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설의 인물들과 그들의 세상


 

민족이라는 말은 1903년경에 중국의 양계초에 의해 도입된 말로 비로소 쓰임새가 생기게 된 셈이다. 민족이라는 말이 대한매일신보 논설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08년 초였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도입되고 5년 만에야 적절한 용도를 발견한 것이었다. 재미있는 현상은 1908년 직전에는 민족이라는 말이 쓰였어야 했을 자리에는 인종, 종족이라는 말이 한때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말들의 쓰임은 우리가 우리를 설명하는 적절한 말을 찾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동포에서 민족을 말하는 데 10년이 걸린 셈이다. 156-157


매국노라는 말이 개인적으로 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의가 아니라 이해에 따른 판단으로 움직인다는 뜻으로 느낌을 잘 담은 말이었다. 그런 논리에 반대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낀 것은 정체라는 보편적 문제이기도 했지만 의라는 유교적 사상의 맥락에서 더욱 직접적인 반응이었고 따라서 의병들이 가장 먼저 행동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리으 유학 전통은 민족주의 형성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159


일진회 회원들은 이성과 이해로 판단하였다. 그들에게 국가의 문제는 이성적 판단의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간 우리의 의식,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 아래 침잠해 있던 의가 어느 순간 일깨워지자 그것은 순식간에 이성의 판단을 뒤엎었고 그 결정은 돌이킬 수 없었다. 우리 정체의 의는 나라가 망했어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었다. 현대 우리의 정체의 틀, 한민족임은 구한말 우리가 처했던 고난의 자연상태에서 우리의 조선사람임을 부정했던 홉스적 사회계약을 다시 부정하는 이중 부정의 고통스런 변증법을 겪고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63


구한말 최대의 정치 운동은 일진회 운동이었다. 핸더슨에 따르면 그러한 대규모 운동, 소용돌이와 같은 한국의 정치는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동질성이 강하지만 응집성이 없는 고도로 개인화된 원자화된 사회, 그리고 매개 집단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패턴은 구한말뿐만 아니라 조선 초에서부터 일제 시대를 지나 해방이후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169...일진회를 가능하게 했던 당시의 극도로 개인화된 사회는 조선 사회의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완전히 붕괴되고 분해된 단계, 말하자면 한때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이런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170


한국인들은 보통 자신들이 얼마나 개인주의적인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개인주의적이다. 물론 한국인들은 고독하게 개인으로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개인화된 과정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개인화를 강요당한 셈이었고 오늘날 한국인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개인주의적 삶을 증오하며 공동체적 삶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제 돌아갈 수 없지만, 고독한 개인주의적 삶을 받다들이지 않는다....그들은 라이벌과 경쟁하며 병존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굳이 싸움을 벌이고 개인적인 전쟁을 일으켜 동료들을 희생시켜 가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171


신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당시의 홉스적 자연상태는 우리 사회와 역사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이 땅을 저주하고 한반도를 떠나야 한다는 꿈은 이 시절에 시작되어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상처로 남아 고통을 주고 있다. 그들은 사회 붕괴로 인한 고통을 이 땅 즉 공간의 문제로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 고통스런 땅 한반도를 떠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한반도는 지옥이며, 일본은 좋은 나라이며, 미국은 천당이라는 세계관은 상당히 지속적이고 구조적이었다. 171-172

 

만세 후에 찾은 인물들


김동인 배회 - A는 B를 부러워하였다. 아무런 일에 처하여도, 자기의 본심쭌은 잃지 않는 B는, 어떤 의미로 보아서는, A에게는, 영웅으로까지 비치었다. 아무런 일이든 B는 그 일이나 마음을 지배하였지, 거기 지배당하지는 않았다. 꼭 같은 일을, A와 B가 할지라도, A에게 있어서는 '그 일에 끄을려서 행하는 것'에 반하여 B는, '그 사건을 지배'하였다. A에게서는, B의 그 점이 몹시 부러웠다. 298


무지의 위에 '외래 사상'을 도금한 것 - 이것이 현하의 조선의 상태외다. 타락과 시기의 위에 신사상이라는 것을 도금한 것- 이것이 도회 노동자의 모양이외다. 외래 사상을 잘 씹지 않고 삼켜서 소화불량증에 걸린 딱한 사람이외다. 299


김동인은 1919년 초에 발표된 단편 소설 약한 자의 슬픔에서 우리 근대 문학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를 열었다. 당시에 김동인이 '강한 자/약한 자'를 문제 삼은 것은 당시 유행하던 '개조'또는 '민족개조론'의 연장선상이 아니었다. 김동인의 강한 자 / 약한 자의 문제 즉 힘의 문제는 다분히 독창적인 니체적 발상이었다고 보인다.....김동인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에서 자신은 약한 자의 슬픔에서 마지막에 강 엘리자베트를 자살하도록 하려고 했지만 결국 어떤 이유인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살려주고 말았고 다음 작품인 마음이 옅은 자여에서도 주인공 K를 자살시키려 했으나 그러ㅎ게 하지 못하고 말았고, 자신은 이런 일로 인해서 좌절하게 되었다고 말한다...김동인은 비극을 쓰고 싶었다. 313-314


김동인을 중심으로 한 1920년대 우리 문학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자연주의적이라거나 탐미주의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민족적 과제에 민감한 분위기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김동인은 이광수와는 달리 민족주의자로 민족의 선생으로 자처하는 인물은 아니었고 그런 명분으로 치닫는 글은 피하면서, 오히려 스스로 소설가로 자처하는 인물이었다.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우리 민족에게 결정적이고 역사적인 과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진지하게 추구하던 작가였다. 315


1920년대 후반에 김동인이 발견하 강한 인간들은 김동인이 이전까지 즐겨 그리던 그건 종류의 인물들이 아니었다. 즉 그가 발견한 강한 인간들은, 신식 교육을 받고 개인주의적으로 비교적 고독하게 살아가는 합리적 인간형, 그리고 그가 고백체의 소설 기법으로 잘 묘사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한 인간들은 서구에서 들여온 신문화가 아니라 전통문화에 묻혀 공동체 속에 사는 인물이었다...그들은 주로 마음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지 않는, 따라서 그들을 움직이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는 '블랙홀' 같고 또 '괴수' 같은 그런 존재들이었다....신문화에 대한 집착은 우리 문화의 밖에 있는 것에 대한 허영의 집착으로 우리를 허약하게 만드는다는 것이다. ..블랙홀 같은, 괴수 같은 존재는 길들일 수 없는 존재였고 따라서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존재, 우리가 흉내낼 수 없는 존재였다. 이제 문제는 내면이 있는, 내면이 장착된 지식인으로서 강한 인간을 만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317-319


대도시 지식인의 출현


대도시의 등장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겪는 경험이었다. 이곳은 문명이 만든 폐쇄되고 작위적인 공간이며 마술의 공간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벌어질 수 있는 곳이었다. 낭만도, 사랑도, 범죄도, 살인도, 매춘도, 기적도, 부활도 벌어질 수 있는 곳이었다. 천재를 박제로 만들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상상 想像이 가능한 곳이 바로 이 시대 서울이라는 대도시였다.  363


이상의 날개는 한때 좌절했던 지식인이 다시 생명력과 열정을 회복하는 신화적 생체 실험이었다. 193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평온한 듯 보이는 시기였지만 조선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자신들의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제는 지식의 중개상이 아니라 창조자로서의 싸움이었고 이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 370


새로운 전사의 창조


최석은 이광수가 자신의 시대, 일제 강점기에 만든 강한 인간의 최신 모델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괴물로서의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며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끈질기고, 독살스러우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지가 강한,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의 강함의 핵심 요인은 정임에 대한 사랑과 자신을 지키겠다는 이성이 모두 최석안에서 뜨거운 갈등과 대결을 통해 진정성을 유지하며 상승 작용을 통해 강화되었다는 데 있다. 최석의 죽음은 목숨을 대가로 사랑과 이성의 진정성과 위대함을 증명하는 순교였다. 최석의 힘은 죽음으로 향하는 고난의 삶을 지켜나가는 힘이었다.  419


이광수의 유정에서 제시된 강한 조선인의 새로운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민족 운동의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전사를 창조한 대표적인 작품은 심훈의 상록수였다. 423


김동인은 최초로 강한 인간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인물들로 하여금 죽음을 겪도록 할 만큼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김동인의 강한 인간 모델은 그 과정을 결여했고 따라서 거기서 발생하는 '에너지'도 얻지 못했다. 춘원은 욕망과 이성이라는 지극히 상반된 성질의 요소 사이의 접촉과 갈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를 발견하였고 그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하여 강한 인간을 만들 수 있었다. 김동인은 남녀의 성관계, 특히 타락한 성관계에만 몰입했고 어쩌면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순수한 사랑'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기에 그 신비한 에너지를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김동인의 소설들에서 죽은 이들, 예를 들어 복녀는 부활하지 못했다. 순수한 사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멸의 영혼이 되지 못했다. 429


민중 영웅의 창조


단재가 언어로 민중이라는 말뜻을 명쾌하게 부각시켰다면 벽초는 이 말에 피를 돌게 하고 살을 입혀 우리의 눈앞에 민중의 영혼을 창조하였다. 사회의 밑바닥에 태어난 천상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함께 지식인들 및 외부 계급의 지원이나 간섭을 배제하며 싸워나갔다는 이 이야기는 벽초가 우리의 홍길동 신화를 민중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험은 단수한 아이디어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벽초의 이러한 시도는 단재 신채호의 아나키스트적 민중 개념과 공명하였다. 나아가서 벽초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지식인 계층도 민중 개념을 폭넓게 공유했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의 역사에서 피지배계급들이 독자적인 공동체를 이루면 살아온 전통의 기억에서 민중이라는 말과 이미지는 강한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다 494


동북아 삼구에서 쓰여 온 민중이라는 단어는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개념이라 볼 수는 없다. 지칭하는 대상을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떤 범주의 사람들을 피동적으로 지배당하거나 피동적으로 혁명에 참여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능동적으로 혁명과 저항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말하는 이상, 그 대상은 애매하며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개념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을 현재 상태로 말하는 이상, 민중은 개념이 되기에는 너무나 직관적인 감각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말이며 따라서 그 말의 타당성은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495


반지성주의는 벽초라는 지식인이 자신의 다른 자아인 임꺽정을 창조하며 그의 몸에 힘들여, 억지로 새겨준 격률인 셈이다. 그렇다면 임꺽정의 반지성주의는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민중이라는 유령의 속성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임꺽정은 벽초의 또 다른 자아 즉 그의 개인적 심리 작용의 산물이며 벽초가 자신의 피조물의 몸에 새겨 넣은 인위적이고 가상적인 양심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 유령 자신의 목소리도 아니었고 지식인 창조주가 힘써 가르쳐준 노래였다고 이해해야 한다. 반지성주의는 조선 지식인의 비밀스런 내면의 갈등을 은밀히 나타내고 있다. 502


임꺽정이 드러내는 노골적인 반지성주의는 작가가 그러한 사상을 처음으로 만들어서 제시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조선 사회 어디에나 퍼져 있던 생각을 전달하고 있음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사상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부르짖는 사상이 아니라 남몰래 은근히 자신의 다른 자아에게 강요하는 격률인 것이다. 보통은 말로 드러나지 않지만 간혹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 사적인 신념이며 따라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반지성주의는 프란츠 파농이 지적하는 식민지 사회 전체에 번져 있는 폭력성과 유사한 것으로 느껴진다.  506


화적 임꺽정은 우리 근대 사상사에서 본격적인 근대 서구인의 핵심 기관, 즉 근대 서구인의 심장을 장착한 영웅이었다. 그의 심장이란 이성과 비이성 또는 본능적 욕망이 분리되어 섞이지 않고 자리잡아 서로 반응하여 끝없는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엔진인 것이다.....임꺽정은 서림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그와 원수가 되었지만 원래 서림이 임꺽정을 이용하여 노렸던 것은 자신의 생존과 더불어 국가권력의 탈취였다. 임꺽정의 본능에 비추어 볼 때 합리적인 권력 탈취란 사악한 것이었다. 우리 근대의 정치적 인간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반합리적이며 합리성에 대한 부정과 적대가 그의 내면과 양심이었다. 임꺽정은 혁명의 완성을 거부하는 영웅, 끝없는 저항만을 위한 영웅이었고 이는 홍길동의 영구 혁명으로의 회귀였다. 509-510


임꺽정의 반지성주의는 현대 우리 정치의 구조적 문제점들과 직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장기적으로 임꺽정 신화는 나르시시즘에 전염되어 임꺽정을 자신과 혼동하는 정치 스타들을 대량으로 양산해왔다. 지식과 지성을 경멸하고 타고난 능력과 직접 경험에만 의존하는 기형적인 독불장군 유형의 정치 영웅들은 우리 현대 정치인들 사이에서 우성의 종자로 번식해왔다. 원래 불의를 보면 못 참는다고 허세를 부리며 권력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 저항의 스타들은 우리 정치를 문자 그대로 아수라판으로 만들어 왔다. 현대 한국 정치의 고질은 단순히 제도적 결함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정치 개혁 식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516-517


반지성주의는 일제 시대에 나타나 무진의 안개 같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어느 틈에 번져나가는 저주로서 우리의 의식과 지성을 마비시키며 주체성을 풍화시켜 왔다. 반지성주의는 지식과 지식인에 대한 불신과 의혹과 증오와 질투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큰 장애가 되어 왔고 나아가서 개화주의자들의 교육만능주의와 단짝으로 결합되어 대한민죽을 청소년들을 학살하는 최악으 교육지옥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517

 

볕뉘.

 

1. 모임 사이사이 여러 생각이 드나든다. 읽고 다른 이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에서 돌아와 적응하지 못하는 과정이나 루쉰이 왔다주의 혁명문학을 주창하는 이들에게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중국의 저류를 탐색한다. 뭔가 다르게 이어지는 대세와는 다른 이물감을 끊임없이 건져낸다. 읽다보니 김동인의 작품에서 비슷한 느낌이 든다. 이광수가 서양문명과 지식인상에 줄을 서있다면 김동인은 뭔가 다른 느낌과 정서, 오히려 신학문과 신문물이 끊임없이 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한다. 


2. 식민의 경험은 무엇일까? 생존의 벼랑에 다다르고 아무도 도와줄 이 없다는 집단자각 아니 트라우마는 여전히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돼"  "남들 생각할 때니? 너만 챙겨도 벅차!" 저자의 말처럼 피해당사자로서 개인주의 경험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중의 낙인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3. 일본의 청일, 러일전쟁의 승리라는 도취감과 문명에 대한 논리, 지식인의 형성에 대해 여유가 있다면, 지식인의 이땅의 전통과 섞이며 만들어낸 지적 소화도 없이 식민의 그림자처럼 온 지식인에 대한 본능적 불신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생존에 도움도 거창하고 현란함이 오히려 폐만 끼치는데 대한 자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4. 식민을 경험하며 혼자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과 엘리트들에게 당한 이중의 폐해는 주변의 여건이 바뀌어도 여전히 왜곡된 습속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 것은 아닐까? "뭐같아서 못살겠네 하루빨리 외국으로 떠야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유사한 위기국면에서는 이런 생존 본능이 꿈틀거려 판단의 왜곡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5. 조선후기 지식의 수용과 달리 식민의 경험은 지식의 무용이나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거나 저항이 어떤 경로를 밟아야 하는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중의 피해가 늘 우리를 짓누르며 위기의 상황에는 극단이 터져나오는 것은 아닐까?

 

6.  왜곡된 근대의 경험은 여전히 지금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도시화는 빨리빨리로 귀결되고 개인주의도 숨을 고르지도 못하며 받아들였지만 공동체에 대한 갈망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도시화가 개인으로 더 몰아부쳐 사회로 미성숙함은 가속화되었는지도 모른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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