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 황해문화 편집장의 이야기를 듣다. 한마당 열소리부터 글쓴이들의 발굴과 관리,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을 건네듣는다. 편집위원, 편집주간, 기획위원 관리 등 이야기를 들을수록 일의 밀도와 정해진 원칙,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기위한 흔적, 글쓴이와 밀당 과정이 생생해져 보기 좋다.  학술지와 저널의 사이를 목표로 해온 일들을 평가하면서 다른 것을 보는 찌르는 창이기보다는 여러가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자평도 듣다.

 

황해문화가 자리잡는 과정은 오히려 새얼문화재단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자연스럽게 일을 주고받는 과정이나 행사진행과 후원자를 챙기는 과정, 나름대로 틀이 잡힌 모습이 조금씩 잡힌다 싶다. 전날의 취기로 몹시 힘든 하루이기도 했지만 바람구두로서 알라딘서재의 활동이나 풍소헌의 친구로 있던 고선생님 덕분에 또 다른 인연을 나누게 된다.

 

시민운동은 죽었다. 사회운동은 명멸했다. 새정련이 사회운동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당보다 정치인의 앞가림을 위해 자기 살길에만 급급한 현실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확인시키는 것이 도리일까? 아니면 고양이 목에 방울다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인가?

 

여기는 섬이다. 고립되어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아카데미에서도 많이 회자되던 이야기를 그가 다시 짚는다.  섬사람들이나 반도에 있는 사람들의 잔혹한, 잔인한, 끝까지 밟고 살아나야만 산 것으로 치는 현실 말이다.

 

황해란 황해도의 황해가 아니라 지중해와 같은 개념이라한다. 서울도 지역의 하나일 뿐이다. 여기저기 모두 지역이란 개념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함유하고 있기도 하다. 블로그 수준의 글들을 또 다시 잡지로 만든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인가. 이북이나 다른 형태로 가고 있기도 한데 광고수주나 운영에 걸려 오프지를 추구하는 것이 합당한가. 한번 만든다면 사람들을 바짝 긴장시킬 또 다른 형태의 펑크, 위압을 담아버리는 잡지정도여야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피력한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원칙에 따라 어제 먹으나 오늘 먹으나 나중에 먹으로 유사한 품질을 보유하는 능력과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저히 질 또한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관리할 수 있는 순간에 권력이 생기는 것이며 상대는 의식하게 된다. 문화권력의 출현과 시작은 되었다. 하지만 양과 질을 담보하기에는 이것저것 보듬을 일들이 많은 것 같다. 참고지점을 이렇게 둔다. 어떻게 다른 분들은 받아들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덧붙임 

 

만부정도 발행부수, 계간지로는 창비 다음으로 부수가 많다. 회원 3천부 플러스 천부정도 소화하고 판매가 9천원으로 재단 회원가입을 유도하는 편이다. 년 2억정도 예산이 들고 있으며  4천여명되는 회원구조, 광고수입등으로 부족하지만 충당하고 있다.  회비의 구조는 파레토법칙과 마찬가지로 회비8:2가 2:8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것에 걸맞게 음악회, 역사기행 등은 행사에 VIP 회원은 별도로 관리를 한다.

 

편집 마감일은 꼭 지키는 편이고, 편집방향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원고료는 지불하고 싣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편집은 편집장과 편집부장 2인이 하고 있다. 사무국과 관계는 회사 홍부일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도와주면서 거꾸로 황해문화의 실무적인 일을 도와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편집위원과 편집주간, 별도의 기획의 경우 상대적으로 월정액, 플러스 알파를 주면서 도움을 받고 있다. 편집주간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현 현 주간은 무림학림 학생운동 출신으로 방향과 운영측면에서 잘 맞는 편인 것 같다. 원고료는 원고지 한매당 8천원, 정해진 매수를 넘길 경우 한계를 두고 정하고 있다. 각주도 가급적 달지 않고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편집원칙을 두고 있다.

 

매월 조찬강연도 역사기행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시각에 시작하며 자리를 잡아 년초에는 시장이 하는 것으로 관례화되어 있다.(강연책자 참고) 지역 유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선을 긋고 만나지는 않는다. 행사의 내빈 소개는 사무국에서 일일이 꿰고 있을 정도로 잘하는 측면이 많다. 역사기행도 기장, 시관계자와 자연스런 자리를 마련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서비스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공연의 경우도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 신경쓰고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공유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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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같이 일하면서 - 늘 우리는 주변에 있음을 느낀다. 어둠과 밝음, 차거움과 뜨거움의 경계. 부잣집에서 아무 문제없이 착하게 큰 아이들이기보다는 변두리에서 삐둘어지기 직전의 기질이 남아있는, 보기좋게 야생성이라 불러주자. 제대로된 일터에서 부대끼면서 근무한 경험도 없다. 후줄근한 틀이 잡히지 않는 일상과 습속의 경계에서 막 사회로 복귀한 사람들처럼. 순간 무너지거나 불안을 안으면서, 예의도 없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지지리 못난 양아치 비슷한 구리구리한 것들이 풍기기도 한다.

 

중심이 되어보지 못한, 피해의식은 한바가지씩 갖고 있고, 그래도 중심이 되지 않으면 불안한 인간들. 발굴한 것인지 발굴당한 것인지. 그 틈바구니에 밀리고 부딪치고 뒤돌아서면 또 원점들인 그런 감정들의 숲과 일사이를 거닐었던 것 같다.

 

아웃사이더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높게 값을 불러주는 것이고, 지지리 궁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값을 낮게 부르는 것이어서 참 적절하게 부른다는 것이 어렵다. 왜 그들에게는 성인기가 사라져버린 것일까? 표현의 총합이 모임이나 조직에 늘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관두거나 네가 나가거나 극단의 표현과 무시가 감정의 온도가 끓으면 되풀이 되는 것일까? 왕년의 한자리가 기억과 몸을 정신 못차리게 해버린 것일까? 너무도 자주 쉽게 우울과 습자지 같은 현실의 벽에 닿는다. 비가 오면 쉽게 습기를 머금는다. 우울이 배인다. 도모하기보다 도모의 선순환으로 다가서기보다 일일 날품팔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진폭이 크다.


모르겠다. 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답인지. 또 누가 드나들다 지쳐버리는 것인지. 애초 각이 잡히고 폼이나고 든든함을 바탕으로 좀더 길고 멀게보면서 가는 일은 또 다른 이의 몫이었는지. 몫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감정의 기울기와 진폭, 모임의 하늘에 구름들이 자주 배회해서 편치 못하다. 그래도 해내고, 해왔고, 포복으로 기기도 하고, 기게하고 그런 것이지만 배가 부르니 눕고 싶다. 피해자 의식은 너무도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우라가 다른 일상이나 일의 경험이 없어 그러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끼리끼리, 모둠의 틀에서 깨어나지 못해 그것에 오랜 기간동안 갇혀 있었다는 것을 벗어난 뒤에서야 알았으니 그리 탓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 참 여운이 많다. 지금까지. 관계도 일도, 여러 매듭도, 관계의 유지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


3. 숙부 납골함을 조부모 산소에 이장하다. 숙모가 몸을 많이 회복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오랜만에 사촌동생들 식구를 본다. 이런저런 소소한 일로 인해 부부싸움도 하시고 어르신들이 언쟁도 벌이신다. 도토리로 다듬고 방앗간에 빻고 나르고 잘 맞지 않아 내년에도 이러면 이혼장을 쓰겠다는 팔순 부친. 그래도 좋아 보인다. 마음 놓고 내려오는 길 내내 달빛이 따라다닌다. 밤도 익어 경주 가로의 단풍도 출렁거려 좋다.

 

 

볕뉘. 87년체제, 97체제, 2013년체제. 어쩌면 다 소용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류하고 모으고 이름을 부르고, 그런데 그것이 담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왜소해 보인다. 여전히 또 다른 모습으로 이름은 불리우지 않았지만 체제로 존재하고 흐른다. 어쩌면 앎과 이념의 하위자로 상정하는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활동하는 사람들의 일상이나 삶이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목적, 해야할 일에 먼저 방점이 찍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운동은 조직의 명분과 일이 먼저였지 삶을 놓고 삶으로 더 다가가려 구체적으로 노력한 적도 없다. 조직의 심장은 언제부턴가 뛰지 않았다. 관성대로 그저 갈뿐, 심장이 뛰지 않는 이유에 대해 되묻지 않았다.  들숨만 있을뿐 아주 작은 날숨의 소리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존재의 위치가 정해졌다는 사실의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우고 때론 목소리를 강하게 높인다. 숙부 유골함속의 뼈가루가 습기를 머금고 있다. 소나무로 서서히 스며들 것이다. 누군가, 나도 어느 순간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장담할 수 없다. 삶은 계속되어 왔던 것처럼 또 누군가 삶을 이어갈 것이지만, 아무도 삶을 건드리지 않는다. 아무도 삶을 건네지 못한다. 아무도 삶을 건네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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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17: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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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10 1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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