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하는 것들, 해야만하는 것들, 일들 사이에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일부스러기도 일들 사이 부딪치면서 생기기도 하고, 일의 기세에 눌려 숨으려하는 것들도 있을테고, 해야할 것들에 눌려 식은 땀 흘리는 감정도 있을테고,  혼자가 아니라 같이 템포도 패턴도 맞추지 못해 서걱거리는 것도 있을테고, 일의 성취감에 뿌듯함도 어깨를 들썩이기도 할 것이고...잘한 것 빼고, 잘한 것 나누고...행간과 사이 사이, 소소하거나 미쳐 눈치채지 못한 것들, 보지 못했던 것들, 아마 일의 즙같은 것들, 사이사이 생기는 화나 울화, 미쳐 따라가지 못하는 마음들, 조바심, 안타까움들, 이런 것들을 묶어 감성이나 감정이라고 하자. 일의 그림자나 하고싶은 것들의 여운들이라고 하자.

 

그리고 시간의 그릇에, 시간의 용기에 총량과 느낌이 일정하다고 하면 그 느낌의 성질이나 느낌의 정서를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크나큰 아둔함은 아닐까. 그 화가 거꾸로 일을 불사르려하거나 하고싶은 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거나....일과 해야할 것, 하고싶은 것 하고마는 것의 용기의 팔할은 이렇게 쓸데없거나 쓸모없거나 한 것은 아닐까. 일을 잘하는 능력 하고싶은 것을 잘 해내는 것의 하나는 그림자들을 잘 모아 잘 쓰고, 잘 풀고 잘 다루는 것에 있지는 않을까... ...

 

덧붙여 보는 마음들! (콕)

 

어젠 보름달은 아니지만 노아란 은행단풍처럼 얇고 은은하다. 언제부터인가 꿈을 기억해내고 기록하고 미처 다다르지 못한 느낌들을 살피고 있다. 사람들은 지식과 지혜를 얻고 넓히는 만큼 잔학무도함, 잔인함, 악날함, 공포심들을 같은 높이와 넓이로 키워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불쑥 불쑥 비집고 나오는 꿈들은 무엇일까, 감정의 켜, 발산을 하지 못한 응어리들, 말로 표현되지 못한 형상들... 일정시간의 용기에 들어있는 앎과함, 그리고 담겨져 있는 감정들. 그 감정들은 발산이나 앎과 함과 잘 어울려지고 풀어졌는가 궁금해졌다.

 

하루에도 몇번씩 꿈꾸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불쑥불쑥 생기고 욕망하는 감정들은 발산되거나 발랄하게 소화되는 것일까? 음악도 체육도 미술도 없는 앎밖에 없는 그들이 꾸는 꿈은 무엇일까? 그렇게 쌓인 감성과 감정의 켜들은 얼마나 몸을 비틀고 있을까? 일터에 회의만 있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닌듯 폐기처분되는 일상에 얼마나 신음할까? 변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살거나 풀 수 없는 몸틀, 일틀의 왜곡은 어찌하여야 되는 것일까?

 

모임은 하고싶은 것만, 해야되는 일만 챙긴다. 아무도 감성과 감정의 결을 살피지 않는다. 불쑥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그만두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감정과 감성을 소화해내는 틀이나 방식도 없어 헤매고 치이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것은 아닐까? 지식과 지혜는 파괴 본능과 일소해버리는 함으로 구태를 반복해왔다고 한다. 배회하는 감성과 감정이 궁금해진다.

 

되는 곳과 되지 않는 곳의 차이는 무엇일까? 신바람은 나는걸까? 하게하는 것일까? 풀게하는 것일까? 그런면에서 보면 농사를 짓고 축제를 하고, 디오니소스 찬가를 부르는 것은 정말 사려깊고 현명함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야할 일에만 목매여서 고삐를 틀어쥘 감정과 감성에 맥없이 끌려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시간의 총량, 몸이란 용기의 총량에서 감성이나 감정의 온도를 잴 수 있을까? 모임이란 용기에 온도계를 넣어볼 수는 없는 것일까? 관심은 있는 것일까? 감정이 어깨걸고 뿔이 나서 황량한 겨울바람처럼 씽씽 나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꿀 수 있는 꿈이 궁금하다. 꾸어지는 꿈이 궁금하다. 나누는 일상이 달라질 틈은 없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성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고 착각하면서 시간에 누적되는 감정들을 다루는데 어색해하거나 곤란해하거나 그냥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다루려고 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가끔은 눌린 감정들의 이빨에 물려 서로 꼼짝달싹 못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은 절름발이 이성만 써서 절뚝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오버겠지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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