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토피아의 전망

 

 


토머스 모어는 어디에도 없는 곳을 뜻하는 오우토피아란 말과 좋은 곳을 뜻하는 에우토피아를 섞어 유토피아라는 말을 만들었다. 269


한때 지식의 세계와 몽상의 세계가 분리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당시에는 모든 실천적 목표를 위해 예술가와 과학자가 '외부세계'를 마찬가지 관점에서 보았다. 지금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초기 단계에서는 공통의 지식과 신념을 가진 공동체 문학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이러한 중심적인 문학으로부터 과학이 분리된 것은, 서양 세계에서는 아마도 플라톤이 죽은 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사에 대한 여러 저술이 나왔을 무렵이었으리라..그의 저술을 공개적인 것과 비교 秘敎적인 것으로, 대중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으로 나눴다. 철학자, 예언자, 시인, 일반 대중의 영역의 배경은 인간 경험의 보편성이고, 그 방법은 토론과 회의이며, 그 기준은 형식논리였다. 이 분야는 특히 공동체와 관심을 공유하고, 인간적이지 않은 것은 없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붕괴에 이어 그리스 사상이 경직화되자 과학적인 분야가 서서히 독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세기 그 신봉자들은 더욱 인간적인 분야를 다루는 학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자연과학자로 불렸다. 그 주제가 과학으로 알려지고 그 담당자가 과학자로 불린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271-272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는 반면, 과학자는 "인간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를 알라"고 말한다. 과학의 진보에 따라 이러한 태도는 불행히도 더욱 굳어져 문학과 과학 사이,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알력은 더욱 커졌다. 이는 예술과 과학 모두에 특이한 왜곡을 낳았다.  272


만일 과학이 다시금 확고한 인간의 가치 체계에 준하여 교화되고자 한다면, 과학은 개별 지역사회와 그 사회가 제안하는 해결책에 초점을 다시 맞추어야 한다. 이집트에서 기하학이 생긴 것은 매년 나일강변에서 없어지는 경계선을 조사해야 했기 때문이었고, 고대 바빌로니아 남부의 칼데아에서 점성술이 발달한 이유는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 계절의 변화를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현대의 지질학은 휴 밀러와 같은 실제의 석공이 직면한 의문에서 발전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과학은 개별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상황과 지적 유산을 조사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해 온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279


과학의 방향을 바꿀 필요성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식은 원동력이 아니라 도구이고, 따라서 세계를 안다고 해도 세계에 반응할 수 없다면 우리는 목적 없는 실용주의를 낳은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그 실용주의로 인해 목적 없는 모든 종류의 정교한 기계를 고안해 내고도 그 기계를 일관되고 매력적인 행동양식에 종속시킬 수 없게 된다. 282


르네상스의 위대한 업적은 그 능력을 완전히 불태우는 인간이라는 이상, 즉 예술가, 과학자, 기술자, 철학자 등으로 삶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인간의 이상을 보여 준 점이다. 283


내가 이해하는 한, 과학과 예술, 지식과 몽상, 지적 활동과 정서적 활동을 분리시키는 순수한 논리적 근거는 없다. 그 두 가지의 분리는 단지 편의의 문제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지적 활동과 정서적 활동은 그 형식이 달라도 모두 혼동 상태에 있는 자신을 깨달은 인간이 거기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휴머니스트의 관점이다. 284


17세기 중반이후 과학자와 예술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간주됐고, 과학의 이돌라와 예술의 이돌라는 하나의 인격 속에 결합되지 못했다. 그 후 실제로 예술과 과학의 비인간화가 시작됐다. 그러한 과학과 인문학의 분리와 함께 예술과 과학은 별도의 길을 걷게 됐으나, 그 각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분리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음은 흥미로운 점이다. 가령 예술과 과학 양자는 더 이상 공동체의 공동재산이 아니게 됐고, 그 각각은 다수의 전문 분야로 분리됐다. 285


교양 있는 계층의 예술이 공동체 전체의 예술과 분리됐기 때문에 예술가 자신이 만족하는 수준 이상의 수준을 낳지 못하게 됐고, 이 점에서도 과학과 지극히 유사했다. 예술 세게는 어떤 의미에서 분리된 세계가 됐다. 공동체에서 나오기 마련인 예술이 공동체의 소망과 감정과는 무관하게 세련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모토는 실제로 전혀 다른 의미, 즉 예술은 예술가를 위한 것이라는 전혀다른 의미를 갖게 됐고, 이러한 방식으로 생산된 예술은 외부의 평가 기준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이 그 신경증을 극복하거나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된 경우가 많다. 공동체와 분리된 탓에 예술가는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286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려고 추구하는 대신, 그의 개인적인 비전을 극단적인 시점에서 보는 것에 몰두했다. 이러한 시점을 '탐미'라고 부른다. 이러한 분리를 초래한 원인에 대해 예술가만 문책할 수 없다.  '미'와 '탐미' 사이의 분열은 아마도 모든 예술에 공통된다. 문학과 음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충분한 사실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287


만일 우리의 순수한 예술가들이 자기 책임에 등을 돌리지 않고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정도로 지적으로 성숙된다면, 젊은 세대는 소포클레스, 프락시텔레스, 플라톤이 만든 사고방식을 익힐 수 있으리라. 현대의 순수예술이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사회와 철저히 단절된 것은 무서운 신경병증의 징조이지 어떤 예술적 소질의 징후도 아니다......예술은 예술가를 위한 것이라고 보는 생각은 신경병적인 개인주의의 표현이다. 그로 인해 예술가는 일반 사회로부터 멀어지고 제멋대로 구는 창조신으로서 고독 속에 통치할 수 있는 사적 세계에 차단된다. 반면 예술은 대중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내향형 결함을 외향형 결함으로 대체시킨다. 내가 예술은 공동체와 활발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할 때, 이는 예술가가 대중의 변덕이나 요구에 영합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사회를 배경으로 한 예술은 예술가 개인이 카타르시스를 얻는 수단이 아니고, 공동체의 무한한 허영심을 달래는 노예도 아니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완전히 공유할 수 있는 양식과 형식으로 변화시켜 정신적인 배출구를 부여하는 수단이다. 292-293

 

헉슬리, 틴들, 카롤루스 뒤랑, 바스티앵르파주 일파는 예술가와 시인이 그들이 속한 시대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써야 한다고 단언한다....국민의 정치에 대한 열정을 심화하고 예술가와 시인, 수공업자와 일용 노동자에게 공통된 계획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 같이 결합된 이미지는 강인하고 거친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이게 되리라.....예이츠의 생각을 인용했다고 해서 나는 예술가의 역할을 하나의 단일한 기능인 좋은 생활의 패턴화에 한정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순수하게 미적인 체험이 그 자체로 좋은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체험을 예술가가 그림, 시, 소설, 철학 등의 형태로 표현했을 때 그 예술가는 독자적이고 없어서는 안 될 작업을 하게 된다. 294-295


새로운 사회질서를 향한 계획이 우둔한 이유는 첫째, 그것이 추상적이고 도시적이며 인간 환경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인간을 위대한 존재로 나아가게 하는 생생한 양식을 창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획은 "과학으로부터 정보를 얻지 못하고 예술에 의해 고상하게 되지 못한다."

 

예술과 과학이 마비 상태에 있기 때문에 현대의 혁명과 개혁의 계획은, 우리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무질서하고 더러운 환경으로부터 우리의 머리를 드는 데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297 폐해를 낳는 사회 신화들로부터 등을 돌린다고 해서 우리는 무작정 허공으로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과학에 의해 언제나 생기를 부여받고 풍부해지는 다른 사회 신화의 질서와 결합하는 것이다. 301

 

 

볕뉘.

 

지식과 몽상이 구별되지 않는 시대, 예술가나 과학자는 실천적인 목표를 위해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예술과 과학은 사회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가게 된다. 어느 사이에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것도 자신이 어디로 가고있는지 조차 모른다. 시대정신도 읽는 능력도 잃어버렸고 시대를 만드는 감각도 무뎌졌다. 정치와 경제의 틈바구니에서 과학과 예술은 신경증을 토로한다. 발작적으로 자신을 낳은 자신마저 먹어치우려고 한다. '안다'는 것이 스르르 풀려난 뒤 아무도 현실과 그 앎의 사이를 재려고 하지 않는다. 깨달음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세상은 그렇게 미친 듯이 흘러간다. 그는 떨어져나간 과학과 예술을 애타게 찾는다. 삶을 불러들인다. 인간을 위해 우리가 해놓은 것을 상기시킨다.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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