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 박홍규 교수님 강연 외

 

최근 명량이란 영화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명량 영화를 보지 않았습니다. 교황 개인으로서 역할은 훌륭하지만 이렇게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것을 좋게보지 않습니다. 호들갑!스럽습니다. 교황이라고 하면 개인이 아니라 이천년의 카톨릭 역사를 살펴봐야 되는 것이 맞습니다.

 

 성인이나 위인이 아니라 개인, 인민, 민중을 이야기한 사람이 300년전 이탈리아의 비코였습니다. 엘리트에 의해 역사가 끌려간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문창극 교육부장관후보가 일본의 지배가 신의 섭리하고 했습니다. 종교인이 갖는 논리를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세상만사가 어렵거나 즐겁거나 신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신실한 주변의 종교인에게 물어봤습니다.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의향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뜻으로 보는 한국역사]를 쓴 함석헌선생님도 같은 논리로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시련은 하느님이 준 것이다. 전쟁이나 악행이나 대부분이 신이 준 시련이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이었고, 타민족은 속세의 역사라고 종교의 역사는 말합니다. 함석헌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대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중세는 로마에게, 근대는 독일민족에게 20세기는 일본민족을 신이 선택했다고 합니다. 이 논리는 일본 개신교 목사와 흡사합니다.  그렇게 논리를 가져온 것입니다. 다가올 21세기는 한국전쟁이라는 마지막 시련을 겪은 한국민족을 선택할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세계사의 중심으로 한국인이 되어서 기분좋으십니까?

 

비코는 말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신의 섭리가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모든 민족의 정신이나 사회구조, 사회제도는 비슷하다. 비슷한 공통감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합니다.

 

 

자민족 중화주의!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한 것은 폴리스안에 사는 사람이 최고다. 그 밖은 모두 야만인이라고 여겼습니다. 유럽역사의 어두운 존재로 교황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이런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비코는 민속학의 아버지, 인류학의 아버지, 다원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웁니다.  고흐는 30년뒤에 인류가 그의 가치를 알아줍니다. 비코는 역사에 묻힌 뒤로 300년이 지나서야 아는 척을 하게 됩니다.

 

 1968년을 기점으로 서구의 서양제국주의 시각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가 독립하게 되고, 그리스 로마, 백인중심의 문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제가 그리스귀신죽이기란 책에서 말했지만, 온갖 귀신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합니다. 플라톤은 독재의 아버지입니다. 박정희의 뿌리입니다. 잘난놈이 지배해야 한다고 한 뿌리입니다. 셰익스피어 또한 마초주의와 제국주의의 대명사입니다. 소크라테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고전읽기, 원서로 읽어야한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최근에 한국고전선집을 비싼 돈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첫책이 김만중의 서포만필이었고 꾹꾹 참으며 끝까지 보았습니다. 한국의 고전이 김만중부터 시작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소개말에 몽테뉴와 몽테스키외를 구분못하는 저자, 야사 비슷한 몇꼭지를 우려낸 글들은 차마 그 이전의 이규보와 최치원같이 가슴을 치고 느낌이 오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고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름만 알고 다 고개만 끄덕거리는 책은 아닌가요?

 

 "인간만이 창조한 지식은 인간만이 안다"라고 비코는 말합니다. 수학이나 과학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역사는 인간을 통해서만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비코는 시대를 이렇게 나눕니다. 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 고대-중세-근대의 역사삼분법의 모태도 되기는 하지만 진보사관의 발전이라는 개념과는 다릅니다.  '순환을 거듭한다. 변모한다, Becomning, Making의 뜻을 갖습니다. 인간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동물보다 못한 약한 존재이고, 야만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자연과 대면해서 그 공포때문에 신화를 만들었고 종교를 만들게 됩니다. 일리어스에 나오는 영웅의 시대를 통해 사회에 계급, 권력, 지배의 역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평민이나 민중의 시대가 버무려지면서 한문명은 생성되는 것이다. 어쩌면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이라는 역사시각도 비코에서 빌린 것입니다. 그리고 신-영웅-인간의 시대는 동시에 생길 수도 있고 순환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새로운학문의 처음과 끝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나옵니다. 민주주의를 한다고 했는데 이 모양 이꼴이 될 수도 있다라고 말입니다.  언어, 정신, 제도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산물이자 권력의 소산입니다. 이성이나 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제국주의는 다 거짓이라고 합니다. 단테의신곡이 마호멧을 연옥에 넣듯이,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도 마찬가지로 타자의 재배를 전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침략담론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그렇게 자각한 그 시점, 근원을 다시 만들자가 아니라 그때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라는 이야기입니다. 푸코의 계보학처럼 처음의 출발점을 다시보자. 그 출발이 얼마나 더럽고 추잡한지 알아야 한다. 아시아/아프리카는 그 처음의 야비함을 알아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서양 모더니즘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이성과 지성을 중시한다고 합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감성, 비합리를 강조한다고 합니다. 비코는 데카르트의 대척점에 서있는데 포스트 모더니즘을 중시하면서도 함께 이성과 지성을 감안하는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문화, 분화, 파편화를 넘어서 공동지, 조합지, 전인적, 종합적인 르네상스의 새로운 인문학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론이 아니라 실천지를 늘 염두에 두는 종합적 인문학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인문학이라는 것이 있다면 다원주의, 가치 상대주의, 그리고 이것의 나열이 아니라 다양성에서 보편성을 끌어내는 생태, 자유, 자치를 모태로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나키스트를 소개하는 이유는 지금 여기가 너무나 권력, 권위, 국가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반권위, 반권력, 다양성이 꽃피울 수 있다면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겠다는 마음때문입니다. 예수도 부처도 다 아나키스트였다고 여깁니다. 새로운 시도나 생각의 모험으로 아나키즘을 소개하고 알리는 것입니다.  리더에 대한 갈망이 넘치는 사회가 오히려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우리 모두가 리더일 수밖에 없고 리더성을 갖는 것이 인문학은 아닐까 합니다.

 

 

볕뉘.

 

1. 천만이상의 제조된 소비자, 감정의 신경안정제 란 격한 표현을 자제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 아니냐는 미혹을 다시 곱씹어본다. 변호인의 송강호가 쌓인 감정을 대신하는 장면에 누가 눈물 한모금을 삼키지 않을 수 있단 말인다. 뭔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의혹이 과다하지 않을까? 참는다. 아닐꺼야. 우리의 울화와 감정은 모아지고 계산된다. 작품성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대중이 몰입하게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5억원과 부대비용 5억, 5년간 관리되는 감독은 5년동안 한두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면 된다는 얘길 듣는다. 상장을 위해 좌석조작은 흔한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다시 한번 의혹을 되물어본다. 만약 천오백만이라는 시민이 신경안정제를 복용하지 않고, 헌법에 한 조항에 몰려들거나, 한 기관의 잘못된 시스템에 응집해서 그 돈과 열정을 쏟아부었더라면 세상은 달라진다. 시민의 힘이다. 하지만 현실은 소용돌이치는 정국에도 화려한 휴가로, 변호인으로 명량으로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평온을 되찾는다. 두번, 세번 영화관람의 결과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세상에 쌓인 역한 감정에 어깨동무를 걸어준다. 편안하다. 잊었다. 집단자위. 위험한가?!

 

2. 정치와 권력이 분리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정치와 권력이 따로 떨어져서 사실 정치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아무리 외쳐대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권력은 뒷짐지고 따로 유유자적한지 오래되었다. 정치인에게 아무리 아우성쳐도 하나도 바뀌지 않는다. 정치인에게 힘을 실어주어도 틀에 박혀버린 시스템은 손가락 까딱하지 않는다. 권력은 자신의 은신처로 틀과뼈대와 살을 모두 바꾸어놓아서 별반 손댈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권력을 정치에 붙여 소환하는 일이다. 이제 민주국가나 국회가 할 일은 별반없다. 왜냐구. 정치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만 소환하기 때문이다. 민의 물결이 권력을 찰랑거리며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단 하나라도 건져내지 못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것이 없다. 그 일을 우리는 십년이 넘도록 이십년이 넘도록 거리에서, 그리고 또 이렇게 패턴을 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권력에 물을 뿌려 바꾸려하지만 기름기 투성인 기름에 물한방울 적시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전히 그 기름기를 더 촘촘하게 우리의 일상에 숨이 막히도록 부지런히 기름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치의 문턱을 넘어 권력의 잿빛을 한점 한방울이라도 색깔을 바꾸려면 우리는 뭔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기름기에 녹아들어가 색깔을 바꾸어내려면... ...여긴 서구 유럽의 한나라도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아니다. 반도가 나뉜 섬나라 남한이다.

 

3. [처음으로 돌아가라]란 토크쇼를 한 뒤 바래거나 잊혀지고 있던 비코를 다시 한번 만난다. 불우한 가정, 삶만이 아니라 복사본으로 읽던 책들의 행간도 멀어진 것인지 낯설기도 하다. 입체적인 순환의 역사, 시도와 시험으로서 아나키즘, 님의 저작이 많이 겹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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