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한국의 위로부터의 근대화 전략은 경제성장 최우선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왔다. 이로 인해 국가는 자원을 개인의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경제개발에 투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개인 보호 의무를 가족에게 떠넘겨왔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생존을 위해 가족을 중심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장치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즉 한국의 가족은 사회복지 기능 대부분을 떠안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족주의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면서 가족 내에서 전통적인 가치가 선별적으로 재구조화되었다.  320


서구에서는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어왔던 가족이 한국에서는 국가 존립과 국가 기능의 최소 단위로서 작동되면서 준공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는 유교적 국가와 가족의 관계가 근대적 상황에서 재구조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은 전통과 근대의 분리와 중첩 상황을 보여주는 전형 중의 하나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혈연,지연,학연은 말할 것도 없고 재벌 등의 사기업과 종교단체까지 사회 전반적으로 자식 대물림과 배타적, 폐쇄적 공동체 및 공동체주의 등이 지속되고 있는 근저에도 한국 근대의 가족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한국 근현대의 가족이 사회철학의 대상으로 중요하게 분석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이처럼 한국의 가족이 한국 근현대의 변화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320


대부분 서구철학과 전통철학이 가족을 철학함의 핵심문제로 다뤘지만, 근대 이후 서구 철학 수용사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질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가족이 왜 철학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철학적 중심 의제로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근대 이후 철학 전문가들은 현실에 기반을 둔 철학적 사유를 확장하는 걸 대신해서, 서구 철학 이론을 그들의 사유와 기호에 의거해서 소개하고 해석하는 데 집중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특정 서구 이론에서 제기된 가족 관련 이론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간간이 있었지만,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적 논의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생소한 영역이었다. 가족뿐만 아니라, 개인, 사회, 국가, 시민 등 한국 근현대에 진행되어온 사회적인 문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도 사정은 유사하다.  322


첫째, 한국 근대 가족에 대한 논의를 위해 '복합 성찰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한국 근대의 가족은 서구 가족의 역사에서처럼 전통 가족에서 근대, 현대 가족으로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한국 근대의 가족에서는 압축적 근대화,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전통과 근대 그리고 현대적 요소들의 중층적 현존과 이들의 상호 영향 주고받기를 통한 변용과 중첩화, 그리고 이로 인한 다양하고 이질적인 가족 형태의 혼성화'라는 특유의 복합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323


산업화사회, 지식정보사회로의 사회의 역동적 변화에 적응해온 한국의 근대 가족이 농촌형 직계가족 유형이나 농촌형 핵가족 유형에서 도시형 핵가족 유형이나 일인가족 유형으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가치관을 역동성에 맞추어 변화시킴으로써 특정한 가치관을 절대화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상대화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25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주도권을 넘기고 받는 데 익숙해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편차 큰 가치관의 변동이 현실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사회 자체가 역동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한국 사회는 이처럼 빠른 변화와 역동성으로 인해 각 세대의 가치관도 사회의 역동적 변화와 함께 변화함으로써 각 세대 혹은 가족 구성원이 특정 가치관을 상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적 헤게모니의 변화에 대해서도 하나의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한 사회적 헤게모니와 주도적 가치들을 성찰적으로 상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325


둘째, 서구 사회철학 이론에서 사용되고 있는 자유주의/공동체주의, 사적 영역/공적 영역 등의 양자택일적 이분법을, 한국 근대 가족의 복합적 구조를 고려해, 최소한 오분법으로 세분화할 것을 제안한다. 326


근대화, 산업화 이후에도 국가가 복지를 가족에게 전가함으로써 가족은 삶을 위해 가족주의를 강화해왔는데, 가족 구성원 사이의 희생과 헌신, 사랑과 친밀성은 강화된 반면, 가족 이외의 타인과 타 가족에 대한 고려나 배려는 찾아볼 수 없는 반사회적 가족이 양산되었다. 1990년대 이후 국가가 사회복지 투자를 하고 가족 구성원에 대해 최소한의 사회보장을 함으로써 공과 사 개념이 변화하면서 개인과 가족공동체 그리고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327


해결책은 가족주의가 지니고 있는 긍정성을 시대에 맞게 재구조화하고 부정성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동체의 문제에 국한해서 보자면 한국 가족의 문제는 강한 폐쇄적, 위계적 가족공동체를 개방적, 수평적인 민주적 공동체로 변경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자기 가족만의 폐쇄적 사랑과 친밀성을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랑과 친밀성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조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328


한국 가족을 분석할 경우,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는 1) 자유주의, 2)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 3)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4)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5) 공동체주의로 세분하고 그 분석의 중심축을 1)과 5)로 보지 않고, 이를 대신해서 2)와 3) 그리고 4)로 두는 시각의 전환을 제안한다. 한국 가족에서는 1)과 5)는 이념형인데, 현실에서 작동되고 있지 않는 1)은 이론적으로 유입된 서구적인 이념이었으며 5)는 근대 이전에 작동되었던 전통적인 유교 가족주의 이념과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된 폐쇄적 가족주의의 특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329


1) 개인, 2) 개인 중심 공동체, 3) 개인과 공동체, 4) 공동체 중심 개인, 5) 공동체/ 1) 사적영역, 2) 사적 영역 위주에 공적 영역이 혼합된 영역, 3)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4) 공적 영역 위주에 사적 여역이 혼합된 영역, 5) 공적 영역  330


셋째, 한국 근대 가족에 대한 철학적 제안은 세계적으로도 타당한 하나의 모델로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근대의 산물이기도 한 한국 근대 가족이 지니고 있는 특징들을 세계사적으로 주변부의 특수한 사례로서 평가절하할 필요가 없다. ...서구 근대는 한국 근대에 비해 훨씬 단선적이거나 복잡성이 덜한 상태로 전개되어 왔으며, 이에 따라 이론적 맥락도 훨씬 더 단순 논리적 양자택일의 방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전통적으로 존재해온 체계 및 가치와 자의적으로 단절하고 서구 근대성을 근대화를 위한 전략으로 선택, 수용해왔던 한국의 혹은 더 넓혀서 비서구의 근대화의 길은 그만큼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331


한국의 근대적 유산들에 대한 분석과 성찰에 의거한 해석은, 서구적 맥락에서 유래하는 현실에 대한 이론 해석 작업과는 변별력이 있는, 또 다른 현실과 이론의 어울림이나 결합 형태를 보여주고 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이 축적될 때, 그리고 새로운 결합 체계가 완전한 형태로 그 이론적 모습을 갖출 때 우리는 서구 이론에 대한 적확한 자리매김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332


철학이 현실과 사유 주체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소산이라면, 사회철학은 사회 현실과 그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자와의 부단한 대화의 소산일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근대 내내 이러한 상식적인 철학함에 너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너무도 오랫동안 오직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라는 구도 속에 전문 용어들을 해석해왔기에, 철학에 고유한 영역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온 것이다. 특히 대학의 강단 철학에서의 가르침과 사유 방식은 현실과 연동된 문제 중심의 철학함을 너무나 도외시 해온 결과 철학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시민의 삶과 유리된 채 오로지 죽은 철학자들의 텍스트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 ....한국의 근대 이래 지속되어온 이 구도가 지속된다면, 우리 앞 세대와 우리 세대가 겪어야만 했던 정신적 망명객 생활이, 학문적 종속성과 악순환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33 사회 현실 분석을 위해 우수한 트레이너를 만나 열심히 사사받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그러나 청춘을 트레이닝 기간에 다 고갈시켜버리면 그저 자기가 배운 것을 무기 삼아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트레이너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가족의 역사적 진행이나 근대화 과정에 대해서는 서구보다는 오히려 한중일 3국의 경험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 유사성과 차이성을 더 실체적으로 보여준다. 336 한국의 가족주의가 갖는 폐쇄성과 이기주의는 3국 비교에서도 가장 높게 나타난다....한국의 가족주의가 가족 이기주의를 벗어나지못해 이것이 타인과 다른 가족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시로 이어지는 반사회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는 점도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근대화 시기의 폐쇄적, 이기적 가족주의의 강화와 가족에 대한 배려, 헌신, 친밀성, 이타적 사랑 등의 동시 강화가 한국 가족의 양면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양면적인 가족주의의 가치가 아직도 한국 가족 내에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337


넷째, 서구의 개인주의에 내포된 자기중심성이 지닌 난점을 지적하고 실체적 규범만을 옹호하는 실체적 공동체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서 철학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논점으로서 이상적인 의사소통 공동체 이론을 한국 가족 분석에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한국 가족의 미래상을 구상하기 위해 서구적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상호 보완적 구조화를 제안한다. 338


국가는 개인과 가족을 더 이상 방기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개인이 최소한 국가으 시민으로서 살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강화해야 하며 가족을 근간으로서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개인과 가족이 바로서지 않는 국가는 더 이상 긍정적인 미래상을 만들어가지 못할 것이기때문에 그렇다. 339


폐쇄적인 가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체적 공동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이상적인 형태의 공동체를 성찰적으로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체적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 가족과 근대적 개인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개인주의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전망이 없어 보인다. 그것은 한국 근대 가족이 내포하고 있는 복합적 사태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폄으로는 근대 내내 발달하지 못했던 개인과 개인주의를 일정 부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반명에 근대 가족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가족 구성원 간의 헌신과 배려, 사랑과 친밀성 등의 공동체적 덕목들을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으로 해체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이것 또한 근대 가족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340-341


다섯째, 지식 기반 사회와 지구화의 확장이라는 달라진 사회 환경 속에서 변화하고 있는 인간관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42

 

 

한국인이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보인다....한국의 문화는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46


현세구복적이란 현세만을 유일한 세계로 인정한다는 것과 현세에서 초월이 아닌 세속적 복을 염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현세구복적이란 말을 내세도 인정하는 것으로 보아, 현세에서는 복을 내세에서는 영생을 염원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한국에서의 함의는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럼 지금 이 세계가 유일한 세계라는 믿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죽은 후의 세계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 다시 말해서 내세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고는 한국인에게는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세계관이다. 여기에는 현세가 내세를 위한 준비단계라든가 내세가 참된 세계이고 이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다.  49-50


신약은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부활, 즉 내세는 없다. 죽어서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유대교는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도 유대교에서는 선지자 중의 한명일 뿐이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믿으면서도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독특한 믿음체계를 갖고 있기에 확고한 믿음 속에서 현실세계를 꿈꾸며, 그들의 눈부신 성공과 생존력은 이런 믿음체계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내세를 신봉하는 인도의 경우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50


주자는 "제사의 이치는 역시 자손의 정성이 있으면 조상의 신이 있고(이르고), 정성이 없으면 신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귀신의 이치는 바로 이 마음의 이치이다"(어류)라고 말하고 있다. 55


불교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깨달음에 의해 윤회의 사슬을 끊어야만 한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은 자인 불타는 생애를 마치면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즉 윤회에 속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은 자에게는 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58


기독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타력구제 신앙이다. 한국에서 기독교문화는 기본적으로 예수를 거쳐 하느님이 신자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즉 불교에서 아미타불을 거쳐 부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구조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기독교 역시 스스로를 수양하거나 선행을 하는 것보다 예수를 믿는 일이 더 중요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는 없다. 예수를 통하거나 성당을 통하거나 중개자를 통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타력구제 신앙인 것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불교와 기본적 구조가 다르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즉 믿는 대상이 부처에서 하느님으로, 아미타불에서 예수로 바뀌는 것뿐이다. 63


일본인들이 큰소리로 싸운다면 그것은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결심이 선 후에나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열심히 큰소리로 싸운다. 하지만 돌아서면 이 세상이 다이고 시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67


나름 합리적이다 - 구조가 바뀌어 일하는 대로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의 모습이 바로 이런 합리적 선택의 결과이다. 북한에도 이런 모습이 있는 것 같다.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일을 열심히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이 효과가 있을 때에는 열심히 일했고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폐쇄정책이 더이상 인민들에게 식량을 줄 수 없는 것이 증명된 후에는 모두가 자신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 눈물겹게 노력하고 있다. 73


빨리빨리 현상은 나름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생존이 문제가 되었던 시대에는 남보다 한발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빨리빨리하는 것은 합리적인 대응이었다. 생존을 해결한 후의 생활의 시대까지 빨리빠리는 남아 있었지만, 행복과 의미으 시대에 빨리빨리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다. 75


저승이 이승의 일부로 존재하거나 저승이 이승보다 더 진실된 세계라면 한국인들의 스트레스는 상당 부분 감소할 것이다. 흔히 홧병이라고 불리는 한국적 현상은 조급성이 가져다준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해결되어야 하는데 해결이 안되면 마음이 급해지고 마음의 병이 홧병으로 도진다. 홧병을 한국 특유의 병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의 정신세계, 한국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짧은 인생에서 할 일은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억울하고 기막힌 일들이 생긴다면 홧병이 안 생길 수는 없다. 즉 조급성이란 특정한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76


신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는 결코 인간중심 사회가 될 수 없고, 인간중심이 아니라면 인생주의도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라고 해서 인생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제도나 인간이 만든 작품에 삶 자체보다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문화는 자연이나 인간의 제도나 작품이 아닌 인생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생주의다. 78

 

 

볕뉘.  점심에 잠깐 도서를 반납하러 갔다. 한권을 깜박하여 반납을 하지 못하여도 오늘까지 대출을 할 수 있다한다. 검색란에 동학이라고 치고 도서번호를 옮겨적고 찾는다. 생각보다 원하는 책들이 보이지 않아  분류번호 200대로 옮겨 고르다 보니,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고르게 된 책이 세권이다. 동경대전과 한국가족, 한국인이다.  보름으로 가는 가을달이 참 이쁘다. 도서관 한자리에서 주섬주섬 책을 본다.

 

돌아와 손길을 끄는 문학의 아토포스 책 1장을 펼쳐든다.  저자는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이란 책을 설레이면 읽었다고 한다. 2000년대 시인들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있기나 한 것인지라고 말한다. 예술과 정치, 그리고 삶.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가장자리를 넓히려고 애쓰는 학자로 알고 있다. 시인들에게 되묻고 있다. 랑시에르의 입을 빌려서 말한다.

 

위의 저자 권용혁은 강단 철학에 대해 말한다.  서구철학, 동양철학 우리 몸과 삶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그런 의문에서 시작하여 10여년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듯하다. 한중일 가족연구도 그 연구 결과물이라고 한다.  지금 여기의 음악의 변천사도 그러하지만 딱 무엇이라고 규정짓기가 쉽지 않다. 다른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기도 그렇다. 우리 몸말, 현실과 생각의 차이, 아 맞다 무릎치는 이론이 있다면 더욱 서로 나아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탁석산은 조선과 한국은 지층의 단절처럼 전혀 다르다고 가정하면서 이야기를 출발한다. 절과 성당과 교회를 아무렇지도 않게 옮겨다니는 현실은 서구에서 용납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복을 구한다는 의미에서 장려되기도 하는 곳이 여기라고 한다.

 

참 할말이 많으면서도 말을 잇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방법의 문제도 여전히 잠복하는 있는 것이 현실인 듯하다.  어쩌면 다 없는 것으로 여기는 파격까지 포함해서... ... 여러 생각이 많이 스미는 따듯한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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