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질문'은 나눠야 하면서  '거래'되어야 하는가?

 

 

'나'가 나눌 수 있는 접점은 대면하면서부터이다.  대부분 의도를 갖고 있다. 그 접점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별일수도 꽃일수도 나무일수도 곤충일수도 연인일수도 있다. 책일수도 모임일수도 고민일수도 생각일수도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자본이 수신할 수 있고, 축전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사람들은 협동이라고도 하고 공유라고도 하며 거칠게 자본이라고도 한다. 맞다. 자본도 필요하고, 협동도 필요하고, 착한 것도 필요하다.  보이는 손. 아직 모른다. 무엇인지 무엇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든단 말인가?


그렇다면 급한대로 빌리자. 무례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느낌을 나누는 방법도 깨달음을 전수하는 비법도 모른다. 느낌이라는 것이 벼락같은 것이라 언감생심 주어져도 왜, 어떻게 주어졌는지 맥락이 궁금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앎은 지천이어서 홀로 찾아도 관계없는 것이라고 하자. 그 앎을 삼켜 가슴에 머무르면서 뜨거워지는 것을 질문이라고 하자. 그래서 생각의 지축이나 마음을 흔드는 것을 질문이라 하자. 책을 통과하면서 들어가고 나설 때 느끼는 마음의 온도차이를 질문이라고 하자. 사람을 만나고 고민을 섞고 나누다 따듯해지거나 싸늘해진 마음의 농도차이를 질문이라고 하자. 모임 속에 들어가기전 마음들 속에 섞이다가 불쑥불쑥 다가서는 느낌같은 것들을 질문의 결정이라고 하자.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는 아니더라도 자본가가  한푼 한푼이라도 근검절약하면서 돈을 세는 그림을 떠올려보자. 옆에는 하루 하루 땀과 노동, 하느님께 다가가는 소명을 기록하는 회계장부에 눈을 돌려보자.  차변과 대변을 나누고, 빈틈없이 하나하나를 맞추고, 계산하는 치밀함이 있지도 않은 토지를, 물을 공기마저 모든 사물을 삼켰다. 영혼마저 삼키고 있다. 마법의 장부이다. 마법의 세계다. 세상의 모든 일을 거래로 만들어 돈으로 낳는 황금장부이다. 그들은 Present 선물, Good will 영업권, 프리미엄, 특허권, 지적재산권을 계정에 넣고 넣었고 넣으며 두둑한 배를 불리고 있다. 어떠한 정신도 팔 수 있는 듯이 돈을 낳는 장부로 그것을 우겨 넣고 있다. 그래 4백년이 걸린 일이다.


인문이라는 것이 있는가? 삶이라는 것이 있는가? 영양제만큼 한알 쏘옥 넣으면 정신 한점 맑게 하고 사라지는 인문이라는 것이 있는가? 가슴이 뿌듯해지는가? 인문은 정신의 화장술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너'로 번지지 않는다. 나의 삶의 울타리에 바람만큼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쇠락한 정신에 주님을 믿사와 일주일간의 죄를 세탁하듯이 그저 꿀꺽 삼키고 마는 일이다.


" C H A N G E " '변화'는 거래될 수 있는가? 나의 의문이 너에게도 다가설 수 있는가? 나의 불온이 '저기'에서 꿈꾸어질 수 있는가? 저기의 불손이 '여기'의 삶 속에 요동칠 수 있는가? 한번이라도... ....


가치와 앎은 여기저기 세상도처에 널려있다. 다소, 많고적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삶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식히려는, 삶의 열망을 조금이라도 덮히려는,  삶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이들로 세상은 넘친다.  그들에게 인문을 주입하지 마라. 앎을 삼키게 하지 마라.  첫째도, 둘째도, 세째도 질문하라. 질문이 마음의 잔상처럼 남지 않으면, 질문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문맹이라면, 불쑥 커져버린 느낌의 맥락도 짚지 못하는 아둔함이라면 그 인문은 늘 그랬던 것처럼 싸늘한 주검으로 뒤늦게 발견될 것이다.

 

 

질문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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