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요철과 굴곡, 그리고 횡단

 

 

횡단이라는 말을 참 쓰고 싶지 않은 말이다. 요철과 굴곡도 편한 말이 아닌데 삶의 요철과 굴곡을 쓰고 가로지르면서 아니라고 관통해야 한다. 결국 답이 아닌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삶의 겹침이라고 쓸까?


운동(활동)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것은 질문이 되지 않는다. 활동(운동)은 왜 앞으로 더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가 약간 나은 질문이 되겠다. 질문에서 시작하는 답을 과거에서 찾을 수 없다. 뒤지고 살펴본다고 해도 화려한 영광의 흔적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더 안될 수밖에 없는 미래에서 찾아야 한다니 너무 서글프지 않는가?  우울하고 눈물이 뚝뚝 떨어져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로 지역을 들 수 있다. 지역에서 중앙의 소비자로 머물렀기 때문이다. 같은 말로 지역에서 중앙으로 머무르고자 하는 관성이다.

 

서울에 중심에 나를 끼워맞춘다는 일은 참 곤혹스럽다. 정해진 룰과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다수결도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별 생각이 없으니 몸빵이라도 해야 중간이라도 가지 않겠느냐고 말하면 할 말이 없다. 그렇게 해왔고 하는 수밖에 없다. 지역만의 문제 지역의 문제를 발굴하고 보이도록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항변할 수 있다.

 

중앙의 시각과 시선, 입장에 또 다른 눈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아니면 늘 소외되어 발언권조차 얻지 못했던 소수단체의 기죽은 소수의견들을 기억해내고 살려낼 수 있다면 조금은 발화의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앎이 횡행하고, 정세가 횡행하고, 선거가 자라던 일들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상황에서 버티기만 해도 큰 역할이라고 자부하는 것도 일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비자가 생산자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중앙의 의제를 빌려쓰고 빌려서 움직이고 빌려서 살았다. 구차하게 얘기하자. 얼마나 중앙이 되고 싶어 안달했던가를 얘기해보자. 단체가 만들어지고 단체의 가치와 색깔이 생기고 모든 다른 단체는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주기를 바라왔던가.

 

통일, 노동, 교육, 문화, 자치, 참여, 환경, 녹색, 생태, 민주, 양심, 여성, 과학, 선거...이루 셀 수 없는 가치는 자신을 의심할 수 없다. 한번도 의심해내지 못했다. 복음의 전도사이다. 어깨걸고 합심해서 지금까지 헤쳐나왔다. 그런데 너무한 것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럼 다시 묻자. 그 가치만으로 지금 여기를 설득시킬 수 있으며, 앞으로를 설득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느냐고 묻자. 모든 단체가 당신이 추구하는 색깔로 번지면 살만하냐고 묻자. 스스로 상처를 내지도 아파 피고름을 흘리지도 못했고 아문 상처로 걸음도 걷지 못했다. 아픔이 번지지도 않고 번질 수도 없고, 같이 아파하지 않는다.

 

회원과 조합원은 열정과 아픔을 갖고 있지 않다. 여기저기 회원일뿐 애틋한 소속감도 없다. 조합원은, 당원은 여기저기 보험을 든 객체로 대행을 바랄 뿐이다. 회원은 자신의 아픔 한바가지 단체에 부어넣을 마음도 삶도 없다. 냉정하게 살펴보자 우리는 하고싶은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회원의 후원으로 대행하면서 스스로 빛나기를 원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다른가치도 다른 색깔도 다른목적도 원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족하다. 됐다. 회원은 풍족하다 조직은 다른 가치를 탐색하고 시도할 수 없다. 더이상도 더이하도 없다. 닫혔다.


 

2. 또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무도 삶을 살피지 않았다. 삶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삶을 걸려고 삶을 섞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삶이 아니라 대상으로 삼는 저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삶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다.  

 

가교 역할을 하는 활동가들은 안심할 수 없다. 헌신을 넘어 고난과 역경을 무릅쓰고 청춘을 뭍었다. 알아주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열악함을 베개삼아 하루를 버텨내고 싸워낸다. 안부를 물을 수 없다. 왜 물어야 하는가? 내 삶도 아닌데 말이다. 보따리를 싼다. 애정과 열정을 담아 조직을 자라게 만든다. 피와 땀이 배여 있는 곳이다. 힘들다. 관성화되는 조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어볼 곳이 없다. 하고싶은 것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조직에 갇혀있다는 느낌이다. 슬그머니 관성이 생긴다. 이용하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뒤를 봐줄 수 없다. 너의 길이다. 

 

조폭이냐 뒤를 봐주게. 거꾸로 물어보자 조폭은 뒤라도 봐준다. 이게 쿨한 것인가. 삶과 일이 만나고 풍부해지는 것이 이 시공간이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보험처럼 대행하고 대리하게 한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언제까지 자원해서 해야 하는 것인가 되물어 보았는가. 단체가 다르면 정파가 다르면 입장이 다르면 활동을 할 수 없을까? 단체와 단체 사이와 틈을 벌리거나 풍요롭게 하는 역할은 없을까 정녕 보장이 되지 않는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쓸 재원도 한정되는데 활동가의 삶의 일정부분까지 책임져야 한다니 이건 오버가 아닌가?

 

10년치 활동가 월급을 계산해보자. 10년동안 쓰고 생활했던 스스로 돌아보자.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은 온도차이만큼 달라야 하는가? 쓸모에 따라 여기저기 움직일 수밖에 없는 부품인가? 삶을 봐주는게 조직과 단체에 그렇게 부담되는가 부담될 수밖에 없는가? 왜 활동가는 일에 질질 끌려다녀야만 하는가? 이것의 우리의 수준이고 능력이라고 생각은 못해봤는가? 왜 활동가는 멋지고 부럽고 생산자이자 창조자이가 예술가이기를 바라면 안되는가? 사실 이런 면을 보자고 외치던 사람은 우리였지 않은가? 그래야만 활동이 운동이 발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합원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던가? 당원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던가? 어떤 마음인지? 그(녀)의 일상이 어디로 닿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고 사귀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왜 조합원이 과학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생태에 눈을 뜰 수밖에 없으며, 기대고 나눌 사람들을 소개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가? 사람안에 우주가 들어있다던때는 언제고 입장이 사뭇 다르다고 냉정하게 팽겨칠 수 있단 말인가? 단체를 뒤돌아보기도 싫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엔엘이고 피디고 어떤 라인이고 어떤 사람들과 친해서 모든 것이 넘사벽이다. 꼬리표처럼 붙어있는 주홍글씨때문에 일상은 만나지지 않는다. 고민은 섞어지지 않는다. 다른 이견은 들리지 않는다. 만나고 만나고 싫어도 만나고 나누고 나누고 싫어도 나누고 해야할 판이지만 모두 다 소에 닭이다.  이런 원심의 효과가 어떤지 10년전과 지금을 본다면, 역시 지금과 10년뒤를 비교할 수 있으리다. 대면할 수 없다. 물과 기름처럼 갈라진 기억만 선명하다. 그래서 10년뒤가 더 암울하다. 가치가 아니라면 이견으로 이견이 아니라면 일상으로, 일상에 마음을 얹고 이견을 듣고 일을 나누고 안달이 나지 않는다면, 보고싶어 안달이 나지 않는다면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렇게 다가가고 싶은 회원과 조합원과 당원에게 나눠줄 앎고 삶도 지혜도, 실천도 없을 것이다. 백이면 아흔아홉.

 

 

3. 뭔가 아름답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 뭔가 빠졌다는 느낌, 뭔가 찜찜한 무엇. 왜 산뜻함을 느끼지 못할까. 어떤 일을 하던 뒷끝이 남는 것은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운동의 그림자, 활동의 그림자는 가야할 방향을 정확하게 지시한다.


엘리트 의식은 문화로 볼 때 단순하다.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게 몸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새누리당보다 낫다고 여기는 새정치연합, 민주당보다 낫다고 여기는 진보정당, 일반인보다 낫다고 여기는 친환경구매자, 시민보다 낫다고 여기는 시민단체 구성원은 낫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가치는 부여잡는다. 노동이 통일보다 낫고, 통일보다 평화가 낫고, 환경이 낫고, 교육이 낫고, 복지가 낫고, 낫고 낫고... ....


사람들은 그래도 안다. 자세히는 몰라도 뭐가 잘못되지 않았을까하고 말이다. 뭔가 안심하지 못하겠다고 느낀다. 뭔가 잘 안맞는 것 같은데 하고 말이다. 답은 설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아름다울 때까지... ...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정말 구차하지 않은가? 구차하고 싶다면 할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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