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사람들은 헌신, 특히 장기적인 헌신은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과 관련해 다른 어떤 위험보다 더 먼저 피해야 할 덫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한 전문 상담가는 독자들에게 "썩 내키지 않는데도 누군가에게 헌신하려 할 때는 훨씬 더 만족스럽고 성취감도 더 클 수 있는 다른 로맨틱한 가능성을 향한 문을 닫아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또 다른 전문가의 말은 훨씬 더 퉁명스럽다. "헌신에 대한 약속은 장기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다른 투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침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계 맺기'를 바란다면 거리를 유지하라. 함께함에서 뭔가를 이루려 한다면 헌신하지도 헌신을 요구하지도 마라. 언제든 모든 문을 열어 두라. 22
'가벼운 외투처럼 어깨에 걸쳤다가'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23
관계들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고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워 보이고 '헌신이 무의미해진다면' 파트너 관계를 네트워크로 바꾸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하면 이전보다 안착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질(그래서 더욱 달갑지 않을)뿐이다 - 그러면 그나마 과거에는 통한 또는 통할 수 있던 기술이 그리워질 것이다. 계속 움직이는 것 - 이것은 한때 특권이자 성취의 상징이었다 -이 이젠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속도를 유지하는 것은 한때는 아주 신나는 모험이었으나 이젠 사람의 진을 빼는 따분한 일이 되었다. 26
대체로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기준을 높이기보다는 낮추어왔다. 그 결과 '사랑'이라는 말로 언급되는 경험의 범위는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원 나잇 스탠드'도 '사랑을 나눈다'는 암호명의 하나가 되었다. 37
사랑이 돈 조반니의 지칠 줄 모르는 탐색과 실험의 목적이었다면 '다시 한번 해봐야지'라는 강박관념이 그러한 목적을 좌절시켰다. 사랑의 '기술'의 표피적인 '습득'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사랑에 대해 전혀 무지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즉 돈 조반니의 경우에서처럼 사랑에 대한 '훈련된 무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38
겸손과 용기 없이는 사랑도 없다. 누구든 전인미답의 미지의 땅에 들어갈 때는 언제나 이 두가지가 요구되며, 게다가 끊임없이 엄청나게 새로 공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생길 때 그것은 그들을 그러한 영역으로 안내할 것이다. 42
욕망이 구심성인 데 비해 사랑은 원심성이다. '거기 존재하는' 것에까지 관계를 확대하고, 넘어가고, 손을 뻗으려는 충동이다. 그것은 대상 속의 주체를 삼키고 흡수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욕망과는 정반대이다. 사랑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 매번 이처럼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 사랑하는 자아의 살아 있는 자취가 된다. 사랑에서 자아는 조금씩, 조금씩 세상에 옮겨 심어진다. 사랑하는 자아는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확대된다. 47
욕망이 소비를 원한다면 사랑은 소유를 원한다. 욕망의 충족은 대상의 소멸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 반면 사랑은 대상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커지고, 오래 지속될수록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욕망이 자기-파괴적이라면 사랑은 자기-영속적이다. 48
이중 최악의 것은 욕망의 충족이 지연되는 것으로, 분명 속도와 가속을 중시하는 우리 세계에서 가장 혐오하는 희생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은 점점 더 근본적인 것이 되고, 줄어들고, 무엇보다 간결해진 바람으로 체화되면서 그처럼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속성을 대부분 잃어버린 반면 좀 더 철저하게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음 가는 대로, 그러나 기다릴 필요없이' 53
아무리 보아도 이처럼 사업적 거래로 바라본 관계는 불면에 대한 치유책이 아니다. 관계에 대한 투자는 안전하지 못하며, 아무리 달리 희망하더라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두통거리이지 약이 아니다. 관계를 이익을 가져다줄 투자나 안전의 보장책 또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라보는 한 어떤 결과에서도 모두 지게 될 것처럼 보인다. 외로움은 불안을 낳는다. - 관계들은 단지 그런 것 밖에는 하지 않는 것 같다. 58
"불안감을 느낄 때 연인들은 비위를 맞추거나 아니면 통제하려 들거나 심지어는 물리적으로 몰아세우려는 등 비건설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게 만들기 쉽다." 일단 불안감이 스며들면 항해는 결코 자신감 있고 사려 깊고 안정될 수 없다. 방향타를 잃은 인간관계의 허약한 뗏목은 수많은 인간관계들이 좌초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두 암초 사이에서, 즉 전면적인 복종과 완전한 권력행사 또는 양같이 온순한 수용과 오만한 정복 사이에서 동요하면서 자기 자신의 자율성을 없애버리고 파트너의 자율성을 질식시켜버린다. 이 두 암초 중의 하나와 부딪치기만 해도 노련한 승무원이 모는 배도 난파되기 쉽상이다. 59
감정에 압도당하도록, 그래서 붕 뜨도록 하면 안 된다. 또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편의성이다. 편의성은 냉정한 머리의 일이지 따듯한 가슴의 일이 아니다. 72
본래 위치인 윗주머니에서 빠져나오도록 놔두어서는 안된다. 항상 정신 차려야 한다. 경계심이 낮잠을 자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자비가 '감정의 저류'라고 부르는 것에서 생기는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면밀히 감시하라.(분명히, 계산에 포함되지 않게 되자마자 감정은 '저류로 흐르는' 경향을 띠게 된다.) 예상하지 못하거나 신경을 쓸 용의가 없는 어떤 것이 간파되었을 때는 바로 "기왕의 관계를 청산하고 다른 파트너를 찾아나서야 할 때"임을 명심하라. 72
70년대에 세넷은 '정치적 범주들을 심리적 범주들로 바꾸어버리는' '친밀성의 이데올로기'의 도래를 지적한 바 있다. 90
'버디-버디'류의 관계에서는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가 오고가는 것, 즉 메시지의 유통자체가 메시지이다....오늘날 마치 강박증에 걸린 듯 고백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하는 것과 30년 전에 세넷이 우려한 바 있는 신뢰의 남발을 혼동하지 말라. 무슨 말을 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목적은 더 이상 영혼의 내면을 상대방이 가만히 살펴보고 동의하게 하려는 데 있지 않다. 말이나 문자로 보내는 단어들은 더 이상 정신적 발견의 여정을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말을 끝내면 당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침묵은 배제와 동의어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95-96
"칠 조심" ---
내 마음이 조심하지 않는 바람에
내 기억은 종아리와 뺨과
팔과, 입술과, 눈에 온통 얼룩져 버렸다.
내가 너를
그 모든 성공과 실패보다 더 사랑한 것은,
너와 함께 있으면
누르스름한 흰 빛이 하얗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어둠 또한
친구야, 맹세하건대, 어떻게든 하얗게 되리,
헛소리보다 전등갓보다도
이마에 감은 흰 붕대보다도 더 하얗게!
_보리스 파스테르나트, [칠 조심] 전문
볕뉘.
1. 제목처럼 책은 사랑에 대해 희망을 비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액체근대, 리퀴드러브, 액상인 사랑은 뿌리내지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관계'라는 말도 부담스러워 네트워크로 회피하고 욕망처럼 소비해내지 못하면 숱한 상처들로 일상도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1장을 읽고 덮는다. 될수록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싶어하는 책으로 읽고 있다. 답이 있거나 답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2. 전봉준의 공주전투 장면을 읽으면서 그 우금티를 떠올렸다. 날짜로는 11월 8일부터 그러니 3-4일 뒤다. 그때는 발목까지 눈이 내렸다고 한다. 만명이나 되는 농민군이 500명으로 줄면서 퇴각하기까지, 그리고 순창에서 밀고로 잡히기까지 따라가본다. 전봉준 훈장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정약용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서당을 차리기도 하고...아직 정확한 사료가 부족하거나 신화화된 것에서 이이화선생님은 좀더 친근하고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한다.
3. 진은영 책이 걸려 구해본다. 실망시키지 않을 듯싶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도 꼼지락거리는 됨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서문의 끝부분은 칠조심이란 시로 시작하고 있다. 너에 대한 마음들은 늘 그러하지만 나도 너도 이 세상에 흘러가기만 해 어쩌지 못하고 있다.
4. 책이 우르르 몰려와 어떻게 할지 궁리하느라 가을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