 재현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27
노동주체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이질적이고 자율적인 사회적 실천이 결합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란 점에서, 계급구성은 곧 주체성의 계보학적인 분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네그리는 자본주의 발전의 단계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아니라 계급구성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크게 세 가지의 단계로 나누고 각각의 계급구성을 (1) 노동과정, (2) 소비규범, (3) 규제양식, (4) 프로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구성이란 측면에서 분석한다. 전문노동자(-1차대전)/대중노동자(-1968)/사회적노동자(-현재) 131-132
계급구성이라는 관점을 참조하되, 그것이 결여하고 있는 '자기'라는 주체의 형성에 관한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135
기존 방식은 언제나 일터라는 조직 속에 울타리 쳐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전략경영 담론은 이런 장벽을 무너뜨린다. 그것은 일터에서의 노동주체를 기업의 경영전략 혹은 비전이란 새로운 경제활동의 합리성에 따라 움직이고 분절되는 대상으로 표상한다. 나아가 노동주체를 관리하는 방식과 노동주체가 자신을 주체화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차원을 열어놓는다. 171
전략경영 담론은 기업의 경제적 행위를 새롭게 재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된 행위자들을 주체화하는 권력이기도 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담론적 권력 메커니즘의 진리 효과는 주체성을 구성 혹은 재구성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에 있고, 이는 전략경영 담론에서도 역시 동일하다. 전략경영 담론은 기업에서의 경제적 삶에 참여하는 주체들을 '전략행위자'로 주체화한다. 173
노동주체는 더 이상 경영 명령과의 동일시를 꾀함으로써 자신을 주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략에 따라 스스로 역량 있는 주체로 계발하고 향상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닌 인물인 것으로 주체화된다. 그런 점에서 전략경영 담론은 생산의 양(얼마나 생산했나)이나 시간(얼마나 일했나)과 같은 외적인 기준을 통해 일하는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이의 '자아'를 직접 겨냥하고 그것을 통해 노동주체가 스스로 기업전략과 일치된 주체로 자신을 향상시키고 변모시키도록 요구한다. 189
BSC가 작용하는 방식은 다름 아닌 "학습 및 성장(혹은 혁신)"이라는 단언을 생각해보면, BSC가 주체화의 테크놀로지로서 지닌 특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BSC는 전략경영 담론을 도구화하는 객관적인 지식과 절차, 평가의 규준 등으로 이뤄져 있지만, 그렇다고 BSC를 전략경영 담론에 부속된 하위 테크닉으로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197
역량은 경영권력이 일하는 주체를 관리하는 모든 영역에 작용한다. 선발과 채용, 보유, 평가와 보상 그리고 개발과 육성에 이르기까지, 일하는 주체의 삶은 이제 역량의 그물망 안에 갇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38
역량이란 언표는 일하는 주체의 능력을 그려내는 개념에 머물지 않고 일하는 주체의 주체성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체계를 생산한다. 이는 일터에서 일하는 주체의 능력을 측정하고 평가하며 보상하는 경영 실천의 체계(채용, 선발, 승진, 보상, 상벌, 퇴직 등)와 결합할 수도 있고, 일하는 주체를 개발하고 관리하며 향상시키기 위한 실천의 체계(교육, 훈련, 경력개발 등)와 결합할 수도 있다. 또 그것은 일터의 안팎에서 일하는 주체가 더 적합하고 유능한 주체가 되기 위해 행하는 다양한 실천의 체계와 결합할 수도 있다. 261
자기계발의 의지
한국사회에서도 대마불사와 철밥통의 신화가 깨어지면서 많은 개인들이 스스로 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건국이후 줄곧 지속되는 자조의 전통이 대한민국에선 그제야 싹트게 된 것이다....많은 이들이 창업과 전직이라는 낯선 단어를 자신의 목표로 인식하게 됐고, 자기계발은 그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이런 경향은 경제신문의 구독률 상승과 더불어 출판시장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각종 재테크 서적과 자기계발에 관련된 책들이 출간 붐을 이뤘다. 이와 더불어 한국에서도 서서히 책이 아닌 세미나를 통해서도 지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와 비교될 수 없지만 일반인들이 자기계발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 시작한 것이다. 274
기업교육이란 장 안에서 자기게발 담론을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은 기업교육을 통해 생산되고 교육됐던 지식의 내용이 아니라 일하는 주체를 형성하는 다양한 담론적 실천과의 관련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한국능률협회가 1972년부터 '능력주의 시대의 자기계발은 통신교육'이란 이름으로 경영자나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경영통신교육은 이후 '창의력 개발 훈련', '감수성 훈련', '성취동기 제고' 프로그램 등을 확충하면서 문자 그대로 본격적이 전문화된 자기계발 담론을 수행한 ㄱ서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성공학이나 처세술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기업교육 강사들이 제공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278
자기계발 담론은 직접적인 사회적 활동의 내용과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자아를 향해 말을 건넴으로써 매우 세속적이고 보편적인 대중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280
자기 계발 담론은 언제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계발해야 할 대상으로서 자아를 규정하고 고정시키는 실천과 더불어 그것에 작용해 변화를 꾀하고 성공과 성장, 향상을 결과로 끌어낼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포함한다. 이런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그 자체 자기계발 담론의 한 장르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281
자기계발 담론은 언제나 특정한 정치적인 목표와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한다. "주체가 스스로의 실천으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다 해도, 개인이 스스로 이런 실천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속한 문화 속에서 발견한 양식이며, 그의 문화, 그의 사회, 그가 속한 사회적 집단들이 그에게 제의하고 부과한 양식들입니다"라고 푸코가 말할 때, 그 주체화의 양식이 바로 그에 가깝다. 281
자기경영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단지 개인적 선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주체성'(직장인, 아버지 세대의 삶)을 '비판'하는 행위이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규정하던 기존 지배방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새로운 자유의 윤리적 주체가 되는 일이다. 289
푸코는 문제설정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문제설정이란 상이한 해결책들이 응답하고자 하는 질문을 구성하는 요강을 정의합니다. 주어진 것을 질문으로 발전시키고, 일련의 장애와 어려움을 다양한 해결책들이 응답을 산출하게끔 문제로 변형시키는 것이 바로 문제설정의 요점이자 사유의 특수한 작업인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설정은 주어진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재현), 그에 대한 태도는 무엇인가(태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앎의 대상으로 구성할 때 그와 동시에 형성되는 차원들을 함께 이해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설정이란 그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란 실천 역시 포함한다. 아울러 가장 중요하게는 어떤 대상을 문제로 구성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을 다르게 사유하고 달리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전제한다는 점에서 자유를 수반한다. 굳이 요약하자면 세 가지 계기를 동시에 포함한다. 첫째 문제로서의 대상에 관한 지식 혹은 언어의 생산, 둘째 대상을 조작하거나 변형하는 다양한(양립 불가능할 수도 있고, 대립적일 수도 있는) 실천 및 테크놀로지의 구성, 셋째 그 대상과 행위의 주체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즉 자유와 권력, 그렇다면 자기경영 담론에서 자기의 문제설정이란 것도 이런 세 가지의 측면에서 함께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292
거시적으로는 정부와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결국 미시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구원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는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 새로운 계획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일이다.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라. 관심을 가지면 그 일이 달라 보인다. 293
이런 표상은 단순히 기업조직으로부터 독립한 자영업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을 비롯한 경제적 행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또는 일하는 주체 혹은 경제적 삶의 주체로서 자기 삶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문제 전반을 아우르는 것이다. 따라서 '1인기업가'란 새로운 '주체화의 윤리'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94
문화비평류의 담론이 생산해낸 '개성과 자유의 세대'란 모습은 아마 서태지나 안철수 같은 대중음악 스타나 벤처사업가의 모습으로 의인화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실현에 몰두하는 개성적인 주체가 대두하는 것을 둘러싸고 쏟아진 분석, 예컨대 신개인주의라거나 나르시시즘적 주체의 등장이라거나, 생존가치에서 표현적 가치를 중시하는 개인의 등장이라는 진단과 옹호 혹은 비판은 모두 일면적인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301
일터는 물론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일상 등 어디에서든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하고 스스로를 책임지며 자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아, 즉 기업가적 자아는 성숙한 근대, 2차근대 혹은 후기근대라고 말하는 시대를 역설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가진다. 그것은 해방된 주체가 아니라 새로운 주체화의 권력에 예속된 주체이기 때문이다. 317
볕뉘.
1. 일터의 변화를 끊임없이 푸코와 대위한다. '민주'와 '노동'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회'의 흐름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놀랍다. 어쩌면 미생이 또 한번 그려진다면 일터내부의 군상들이 어떻게 개조되고 있는가를 다시 살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들이 아무 쓸모없이 버려지는 현실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할지 모른다. 일터 안의 변화에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개인의 노력이 얼마나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재삼 확인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생이 아니라 또 다른 한집을 얻기 위해서 일터의 중심이라는 시지프스의 신화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일터 곁과 일터 밖을 제대로 보는 시선을 가졌을 때라야 조금 있게 되는 것은 아닐지.
2. 그렇게 찾고 헤매이던 삶은 '나'에게서 멈추고 스르르 녹아버리게 된다. '나'에 대한 무한 책임을 덮어쓰고 '내탓이다'라고 스러지는 군상들로만 흥건해진다. 극(최)정상을 위해 달리던 주체는 참으로 허망하다.
3. '간지럼으로 킥킥 거리는 주체'의 담론을 그려보면 좋겠다. 서로 그만 속고 살았으면 좋겠다. 서로 굶어죽지 않고 먹고 살 방법이 너무도 많을 것 같다. 푸코 방정식으로 삶의 해답을 하나씩 구해본다고 해서 문제되겠는가? 처음부터 늘 다른 생각은 이렇게 걸음마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4. 시간의 흐름 속에 어쩌면 국가가 헤아려야 되는 일들을 가족이 분담했다면, 가족을 너머 개인이 부담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을 거꾸로 심어주었다고 읽을 수는 없을까? 온 세상과 대면한 개인의 이미지와 공포를 일상적이고 흔한 일로 만들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