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적 유토피아


 

고전적 유토피아 개혁안의 대부분이, 산업 기구는 사회주의나 길드주의나 협동조합 하에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거기에 결여된 것은 전체의 이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 인식이었다.  245


설령 과거에 산업주의가 이록한 것에 대한 각 당파의 태도를 건전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미래에 대한 그들의 행동과 사회상 전반에 대한 태도는 거의 무관심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임금, 정치적 통제, 생산물의 분배 등에서 일정한 개선이 있어야 했음에도 그러한 개선의 실현은 어떤 명확한 형태로도 반영되지 않았다. '대중 교육', '기성제도의 개혁', '혁명의 실현'을 향한 운동이 일상화되면, 그 뒤에는 풍요로운 평화 시의 들뜬 혁명 슬로건 하에서 애매한 동료 의식만 남았을 뿐이었다. 246


당파적 운동이 다양한 구체적 성과를 낳은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령 소비자협동조합도 영국의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에서 물리적 중압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경감시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운동들의 결함은 분배의 방법을 변화시키면서도 당대 사회체제의 핵심을 변화시키지 못한 점에 있다. 나아가 이러한 당파적 유토피아의 대부분은 명확하고 일관된 가치 체계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코크타운이나 컨트리하우스와 같은 강력한 집단적 유토피아와 대립한 즉시 붕괴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노동운동이 끊임없이 중산계급-구체적으로 말하면 교외와 컨트리하우스-에 흡수되면서 마비되었다. 영국에서도 더욱 세분화된 집단 속에서 거의 같은 정도의 현상을 볼 수 있다. 노동당으로부터도, 당시 각지의 노동조합으로부터도 지도자는 조직을 이탈했다. 247


그 결과 개혁운동은 윌터 웨일이 참으로 그럴듯하게 '지친 급진파'라고 부른, 그다지 흥미롭지 못한 문제로 됐다. 실제로 대도시의 개혁 운동은 유명무실하게 됐다. 그곳 사람들은 집요하게도 추상적인 개혁 계획이나 그 실현이 가까이 왔다는 실감을 전혀 갖지못한 운동에 계속 매달려 왔다. 247


20세기 초 미국의 사회당은 혁명적인 의지를 갖는다는 데서 구별되지만, 심리적인 연출의 면에서는 풍요로운 식사를 특별한 선전 문구로 삼은 공화당과 다르지 않았고, 진보당과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당시 진보당은 강력한 도덕적 신념을 수반한 국민발안, 국민투표, 국민소환을 실현하면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리라고 믿었고 이와 동시에 사회혁명가들은 진보된 온건 노선으로 변했다. 248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당파적 유토피아는 하나의 물신주의다. 물신주의란 부분을 전체로 바꾸고, 대상 전체에서 느껴야 할 정서적 내용을 모두 하나의 부분에 주입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남자가 어느 숙녀의 손수건이나 양말대님을 물신적인 것이라고 한다. 나는 사회주의와 금주운동과 제한선거의 철폐를 위한 운동과 같은 추상적인 '주의 주장'이 당파의 경우 물신적인 것이라고 본다...사회 속의 인간 활동 전체를 대상으로 삼기보다도 금주만을 문제로 삼거나 기계와 토지의 소유권에 집중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다. 그것은 간단하지만 치명적이다. 249


무엇보다도 그들의 근본적인 오류는, 그들의 문제를 정치와 경제라는 부문에만 집중하였지 사회 전반에 걸친 광범한 문제로 보지 않았다고 하는 점에 있다. 다른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활동이나 제한만을 수정하는 것은, 그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장애를 회피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250


어떤 의미에서 기관차는 그것을 만든 인간보다도 완벽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사회체제의 경우에는 그곳에 참가하는 인간보다 완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관차는 기관사와 독립한 존재고, 설령 기관사가 기계 조작 이외의 점에서 불완전하다고 해도 충분히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지만,이와는 대조적으로 사회체제는 그것이 만들어진 것과 그것을 만드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252


개혁가들의 계획은 사실 그 자체가 허약한 날림이었으나 그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기존의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인간, 사실을 자유자재로 분석하고 종합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춘 인간, 동료와 협력하고 화합할 수 있는 치밀하고 정확한 사고방식을 익힌 인간, 개혁을 요구하는 여러 제도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패턴을 비판할 수 있는 인간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비올라 패짓의 말처럼 "인류의 개선을 목표로 한 사고와 직관의 대부분은 그 목적의 달성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유효하지 못한 이유는 객관성과 자기 억제를 결여했기 때문"이었다. 253


중요한 책을 읽고서 그 저자를 만나거나, 중요한 사회운동에 동의하고 그 지도자를 만난 경우, 그 인물의 개별적 특성에서 비롯하는 불쾌감, 편견, 접근하기 어려운 성격을 그의 이론에 대한 공감과 제대로 연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254 대규모 공동 사업의 성공 여부는 핵심적 문제와는 무관한 인간적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숨어 있는 악의를 감안하지 않고 그것을 정화하고자 하지 않는 재건 계획은 , 사회질서라는 그릇을 변화시키지 않고 인간을 신의 은총 속에 살게 하고자 한 낡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피상적인 것이다. 눈이나 몸이 부자유한 사람, 병자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죽기 전에 신의 나라에 이르게 하기 위해 치료했던 저 고대 선동가들의 이야기 속에는 배울 점이 있다. 254


역할의 경우에도 인간이면 누구나 주역이 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애나 재판, 모험과 경쟁과 성공이라는, 그 역할 자체는 그들의 의식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의 가치는 인간적인 가치를 갖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가치란 상공업에 의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진 가치, 즉 능률과 적정 임금 등의 것이었다. 여하튼 이러한 것들이 노력의 직접적 대상이고, 인간적인 가치 등은 설령 그것이 배경 속에 희미하게 떠있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멀고 불확실한 미래에 실현할 과제에 불과했다. 256


미국 남부의 일부 백인 집단은,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진위를 따지지도 않고 그 흑인 남성에게 목펵을 가한다. 이러한 집단행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잔인한 측면을 부각한다. 인간은 본래 생각이 아니라 행동하는 쪽이 먼저다. 왜냐하면 심리학자가 말하듯이 생각은 억제된 행동이고, 태어나면서 억제란 우리와 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한 분노에 몸을 맡겨 장애를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장애로부터 후퇴하여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우회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것인가 하는 어려운 선택에 부딪힐 때, 우리의 본능적 충동은 전자를 따르게 된다. 259


당파성에 따르는 두 번째 결함은 공동체를 수직적으로 분할하고, 인간 생활 속의 수평적 연대와 충성심에 대립하는 가공의 적대감과 동족 의식을 조장한다는 점이다. ...존 어빈의 희곡에 나오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대신에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기병대와 인디언, 사회주의자와 자본가, 금주법 지지자와 반대자를 대치해도 결과는 유감스럽게 마찬가지다. 복잡하게 얽힌 인간의 생활은 사실 그러한 범주를 넘는 여러가지 관계로 성립된다. 그러나 당파의 인간은 유토피아 사상과 대조적으로 이러한 사회 일반의 관계를 경시하고, 사회를 '주의'에 봉사하게 하며, 사회관계를 무시하여 '운동'에 몸을 바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당파주의의 가장 큰 죄악이다. 관계를 경시하는 최초의 방법은 국가주의의 주장자들에 의해 이용돼 왔다.  261

 

정의로운 사람 위에나 부정의한 사람 위에나 비는 내린다. 나아가 우리가 재배한 작물, 우리가 세운 집, 우리가 부설한 도로, 우리가 생각한 많은 사상은 지구와 그곳에 자라는 열매를 계승한 인류의 일원인 우리에게 속한다. 이러한 공동 유산에 동등하게 참가하는 것을 이돌라가 다르다고 하여 배제함은 어리석은 짓이다. 263

 

 

볕뉘.

 

1 자주가는 카페에는 몸이 조금 불편한 이들이 일을 돕는다. 이제는  또박또박 말을 건네는 그들이 정겹다. 퇴근 무렵 간간이 아직 닫지 못한 전시회의 흔적도 덤으로 볼 수 있기도 하고 몸마실하기에도 좋아 찾게 된다. 시끄러운 손님들이 없어 오늘은 마음 편하다.  당파적 유토피아 이전의 꼭지가 컨트리하우스와 코크타운이었다. 사유재산이고 의도하지 않은 바가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선의는 꼭 선의를 낳을 수 있을까?

 

2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1922년, 그의 나이 27-8세. 책장을 덮다가 발견했다. 세상을 살면서 나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리라. 수많은 거인과 거장의 그림자 사이에 거닐고, 그들의 어깨에 올라 다시 그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숱한 한점 한점, 먼지같은 흔적들이 모여 때로는 폭풍같은 한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열려있어야 한다. 세상은 덧셈의 의도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끊임없는 뺄셈을 응시하고, 확인하고 사회의 한 걸음을 딛기위해 부려먹을 재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눗셈과 뺄셈, 숱한 거인들의 아집이 오히려 파멸의 구렁텅이로 넣어버렸다는 점을 다시 응시해야 한다고 한다.

 

3 그의 문제의식은 확연하다. 인류는 전체를 보지 못했다. 인류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와 시스템, 학문 등등 인류의 재산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쓰인다는 딜레마이다. 혁명과 개혁을 원하지만 원하는 가치에만 경도되어 전체적으로 출렁이는 유기적인 그물로 보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인간을 위해, 인간의 자장으로, 인간의 호흡으로 어루만져져야 하는 것들이 사람의 결을 빠져나가 거꾸로 사람을 거역하는 칼끝을 겨누고 있다는 점, 그 연원과 실패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문학에서 과학이 빠져나가고, 예술이 삶에서 빠져나가고, 기술이 문학과 예술에서 빠져나가 버렸다고 한다.

 

4 '지친 급진파'로 넘쳐나는 거리가 여기일까? 어쩌면 우리는 9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의 현실을 목도하고 증명받은 셈이다. 자신이 원하는 진리만 가져가려고 하면 지식을 구하고 탐하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선의가 팔할은 악의로 번지는 것이 더 일반적이라면, 우리는 악의가 낳는 패턴과 습속에 그만큼 노력을 기울이고 배워야할지 모른다. 악의가 낳았던 선의의 결과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제도와 시스템도 허약하기 그지없는 현실을 보자면 군데군데 튀는 표현들이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음미하며 되새겨본다.

 

5  시월 말미다. 하늘은 '어제하루'만큼의 습기가 더 빠져나가 '이틀'만큼 더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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