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주말을 위해 두권의 책을 주문한다. 다른 책들은 보지 않기로 하고 이동중에 챙겨두다. [끄라비]와 [인간의 조건], [정복자]를 고르고 싶었는데 대신 [인간의 조건]을 보게된다. [끄라비]는 태국 끄라비를 소재로한 단편이다. 색다른 맛을 보이는 여러 단편이 인상깊다. 마지막 한편은 궁금증을 덮어버리고 싶지 않아 접어 따로 보관해둔다. 아마 문장이나 글감과 이야기가 고프다 싶으면 다시 볼 셈이다. [인간의 조건]은 테러리스트 첸, 기요, 지조르, 펠렌, 메이, 클라피크 인물들의 동선 보다는 고독에 소환되는 지점에서 되묻는 대사들에 주춤거리게 된다. 한계와 틈이 보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삶과 삶의 한계를 넘기위한 중독된 존재를 말한다.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자네는 내가 '명분'이라는 가치에 환상을 품었던 게 아니라 믿겠지. 하지만 난 그럴 위험성을 알고 있었어. 그런 우려를 무시하고 밀어붙였던 거야.....나는 행동이나 행동의 결과와 관련이 있을 때만 의지를 발동시키게 돼. 내가 주저 없이 혁명에 뛰어들었던 건 혁명의 효과가 즉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 항상 변화무쌍한 것이기 때문이네. 따지고 보면 난 도박꾼이야...오늘은 어제보다 더 큰 걸 거는 식으로 도박을 배운 거야..하지만 그건 늘 똑 같은 도박이지. 난 그 점을 잘 알고 있어. 내 삶엔 리듬이, 달리 말해 개인적 숙명이 있어 나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네. 이 도박에 힘이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매달리면서...그래서 내가 깨달은 건,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삶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다는 사실이네. 135-136
무슨 일이 있어도 대지를 저버리면 안 돼라시던 아버지 말씀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네. 부조리한 세상에 살든, 다른 세상에 살든...세상의 허망함에 대한 확신이건 강박관념이건 그런 게 없다면 힘을 이끌어낼 수도 없고 '진정한 삶'조차 있을 수 없어.. 가린의 삶의 의미가 이러한 생각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의 힘이 부조리에 대한 이 강렬한 감각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약 세상이 부조리하지 않다면, 아마도 삶의 본질적 허망함이 아니라 절망적 허망함으로 인해 그의 삶 전체가 헛된 몸짓이 되어 산산이 흩어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140
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감수하는 걸 봐왔어. 때로는 비열하게, 때로는 끔직하게 말이야. 난 다정다감한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폐부 깊숙이 동정심을 느끼고는 목이 멜 때가 있어. 그런데 말일세, 나 혼자가 되면 그 동정심이 여지없이 달아나 버리고 마는 거야. 고통은 삶을 더욱 부조리하게 만들지. 고통이 삶을 공격하는 게 아냐. 우스꽝스럽게 할 뿐이야...삶이 무의미한 자는 연민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지. 사방이 꽉 막힌 인생이야. 뒤틀린 거울처럼 세상을 온통 일그러뜨려 비추지...인간은 부조리를 인정할 수는 있어도 부조리 속에서 살기는 어렵다네. '대지를 저버리고자'하는 자들은 대지가 자신들의 사지에 딱 들러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대지를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대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142 [정복자]에서
1.
인근 도서관에서 몇 권을 더 빌려본다. 빌린 [정복자]의 서문에는 '어떻게 혁명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니라, 주인공 뒤 켠에 서서 어떻게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좋은세상'도 좋겠지만 '부조리'에서 시작했더라면 지금은 저항의 근력이나 문화적인 근력은 조금 더 나아졌을까? 분노는 오래가지 못한다. 부끄러움이 더 오래간다는 이야기가 루쉰을 이야기하며 나왔다. 아큐라는 인물의 외침,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그 처절함, 그보다 나은 지점을 향해 몸을 던지는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밝음을 쫓아가는 것보다. 어둠에서 어스름으로 나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제 3지대를 보지 못하는 맹점, 좋은 것만 선취하려는 욕망에 가려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을 보지 못하는 둔함. 이분법에 전도되어 도저히 다른 사고와 판단을 이어가지 못하는 아둔함까지 섞인 것을 보면 외려 부조리를 가정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2.
좋은 세상, 좋은 삶의 본보기만 보려하지 말고, 누더기처럼 그 틈사이를 비치는 욕망과 불합리. 어쩌면 당연히 매겨진 준계급의 속살을 보여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삶이 기우뚱거리고 불안하고, 이 삶만이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늘 불안한 것이라고 말이다. 원하는 것을 갖게 되자말자 더 나은 것으로 몸을 갸웃하는 긴장감이 현실을 낫게 끌고 간다는 사실말이다. 재난과 질병과 예상하지 못하는 천재, 인재로 인해 삶의 나락에 떨어지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 절벽의 가장자리를 뿌리깊게 각인하는 것이 더 안전한 지도 모른다. 원하는 시스템의 장밋빛도 보고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삶의 가장자리, 삶들의 가장자리를 서로 나누고 볼 수 있다는 것,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전선이라는 것이 그래야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끼리끼리 모여사는 지금의 세태로서는 도저히 장애인의 삶과 어둠조차 보려해도 보이지 않는다. 느끼려고 해야 느낄 수 없다. 그 삶의 붕괴 속도, 속도감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